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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자 인터뷰
-시나리오 〈금주시대〉의 임찬익 작가-

2021년 두 번째를 맞이한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임찬익 작가님의 〈금주시대〉가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재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한 영조의 기록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금주시대〉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함께 만나러 가 볼까요?

"영조51년,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한양에 은밀하게 술이 뿌려지고,
영조의 명을 받은 이지량이 비밀음주단속기구 불촉단을 만들어,
최대 밀주 조직의 뒷배를 찾는다."


Q. "제2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의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나리오 〈금주시대〉의 대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시상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오랜 시간 동안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스토리테마파크〉 사이트를 자주 방문했어요. 그곳에서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며 시나리오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의 '900 역사' 서가에 가서 관련 자료를 찾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가는 도서관의 '역사 서가' 시대별 서적 위치도 모두 외울 정도입니다. 이번 대상 수상이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 된 거 같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시나리오 〈금주시대〉는 제작을 하려고 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19 팬더믹이 전 세계를 뒤덮어, 영화의 극장 개봉이 어려워진 지금, 저는 절치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대상 수상을 계기로 〈금주시대〉가 제작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조언을 많이 해 주신, 지금은 하늘에 계시는 씨네2000의 故 이춘연 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꽤 오랫동안 제 시나리오를 읽어주고 아빠 시나리오를 아껴준 임지오, 임우재, 그리고 아내 김혜선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작품을 선택해주신 여러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Q. 〈금주시대〉에서 영조의 '금주령'을 배경으로 쓰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저, 푸른역사, 출처: 교보문고)


강명관 교수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금주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면 일시적으로 금주령을 행한 적은 있었지만,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오랜 시간동안 행한 것은 영조가 유일했습니다. 영조가 50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강력한 금주령을 실행했다면, 나 같은 애주가는 어떻게 지냈을까? 생각해 본 것이 시나리오 집필 계기였습니다.


Q.〈금주시대〉의 음주 단속 기구인 '금란방'은 양반 자제는 풀어주고 백성들은 잡아 가두며, 술 장사꾼에게는 뒷돈을 받기도 하는 등 부패가 심합니다. 이에 새로운 음주 단속 기구인 '불촉단'을 만들게 됩니다. 작가님이 '불촉단(不觸團)'이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 〈언터처블〉, 1987

'불촉단(不觸團)'은 '아무도 건들릴 수 없는 집단'이란 뜻인데, 영어로 옮기면 'The Untouchables' 와 같습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언터처블〉은, 미국 금주법 시대의 밀주 단속반의 활약을 담은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불촉단'이란 이름을 지었습니다.


Q.〈금주시대〉의 새로운 음주 단속 기구 '불촉단' 5인방은, 형조 별제 '이지량('불촉단'의 대장)', 한성부 소속 참군 '박만수', 한성부 소속 '전몽인', 술 전문가 '막주', 그리고 한성부 오작인 '남인구'입니다. 이 중에서 시체를 검시하는 '오작인'을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이상호 저, 푸른역사)

이상호 선생님의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읽고 '오작인'의 존재에 대해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금주시대〉에 추가한 캐릭터가 바로, 오작인 '남인구'입니다. '불촉단' 수사를 하는 중에, 최진사가 술 마시고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의 내막을 밝혀내는 역할로 오작인 '남인구'를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 후반부의 긴장감 강화를 위해 이 부분을 빼면서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가 되어버렸습니다.


Q.〈금주시대〉에는 영조의 강력한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지물전, 서점, 절에서 국법을 어기고 술 장사를 합니다. 이렇듯 술과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술을 파는 설정이 재미있는데요, 어떻게 이런 에피소드를 생각하게 되었나요?


저 역시 술을 좋아하다보니 조선시대 술꾼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최근까지도 코로나19 영향으로 10시까지 술집 영업을 제한했는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10시 이후에도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까? 숨겨진 공간을 만들어서 영업을 하기도 했고요. 적발되는 사례들을 보며 조선시대에도 저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술꾼이지만 정부의 방역 수칙을 엄격히 지키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집에서 아내와 마시는 술이 제일 맛난 술이었습니다.


Q.〈금주시대〉에 꼭두쇠는 "탁주마시는 놈은 걸리고, 청주 마시는 놈은 안 걸리고."라고 말하는데요, 탁주는 백성들이, 청주는 양반들이 마시는 술이라 마시는 술에 따라 신분의 고하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마시는 술, 향온주도 나오는데요, 현재 전해지는 많은 전통주 중에서 '향온주'를 선택한 이유는? 더불어 '향온주'를 만드는 여성 '방소윤'을 설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종묘제례 (문화재청)

술 단속반이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양조장이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조는 종묘제례에도 감주를 쓰며, 자신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술인 '향온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설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향온주'를 만드는 양조장이가 있다면,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여성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방소윤'을 설정했습니다.


Q.〈금주시대〉에서 영조는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이다'라고 말하고, 술 만드는 방소윤은 '술은 물의 잔치요, 땅의 잔치'라고 말합니다. 작가님에게 술이란?


시나리오 마지막, 주인공 이지량의 아버지 대사에 제 술에 대한 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술은 누구랑 마시냐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술은 언제나 맛나고 즐겁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술은 가장 좋은 벗이라고 생각합니다.


Q.〈금주시대〉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장면은 무엇인가요?


술의 맛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여줄까? 맛은 화면으로 보여줄 수 없는데… 그래서 술을 만드는 과정이나 마시는 사람들의 리액션을 많이 고심했습니다.

술을 빚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Q.〈금주시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대사는 무엇인가요?


시나리오 마지막, 주인공 이지량이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장면입니다. 아버지가 '술이란 말이다. 누구랑 마시냐에 따라 술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라고 하죠.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술이 최고라는 뜻이죠. 저도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술이 가장 좋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참 좋아하셨는데,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이제 술은 못 드십니다. 하루 빨리 쾌차하셔서 같이 술 한 잔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쓴 장면입니다. 또한 정조 역시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술 한 잔 하고 싶었을 것이란 생각에서 그 장면을 썼습니다.


Q.〈금주시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술이 나쁘다 해서 강제로 막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비록 술을 먹고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술을 막는 것 자체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영조가 아무리 좋은 취지에서 금주령을 내렸지만, 국가 권력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Q.〈금주시대〉의 영화 개봉을 기대하며, 영화 〈금주시대〉를 보게 될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술이란 물질의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마시면 분위기를 살리고 사람을 기쁘게도 하지만 과하면 사람을 헤치기도 하고 평생 후회할 일도 만드는 게 술이죠. 술이란 것을 어떻게 우리가 활용을 해야 될까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Q.영화감독으로서, 시나리오작가로서 계획은 무엇인가요?


일단 〈금주시대〉를 꼭 영화로 만들고요. 내년에는 시각장애인 영화감독의 삶을 다룬, 다큐영화 〈영화감독 노동주〉를 개봉할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낼 계획입니다.


임찬익 작가






인터뷰에 앞서 〈금주시대〉의 로그라인을 선 공개했는데요, 코로나19 팬더믹이 종식되고, 극장에서 마음 편히 영화 〈금주시대〉 볼 날을 고대하며, 임찬익 작가님과의 인터뷰를 마칩니다.


〈금주시대〉

영조 51년, 강력한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한양에는 비밀리에 술을 만들어 파는 조직이 있었다. 이에 영조는 형조 별제 이지량을 임명하여, 최대 밀주 조직의 뒷배를 잡으라고 명한다. 영조의 명을 받은 이지량은 비밀음주단속기구 불촉단(不觸團)을 만들어 밀주 조직의 뒷배를 찾는다. 한양 최대 밀주 조직은 절을 위장해 술을 만들고 팔았는데, 뒤에는 좌의정 홍인한이 있었다. 영조의 어연례 날 좌의정 홍인한의 죄가 밝혀지는데……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선 우리 역사 기록을 활용한 영화 시나리오를 공모합니다. 매년 전통 소재에 관심 있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국국학진흥원을 포함한 국학진흥협의체의 전통 소재를 활용하여 작성한 90분 분량 이상의 완결된 영화 시나리오를 받습니다. 올해도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사이트(http://story.ugyo.net)’에서 접수를 받을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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