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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용과 거북이 지켜주다,
쌍암정려(雙巖精廬)

상량문에 ‘용’과 ‘거북’을 적는 이유는 둘이 물과 관련된 동물이라는 점에서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에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



음력 설날이 있는 정월은 재액(災厄)을 피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던 달이었습니다. 선인들은 집을 지을 때도 재액을 방지하기 위해 상량문의 처음과 끝에 용(龍)과 거북[龜]을 마주보게 적었습니다. 상량문은 목조 건물의 건축 과정에서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는 상량제(上樑祭)에서 사용하는 축문(祝文)입니다. 그 중에 양쪽으로 용과 거북이 들어간 짧은 상량문을 상량시(연월일시), 가주(家主) 생년, 건물 좌향, 기원문을 포함하여 집안의 중심인 종도리의 바닥에 적었습니다.



재액방지문자(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상량문에 ‘용’과 ‘거북’을 적는 이유는 둘이 물과 관련된 동물이라는 점에서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에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처럼 용과 거북은 재액을 피하고 건축물을 훼손하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힘을 가진 동물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액운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과 준비에 부합하는 장소로 용과 거북이 지켜주었던 정자인 ‘쌍암정려(雙庵精廬)’의 편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진주강씨의 유적, 사익재와 쌍암정


‘쌍암정려’는 국전(菊田) 강형수(姜馨秀, 1875~1942)가 노년을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지내 위해 1927년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진주강씨(晉州姜氏) 집성촌인 옹천리는 마을 북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인 형상이 단지와 비슷하다고 하여 옹전(瓮田), 마을을 가로지르는 옥계천이 맑고 깨끗하여 옥천(玉川)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마을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하여 ‘옹(瓮)’자와 ‘천(泉)’자를 붙여 옹천(瓮泉)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입향조 강시(姜蓍)가 성균시에 급제하여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한 인연으로 강시의 아들 5형제가 고려가 망할 때 벼슬을 사직하고 안동과 봉화(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등지로 낙향하였습니다. 장남 강회백(姜淮伯)은 안동 북후면에 자리를 잡았고, 강회백의 아들 강종덕(姜宗德)은 예천 감천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이후 강종덕의 증손자 강두전(姜斗全)이 옹천에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이 이루어졌습니다. 옹천리에 거주하는 총 500가구 가운데 약 260 가구가 진주강씨입니다. 진주강씨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강봉문(姜鳳文)이 후학을 양성하던 사익재(四益齋)와 강형수가 세운 쌍암정이 있습니다. 북후면 옹천에서 학가산 가는 길을 따라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두무령(杜舞嶺)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곳에 사익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몇 그루의 노송이 그윽한 자태를 드러내고 그 시내 사이로 기암괴석이 무리 지어 있는 위에 쌍암정이 앉아 있습니다.


국권 회복은 오직 교육에 있다


강형수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건일(建一), 호는 국전입니다. 오암 강영숙, 지포 강건수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웠습니다. 1903년 29세인 강형수은 관리서주사를 제수받았습니다. 40세의 강형수은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음을 직시하고 옹천리의 사익재에서 용전학술강습회를 창립하였습니다. 52세에는 간석대(澗石臺)를 만들었고, 이듬해에 쌍암정을 지었습니다. 저서로는 『국전유고(菊田遺稿)』 4권 2책이 남아있습니다.


용전학술강습회 제 11회 졸업기념 사진(출처: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_사진아카이브)


강형수가 창립한 용전학술강습회의 제11회 졸업사진이 남아있습니다. 1927년 3월 19일에 용전학술강습회의 서당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첫 번째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있는 강형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는 첫번째줄 왼쪽에서 첫번째 강대기(선생님), 두번째 강용수(한말 통정대부시어), 세번째 강연수, 오른쪽에서 첫번째 강명수, 두번째 강신윤이 있습니다. 두번째줄 왼쪽에서 첫번째 강중일(학생), 두번째 강성원(선생님), 세번째 강대주(선생님), 오른쪽에서 첫번째 강화원(학생), 두번째 강대타(선생님)가 있습니다. 세번째줄 왼쪽에서 첫번째 강성구(학생), 두번째 강정술(학생), 세번째 강경원(학생), 네번째 강순준(학생), 오른쪽에서 첫번째 강대원(학생), 두번째 강신주(학생), 세번째 강대기(학생)가 있습니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 강씨로 진주강씨의 집성촌인 옹천리에 있었던 사익재가 강습회의 모태였던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용전학술강습회는 구국교육운동의 물길을 튼 기관으로 안동의 근대 교육사에서 중요한 장소입니다. 강형수는 용전학술강습회에서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구국계몽운동을 위한 안동지역의 학교설립운동은 무력항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적인 독립운동을 이끌어내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을 연 역사 깊은 이 안동의 용전학술강습회는 지역민에 의한 교육활동의 좋은 예시입니다.


쌍암, 거북 바위와 용 바위가 서로 마주보다


‘쌍암’은 한 쌍의 바위라는 말로, 정자 뒤의 거북 바위와 용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데에서 취한 명칭이었습니다. 쌍암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집입니다. 좌측에는 온돌방을 배치하고 우측에는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삼면에 판벽과 관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습니다. 시멘트로 만든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습니다. 정자 내부에는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김제면이 지은 「쌍암정려기(雙巖精廬記)」와 권상익(權相翊, 1863~1935)이 지은 「쌍암정사기(雙巖精舍記)」가 걸려 있습니다. 정자의 우측면에는 강형수의 유묵(遺墨)인 해서체 ‘용귀(龍龜)’가 걸려 있습니다.

강형수가 쌍암정을 짓게 된 경위는 권상익의 「쌍암정사기」에 자세히 나타나 있어 소개합니다.

강형수가 쌍암 위에 정자를 지어 놓고 쌍암정려라 명명하고는 자랑하여 말하기를, “내가 사는 곳은 영가의 큰 고을이다. 인가는 즐비하고 울타리는 서솔 이어져 삼사백호가가 되는데 성시(城市)를 끼고 관도(官途)가 통하여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곡하는 소리, 소 모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수레의 먼지, 말발굽 소리, 앞뒤 분간도 못할 만큼 취하여 거꾸로 실려 가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 등 그 분잡함을 감당치 못한다. 여름철 장마나 찌는 듯한 무더위를 당해서는 확 트이고 시원한 정취를 볼 수가 없고, 바람과 눈으로 두문불출할 경우엔 눈이 어지럽고 귀가 고단하여 문득 배우고 지켜 나가는 맛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한 내가 소시부터 시서(詩書)를 업으로 삼아 다행히도 대충 의술을 섭렵했거니와 나를 찾아오는 자가 종일 문전에 이르기에 나는 매우 괴로워 이런 환경을 구한 것이다. 지세는 높지 않으나 앞이 확 트이고, 산은 깊지 않으나 그윽하고 고요하며 산골의 물소리가 들리고 수풀 바람 소리가 메아리치며 매미는 노래하고 새들이 지저귀니 이전의 시끄러움이 없다. 이내의 빛과 암석의 기운과 구름의 모습과 물빛도 이전의 잡다한 것이 없다. 우리 일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수백 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이런 좋은 환경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것은 아마 하늘이 내린 듯하다. 나는 노년을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하였다.

금서(錦西) 김규환(金奎煥)이 읊은 「쌍암정(雙巖精)」 시도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


두 바위를 좋아해서 지은 정자는爲愛雙巖架一亭
진실로 주인이 책 읽기에 알맞네主人亶合讀黃庭
새로 물길 난 곳에는 삼상이 푸르고新潮世界三桑碧
텅 빈 땅의 원림에는 잎이 무성하네隙地園林一葉靑
높다란 두문령은 그림을 그린 듯하고斗嶺崢嶸當面畵
깨끗한 옥계천은 마음 씻기 그만이네玉泉甘潔洗心醒
이 속의 참다운 흥취 그 누가 알랴這間眞趣那能識
덧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우습구나笑殺浮生摠投形


이 글들을 보면 강형수가 조용하고 안정된 장소인 쌍암정에서 노년을 준비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젊어서 노력하고, 노년의 안정을 준비하다


쌍암정려(雙庵精廬)는 강형수가 노년을 휴식하면서 지내기 위해 건립한 정자의 편액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소우(小愚) 강벽원(姜元, 1859~1941)이 쓴 해서체입니다. 강벽원은 어릴 때부터 안진경과 미불의 법첩을 익혔습니다. 정(正)과 기(奇)의 조화적 미의식에 기초한 웅경(雄勁)한 글씨는 해외에까지 알려졌고, 각체를 두루 잘 썼습니다.


쌍암정려(雙庵精廬) / 48.3x126.0x6.8 / 해서(楷書) /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한국의 편액)


굳세고 두터운 필획이 시원하고 힘찬 글씨다. 정해진 편액 공간에 네 글자를 써 넣고도 두터운 필획이 그침 없이 활달하다. 필획이 많은 복잡한 글자임에도 구성이 치밀하고 기세의 상호 흐름이 원활하다. 글자 내부는 긴밀하고 외부 자간 관계는 균정하다. 탁월한 화면 운용으로 화면 가득한 울림을 만들고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쌍암’은 정자 뒤의 한 쌍의 바위인 거북 바위와 용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용과 거북은 상량문에서 서로 마주보게 쓰는 동물문자로, 재액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강형수가 노년의 편안한 휴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택한 쌍암정의 위치는 그 형상자체에서 불운을 막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강형수는 젊어서 용전학술강습회를 운영하여 교육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노력하였고, 노년에는 쌍암정을 지어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였습니다.

한해를 시작하는 정월은 미처 예상치 못한 액운(厄運)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편안한 일 년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국전 강형수의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사익재와 쌍암정은 노력과 준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장소입니다. 그가 교육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본인의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모습은 오늘날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깁니다.

위험에 대비하고 안정을 준비하는 노력은 어지러운 시국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용 바위와 거북 바위의 사이에 위치한 정자에 걸린 ‘쌍암정려’는 우리에게 노력과 준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정      리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매해의 마지막을 구나로 장식하며 추억에 젖다”

김령, 계암일록,
1603-12-30~ 1608-12-30

1603년 12월 30일,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김령은 어버이가 모두 살아 계실 때를 추억해 보니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지없었다. 그는 입으로 율시(律詩) 한 수를 읊었다. 내일 제사 때문에 제수 음식을 살펴보고 초저녁에는 구나(驅儺)를 행했다. 자개·이지 등과 옛날에 한 약속이 있어서 후조당(後凋堂)에 모여서 대화했다. 닭이 운 뒤 각자 흩어졌다.
1606년 12월 30일, 김령은 초저녁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병중에 있다 보니 옛날 어버이 계실 적의 성대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김령은 자신도 모르게 느꺼움이 사무쳐 슬퍼졌다.
1607년 12월 27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방잠에 가서 큰 배소(拜掃)를 행했다. 나례(儺禮) 행사의 북소리를 들으니 옛날 일이 생각났다.
1608년 12월 30일, 추위가 심했다. 김령은 저물녘에 설월당에서 외가의 절제(節祭)를 지냈다. 한해가 이미 다 지나갔다.
옛날, 어버이를 모시고 즐겁게 지내던 시절과 아이 적에 장난치며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느꺼움에 탄복되고 탄복되었다. 김령은 밤에 구나(驅儺)를 행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에게 감사 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상께서 전염병을 막을 제사를 지내라 명하시다”

최흥원, 역중일기, 1746-05-22

1746년 5월 22일, 흐린 날이었다. 요사이 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났는데, 그 때문인지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부 시장에 보낸 종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질 못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민간에 역병이 도는 것을 아시고는 이를 치료할 벽온단을 나누어 하사하셨다고 한다.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에게 올리는 제사,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상의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료들과 백성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을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요사이 고을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을 어찌나 화급하게 독촉하는지, 온 고을이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서울에 계신 주상은 백성들이 전염병에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일선 관리들과 향리들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에만 골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어찌 이것이 관리로서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하겠는가! 최흥원이 보기에 전염병을 일으키는 여귀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겐 더 무서운 존재 같았다.

“1846년의 설날 - 세배와 차례, 성묘 그리고 한해 운수 점치기”

서찬규, 임재일기,
1846-01-01~ 1849-01-01

오늘은 1846년 1월 1일, 정사(丁巳)년 설날이다. 매해 그러했듯 서찬규는 닭이 울 무렵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하고, 날이 샐 무렵 절 차례를 지냈다. 서실로 나와서 덕우와 함께 시초점을 쳤는데 서지췌(噬之萃) 괘가 나왔다. 오후에는 신제(新堤) 북쪽 산언덕의 선영에 가서 성묘했다. 5대 조비(祖妣) 영양 이씨(永陽李氏), 조비 월성 손씨(月城孫氏), 증조비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등 모두 네 분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 1849년(헌종15년) 1월 1일에는 감기 때문에 차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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