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쇠야, 준비 다 되었느냐?”
“네, 주인마님.”
마당쇠가 얼른 사랑채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럼 가자.”
이러고 나서는데, 뒤에서 정생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여보, 나 좀 보고 가세요.”
아내가 대청마루에 나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거라.”
마당쇠를 마당에 세워놓고 아내 뒤를 쫓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장 보러 가시는 거죠?”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장에서 사 올 목록은 내 잘 간직하고 있어요.”
“안 잊었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장에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조선 시대의 시장(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정생이 깜짝 놀랐다.
“어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양반댁 부녀가 어찌 저잣거리에 나가겠다는 것입니까?”
아내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여자가 쓸 물건들을 당신이 사 오다 보니 좀 부족한 것이 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어서 말하세요. 날도 더운데 먼 길을 어찌 가려고 하세요. 내가 꼭 사오리다.”
“그게…”
아내가 또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말로 해도 어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 하겠어요? 이번에는 저도 꼭 가봐야겠습니다.”
정생은 약간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 온 물건에 하자가 있다, 이런 말씀인 거죠? 대체 뭐가 문제라 그러는 겁니까?”
“그걸 꼭 말씀드려야겠어요?”
아내의 눈에도 성질이 생기는 것 같았다.
“말해보세요.”
“좋아요. 보름 전에 장에서 사 온 개다리소반이 있었죠?”
“있었죠. 안성의 좋은 목수가 만들었다고 했어요. 당신도 만져보고 좋은 물건을 싸게 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땐 그랬죠. 그게 열흘도 못 가서 부서졌습니다.”
개다리소반(출처: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부서졌다고요? 아니, 물건을 어찌 험하게 다뤄서 그런 꼴이 나게 한 겁니까?”
“험하게 쓰긴 누가 험하게 썼겠어요? 애지중지 다뤘는데 알고 보니 썩은 나무를 썼더라고요. 자, 이걸 보세요.”
아내가 벽감을 열어서 망가진 개다리소반을 정생 앞으로 밀어놓았다. 정생이 들어보니 다리 연결된 곳이 부러졌는데, 정말 부러진 부분이 썩어 있었다.
“흠흠, 이거 참 어찌 이런 못 된 상인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이 다리는 다시 만들어 붙일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뿐이 아닙니다. 한 달 전에 사 오신 약재도 다 엉터리였습니다.”
“뭐라고요? 그거 다 대구 약령시(藥令市: 약재 시장)에서 가져온 거라고 했는데!”
“거기 녹용이라고 한 건 녹각인데, 약효가 있는지 없는지, 녹각은 되는 건지, 아예 약효도 없는 낙각인지 모르겠는 물건이고, 하수오라고 한 건 도라지였습니다.”
정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약재를 당신이 어찌 분간하시는 거요?”
“제 외가가 대구에 있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아내는 양주 사람이었지만 그 어머니가 대구에서 시집왔었다.
“어머니 집안에 대구 약령시에서 약재상을 하던 분이 계셨습니다. 덕분에 저도 약초를 좀 볼 줄 알게 되었지요. 원래 현아에게 보약 한 첩을 지어 먹이려고 사 온 약재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건 먹여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 약재상이 이번 장에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서 한 번 좀 따져봐야겠습니다.”
대구 약령시(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양반 부녀가 어찌 상인과 대거리를 하겠어요. 그런 일은 내게 맡기면 됩니다. 염려 놓고 기다리세요. 그 약재는 어디에 뒀어요?”
하지만 아내는 굳은 표정으로 도리질을 쳤다.
“이번만큼은 안 됩니다. 제가 꼭 같이 가야겠습니다.”
결국 정생이 아내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 늘 조신하기만 했던 아내가 이번에 큰 소리를 낸 것이라 정생도 놀라고 말았다. 아내는 쓰개치마를 하고 삼월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마님 덕에 쇤네도 지아비랑 시장 나들이를 하게 되었습니다요.”
삼월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팔짝거리며 마당쇠랑 같이 종종걸음으로 앞서갔다. 삼복염천(三伏炎天)이라 날이 꽤 더웠는데도 삼월이는 신이 난 모양이었다.
“다 봤나요?”
“잠시만요.”
시장 입구의 노리개 파는 곳에서 한세월을 보낸 아내는 그다음 가게에 걸린 천을 보고는 아예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이제 모시 종류를 다 봤으니, 무명 종류를 봐야죠.”
“그럼 아직 비단은 보지도 않았단 말이요?”
“비단도 있어요?”
그 말에 주인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비단이라고 다 같은 비단이 아니죠. 금(錦)은 금사를 넣어 짜기도 하고, 은사를 넣어 짜기도 하며, 능(綾)은 금보다 얇은 비단으로 속옷을 만들면 보들보들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단(緞)은 두꺼우니 이불 금침을 만들면 좋고, 견(絹)은 글씨에, 라(羅)는 그림 그릴 때 사용하며, 겸(縑)은 자수용이요, 사(紗)는 목도리에 딱이요, 주(紬)는 겉옷을 만들 때 씁니다요.”
비단(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아내의 얼굴은 반색 일색인데, 정생의 얼굴을 그냥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내가 그런 정생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그럼 당신은 먼저 목록 가지고 장을 보세요. 약재상하고 선반 만든 목수는 제가 만나 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 옷감 다 보고 언제 찾아갈 시간은 있겠어요?”
아내가 살짝 정생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런 걱정일랑 마시고, 당신 일이나 늦지 않게 잘하세요. 일 다 보고 약재상에서 만나요.”
아내가 정생의 등을 떠다미는 통에 정생은 어쩔 수 없이 옷감 가게에서 나오고 말았다. 말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했지만, 내심 살았다고 생각했다.
반찬거리 살 것과 서당에서 쓸 지필묵을 구하고 아내가 부탁한 그릇, 수저, 찻잔도 다 구한 뒤에 정생은 책을 펼쳐놓은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자기는 옷감 가게에 들른 아내처럼 여기서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마당쇠야, 너는 약재상에게 가 있도록 해라. 안방마님이 오시면 이리 와서 내게 알려다오.”
“알겠습니다.”
마당쇠가 장에서 산 물건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는 약재상으로 달려갔다. 정생은 책 장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 좋은 책 좀 있나?”
정생이 인사를 하자 상인이 반색을 했다.
“청나라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소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에 정생이 솔깃했다.
“무슨 소설인가?”
“『홍루몽(紅樓夢)』이라는 소설인데, 일단 손에 잡히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정생이 책을 받아 펼쳤다.
『홍루몽 도영(紅樓夢圖詠)』(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진사은은 꿈에 통령을 알고 가우촌은 뜬세상에서 가인을 사모하다. 호, 첫 회 제목부터 근사하구만.”
그러면서 몇 줄을 읽은 정생은 그만 뜨끔하고 말았다. 이런 구절이 나왔기 때문이다.
“문득 당시에 있던 여인들의 생각이 떠올라 하나하나 곰곰이 따져보니 그 행동거지나 식견이 모두 나보다 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의젓이 수염을 기른 내가 치마를 두른 그들보다도 못하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 일이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자신 역시 인정할 줄 몰랐다. 정생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우십니까? 여기 냉차 가져왔습니다. 좀 드시죠.”
책 장수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양주에는 처음 온 건가?”
“저야 조선 팔도 떠돌이 장꾼입죠. 양주라고 처음 왔겠습니까? 그때그때 파는 물건이 달라 나리가 기억을 못 하시는 거죠.”
“아, 그런가? 냉차 고맙네. 잘 마시겠네.”
정생은 속이 타던 터라 냉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속이 시원해졌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지면서 기분이 점점 더 좋아졌다. 글 속에 황금이 있다고 하더니, 그것뿐이 아니라 쾌락도 있는 모양이었다. 정생의 눈앞에서 글자들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정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폭소가 터지자 몸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서 오시게.”
정생에게 인사를 한 사람은 청나라 사람이었다. 변발을 하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사람이었다.
“저는 조선 사람 정생입니다. 실례지만 뉘신지요?”
“나는 『홍루몽』을 쓴 조설근이오.”
“선생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청나라 말을 모르지 않소?”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정생은 그런 건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선생은 『홍루몽』을 왜 쓰셨나요?”
“세상은 위선과 탐욕으로 물들어 있소. 환멸스럽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감당하고 살아가야만 하오. 남자보다 여인에게 더 가혹한 세상이라오. 이것을 고칠 수 있겠소? 우리가 어찌 삶을 살아야 세상에 올바른 도리를 다 하는 것인지 그대는 생각해본 적이 있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일개 서생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큰 경세의 도리 아닙니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요.”
“이런 꼴이라니, 무슨 꼴을 말입니까?”
조설근은 난데없이 정생의 뺨을 때렸다.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프지도 않았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정신 차리시오!”
조설근이 다시 그의 뺨을 때렸다. 정생이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아내가 정생을 흔들고 있었다. 정생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볼이 화끈거렸다.
“날 때린 것입니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울고 있어요?”
아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재상에 갔더니, 마당쇠가 있다가 당신을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안 보인다고 하더군요. 마침 약재상에 들른 사람이 술 취한 선비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고 하는데 형색이 꼭 당신 같아서 달려온 참이에요.”
정생이 펄쩍 뛰었다.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습니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옷감 장수가 말하길 요새 아편을 먹여서 정신을 잃게 한 뒤에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허풍이 센 사람이라 처음에 흘려들었죠. 이 시골 양주골에 무슨 비단을 그렇게나 많이 가져온다고, 참 나.”
정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한테 아편을 먹였다고요? 청나라에서 유행한다는 그 마약을?”
아편 연초통(출처: 한독의약박물관)
정생이 주위를 살펴보니 시장이 아니었다. 풀숲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정생은 화급하게 자기 몸을 더듬었다. 정생의 얼굴이 펴지면서 소매 속에서 종이에 싸인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래도 그 도둑놈이 이건 미처 못 빼앗아갔군요.”
“그게 뭔가요?”
“당신 물건이에요.”
“제 물건이요?”
아내가 물건을 건네받아 종이를 펼쳐보았다. 하얀 백자에 모란 넝쿨이 그려진 도자기로 만든 합이었다. 합을 열어보니 붉은 가루가 소복하게 들어있었다.
“홍분(紅粉)이네요.”
아내의 얼굴이 홍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분합(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당신도 참, 언제 이런 걸 다 사셨어요?”
정생이 몸을 일으켰다.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정생이 얼른 살펴보니, 책방에서 읽던 『홍루몽』이었다.
“그 도둑이 돈을 훔칠 줄 알았지, 책이 얼마나 귀한 건지 몰랐군요. 이 재미난 책이 생겼으니 잃은 돈은 책값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아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책이 그렇게 좋습니까?”
정생은 조설근이 꿈속에서 해줬던 말을 생각했다.
“책 속엔 우리가 어찌 살면 좋을지 알려주는 도리가 적혀 있어요. 당장 뭔가를 바꾸진 못해도 우리가 알고 행하면 언젠간 모든 것이 바뀌겠지요.”
“그렇게 멋진 말씀을 하는 걸 보니, 가끔 아편을 드셔야겠습니다.”
“뭐요?”
정생과 아내가 마주 보며 깔깔 웃었다. 돈은 잃었지만, 그래도 좋은 여름날이었다.
김령, 계암일록, 1609-10-05 ~
1609년 10월 5일, 추운 날이다.
들으니, 안창(安昶)이 종이를 팔았는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했다고 하여 논박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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