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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억울한 죽음 고하기

관아 문으로 상여가 나가고 있었다.

“아유, 불쌍해서 어쩐대.”

“이번 사또도 이틀을 못 버티고 돌아가신겨?”

“참말 큰일이네. 어쩌다 이런 일이…”

고을 백성들이 삼삼오오 몰려 혀를 찼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벌어진 참변이었다. 신임 사또가 부임해서 관아에 묵은 다음 날 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는 중이었다. 이번 사또가 오기까지는 석 달이 넘게 걸렸는데 과연 다음 사또가 오긴 할지 걱정이 될 판이었다.


〈경상감영공원 내 징청각(澄淸閣). 관찰사의 관사(官舍)로 사용된 건물이다〉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백이와 목금도 상여가 나가는 광경을 언덕 위에서 보고 있었다. 목금이 백이에게 말을 걸었다.

“관아에 귀신이 있어서 그렇다면서?”

“그럴 리가.”

백이가 코웃음을 쳤다.

“귀신을 쫓을 때 쓰는 주문이 뭔지 알아?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라고 한다고.”

“그거야 알지. 율령처럼 급히 행하라는 뜻이잖아.”

“그래, 율령이라는 게 뭐야? 관청의 법이라고. 관청의 법을 행하는 걸로 귀신도 쫓을 수 있는 법인데, 어떤 귀신이 간이 배 밖에 나와서 관청의 장을 해칠 수가 있겠어?”

“흠, 그럴까? 그럼 왜 자꾸 사또가 죽는 걸까?”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 아냐? 지난번 사또도 그렇고 이번 사또도 일흔 살이 다 되었잖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원래 일흔까지 사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야.”

목금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이상해. 한 번, 두 번은 우연이라고 해도 세 번씩이나 이런 일이 생길 리는 없지.”

백이가 씩 웃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말이야. 세 사람이 입을 맞추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야. 네 말처럼 한 번, 두 번으로는 믿지 않아도 세 번이 되면 어, 진짠가보다 그러는 거거든.”

백이가 삼인성호라는 고사성어에 대한 유래를 지루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목금은 하나도 듣지 않고 상여가 나가는 모습만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백이가 문득 눈치채고는 말을 멈췄다.

“야, 너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열심히 설명하는데…”


〈꽃상여와 꼭두〉 (출처 : 본태박물관)


“저기, 저기 좀 봐!”

목금이 한 손으로 백이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목금이 다른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상여 행렬의 끝이었다. 두 소녀가 서로를 붙들고 상여를 따라가고 있는데 걸어갈 때마다 물 자국이 남았다. 소녀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 연못이나 개천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저렇게 푹 젖어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저러지?”

“그러게. 별일이네. 한 번 가보자.”

“응?”

목금은 백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뛰듯이 내려갔다. 서둘러 상여의 뒤를 쫓는다고 했지만 두 소녀가 언덕을 다 내려왔을 때 상여는 한참 앞으로 간 상태였다.

“이거 봐! 이상해!”

백이가 상여 쪽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물 자국이 없어!”

정말 그랬다. 철철 흘리고 간 물이 벌써 다 말라버렸을 리가 없는데 물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메마른 길바닥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황토가 휘날렸다.

“빨리 따라가 보자.”

목금이 주먹을 불끈 쥐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서 물에 젖은 두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얘들아, 거기 서!”

목금의 소리에 두 소녀가 우뚝 멈춰 섰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낯빛이 창백했는데, 두 사람이 무척 닮은 것이 자매인 모양이었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소녀가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가 보여?”

목소리가 음산했다. 따뜻한 봄날이었는데도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봉사도 아닌데 당연히 보이지.”

목금은 부러 쾌활하게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두 소녀는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눈물은 시뻘건 색이었다. 두 소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지자 백이는 너무 놀라 까무러치고 말았다.

“앗, 백이야, 정신 차려!”

목금은 백이를 안아 올려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어깨와 팔을 주물렀다. 동네 사람들도 놀라서 다가왔다.

“백 진사 댁 소저 아닌가! 이를 어쩌나!”

사람들이 한 편으로는 백 진사 댁으로 사람을 보내고 물을 떠오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다행히 백이가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기씨 대체 왜 놀라신 거예요?”

백이네 하녀인 삼월이가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삼월이는 백이를 모시고 나왔다가 상여 구경에 빠져서 다른 곳에 있던 참이었다.

“저 소녀들 때문에…”

백이가 고개를 들어 상여 행렬의 뒤를 바라보았는데, 두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들이요? 어디 사는 누구랍니까? 내가 그냥 다리 몽둥이를 작신…”

삼월이가 흥분해서 말하는데 백이는 듣지도 않고 목금을 바라보았다.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안 보여.”

더는 찾아볼 것도 없었다. 백이가 아직도 몸을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에 삼월이가 백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 삼월이는 겨울 이불을 다시 꺼내와 백이를 누에고치처럼 싸놓았다.

“봄철 고뿔이 더 독한 법이에요. 절대 나오시면 안 돼요. 목금 아기씨가 잘 지키세요.”

삼월이가 목금에게 신신당부하고 방을 나갔다. 보아하니 구들에 불도 넣을 태세였다. 하지만 삼월이가 나가자마자 백이는 이불을 홱 걷어치웠다. 목금이 물었다.

“괜찮아?”

“아직도 좀 무섭긴 한데, 이불 덮어쓸 건 아니잖아. 고뿔 같은 건 아니니까. 아까 그 소녀 둘은 귀신이었겠지?”

“그런 것 같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아무 흔적도 없고. 너랑 나 말고는 본 사람도 없더라고.”

“그럼 그 자매가 사또를 죽인 걸까?”

“그럴지도…”

백이가 얼굴을 가리고 몸서리를 쳤다.

“으으, 우릴 찾아오면 어떡하지? 아까 피눈물을 죽 흘리는 걸 보니까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고.”

“귀신이 누군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겠지. 나 좀 나갔다 올게.”

“뭐? 안 돼! 나 혼자 있다가 귀신 오면 어쩌라고? 가지 마. 여기 있어.”

“불돌이 데려다 줄게. 불돌이 있으면 귀신도 못 올 거야.”

“그, 그럴까? 어디 가려고 그러는데?”

“금방 다시 올 테니까 기다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양수지조(陽燧之鳥)〉 (출처 : 동북아역사넷)


목금은 불돌이를 아궁이 밑에서 꺼내 백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양수지조(陽燧之鳥)인 불돌이는 불길을 먹고 살고 불 속에서 지내는 새로 신령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이와 목금이가 우연히 발견해서 백이네 구들 밑에서 몰래 지내고 있었다.

백이는 불돌이를 꼭 껴안고 덜덜 떨면서 목금이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목금이 돌아왔다. 빨리 뛰어오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였다.

“뭐 좀 알아냈어?”

“알아냈어!”

목금이 자리에 철퍼덕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귀신이면 죽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니까 염쟁이 장씨를 찾아갔지. 소녀 둘 염을 한 적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아하, 그렇구나. 역시 목금이가 똑똑하다니까.”

“그런데 그런 집이 없더라고. 대신 다른 걸 들었어.”

“어떤 건데?”

“우리 동네는 아니고 강 건너에 있는 갈대촌에서 생긴 일이래. 그 마을에 배 씨 성을 지닌 집이 있었는데 상처한 뒤에 재혼을 했대지. 전 부인하고 사이에 딸이 둘 있었대. 그런데 계모가 이 딸 둘을 심하게 구박했대. 그러다 갑자기 큰 딸이 연못에 빠져 죽고 둘째도 얼마 안 가 언니를 따라 그 연못에 빠져 죽었다지 뭐야.”

“계모가 죽인 건 아니고?”

“그건 잘 모르겠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억울함을 관청에 호소하려고 나타난 건지도 몰라.”

“으으, 하지만 그렇게 나타나면 심약한 사람은 놀래서 죽을 거야.”

백이의 말에 목금이 이마를 탁 쳤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연로한 사또들이 피눈물 흘리는 여자 귀신 둘을 만나니 놀래서 죽을 수밖에.”

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나도 놀래서 죽을 뻔 했다고.”

목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지?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새 사또가 부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도 사또를 맡으려 하지 않았는데, 젊은 무관이 호기롭게 나서서 부임을 자처했다고.

“목금아, 너도 들었어? 새 사또 나리가 오신다는데, 또 귀신이 죽이면 어떡하지?”

백이가 걱정이 되어 목금에게 물었다. 목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번 사또 나리는 젊은 무관이라잖아. 담대한 사람이라면 별 일 없을 거야.”

“아, 그럴까?”

“걱정되면 미리 좀 살펴볼까?”

“살펴보다니, 어떻게?”

“망허정에 올라가면 사또 나리가 부임할 때 모습을 볼 수 있어.”

“에이, 거기선 보이긴 해도 콩알만 하게 보일 텐데?”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나한텐 이게 있다고.”


〈1700년대 제작된 천리경(千里鏡)〉 (출처 : 실학박물관)


목금이 척 내민 것은 둥근 원통이었다. 고급스럽게 보였지만 백이로서는 뭔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끝이 유리로 막혀있네. 이게 뭐야?”

“이게 바로 천리경이야.”

“우와! 천리경! 저 멀리 있는 것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는 그 물건이라고?”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소녀는 이 천리경 덕분에 젊은 무관 출신 사또의 모습을 산꼭대기에 있는 망허정에서 잘 볼 수 있었다. 신임 사또는 콧날이 오뚝하고 눈이 커다란 미남이었다. 백이가 두 손을 그러쥐고 외쳤다.

“아, 안 돼. 저렇게 잘생긴 분을 돌아가실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

목금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오늘 밤 출동이다!”

“뭐? 어딜?”

“어디긴 관아지. 그 귀신 자매를 우리가 먼저 만나는 거야.”

하지만 백이는 그 말에 바로 졸도할 듯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목금이 말을 바꿨다.

“그, 그래. 내가 먼저 만날게.”

백이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목금은 그날 밤 몰래 관아로 숨어들었다. 관아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은 늘 열려 있기 때문에 거길 통해서 들어가 관아 안에 있는 작은 연못 옆에 몸을 숨겼다. 물귀신이 된 자매니까 연못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자정이 되자 정말 물속에서 허연 기운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자매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얀 소복에 풀어헤친 머리로 사또가 있는 침소로 향했다. 목금이 뛰어가 두 자매 앞을 가로막았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두 자매의 영혼이 부사를 찾아오는 내용의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을 소재로 한 영화 《장화, 홍련》〉 (출처 : 청어람)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두 자매가 또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목금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억울한 사정을 사또 나리께 호소하려는 거죠?”

언니 귀신이 대답했다.

“맞아요.”

“그럼 그런 모습으로 가면 안 돼요.”

“우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걸 알리는 모습인걸요.”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가면 사람들이 놀래서 죽는단 말이에요!”

“아…”

두 자매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목금이 주머니에서 빗과 끈을 꺼냈다.

“이리 와 봐요. 내가 잘 묶어줄 테니.”

목금이 단정히 두 사람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손수건을 꺼내 피눈물도 깨끗이 닦아냈다.

“자, 이제 사또 나리께 가보세요.”

두 자매는 목금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사또 침소로 갔다. 사또는 잠을 자지 않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금은 조금 멀리 숨어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지켜보았다.

“너희가 올 줄 알고 있었다.”

사또는 기대보다 무섭지 않게 나타난 자매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모양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근엄하게 말했다.

“배씨 집의 자매들이겠지? 너희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조사를 했느니라. 계모가 언니를 모함해 낙태한 것으로 꾸미고 연못에 빠뜨려 죽였겠다? 동생은 언니를 따라 죽었고.”

두 자매는 사또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신임 사또가 언제 이런 것을 다 준비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사또가 말했다.


<수령칠사(守令七事)가 기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에게는 일곱 가지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 이를 수령칠사라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없게 하는 것이니라. 내가 진상을 모두 알았으니 너희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다. 다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어지럽게 하지 마라.”

언니 귀신이 말했다.

“그리만 된다면 저희가 어찌 또 이렇게 나타나겠습니까? 사또 나리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자매는 사또에게 큰절을 올리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사또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거기 숨어있는 낭자, 이리 나오시오.”

하지만 목금은 꼼짝하지 않았다.

“허허, 하긴 낭자는 이승의 사람이니 야밤에 외간 남자를 만날 수 없겠구려. 아무튼 낭자가 보내 준 서한 때문에 우리 고을의 횡액을 막을 수 있었소이다. 내 깊이 감사드리오.”

사또는 벌떡 일어나 무관답게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깊이 읍을 올렸다. 목금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게 빨갛게 물들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다른 이의 공을 빼앗으려던 감사 심돈, 톡톡히 망신당하다”

김령, 계암일록, 1615-07-11 ~

전 감사 심돈(沈惇). 그는 기생에 빠져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 1615년 1월에는 동래부사 박경업(朴慶業)과 공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일찍이 박경업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역적 박치의(朴致義)라고 하였다. 이 자를 데리고, 바로 계를 올려 보내느라 영천[榮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심돈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사람과 말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그 장계를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치계(馳啓)하고, 스스로 자신의 공으로 삼아 말하기를 “신은 성상 앞에서 명을 받은 이후로 역적을 포획하는 것을 일삼아 항상 군현 내를 경계하였더니 지금 바로 동래에서 잡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박경업의 공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경업이 잡혀가게 되자 심돈이 점차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에 감사로 온 자는 거의 20여 명이 되었다. 혹자는 재간이 있으나 청렴하지 않았고, 혹자는 청렴하였으나 재주와 기량이 부족하였다. 형편없는 탐관오리가 있었으며 광포하고 패악한 자도 있었다. 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평가와 승진”

조선시대 지방관의 인사고과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려시대인 989년(성종 8) 처음 실시해 6품 이하 관리들의 인사에 반영되었고 1018년(현종 9) 연말종합평정제도인 연종도력법(年終都歷法)이 시행되었고, 1105년(예종 즉위년) 지방관 평가제도인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이 수립되었다. 또, 공민왕 때 근무일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도숙법(到宿法)이 마련되었고, 공양왕 때 근무월수를 기준으로 성적을 평정하는 개월법(箇月法)이 신설되었다.

고려시대의 고과법에서는 특히 지방관의 평정업무가 강조, 강화되었다. 그 기준은 이른바 수령5사(守令五事), 즉 농지의 개척, 호구(戶口)의 증식, 부역의 균등, 소송의 신속처리, 도둑의 단속능력 및 업적이었다. 이러한 업무는 이부(吏部)에 소속된 고공사(考功司)에서 주로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바로 고과법을 시행하였다. 수령5사에 학교의 진흥과 예속의 보급 두 종목을 추가해 수령칠사(守令七事)로 하였다. 또 새로운 공직자 윤리규범 4조, 즉 덕의(德義)·공정(公正)·청근(淸謹)·근면(勤勉)을 강조해 이들 조항의 실천여부를 점수화하였다. 그 뒤 세종·세조대를 지나면서 고과에 관한 규정들이 제정, 보완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고과와 포폄의 두 조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과는 관리들의 일반근무동향 기록제도와 같은 것으로, 이조의 고공사에서 주관해 기록·관리하였다. 포폄은 정기근무성적 평정제도와 같은 것으로, 경관(京官, 중앙의 여러 부서관리)들은 소속관아의 책임자에 의해서, 지방관들은 관찰사에 의해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포폄 역시 개별적으로 평가된 성적은 이조에 통보되어 인사에 반영되거나 참고자료로 기록, 보존되었다.

『경국대전』 고과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근무일수[仕數]와 근태상황을 엄격히 기록, 관리하였다. 이는 당상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가 날짜로 계산되는 소정의 임기를 마쳐야 전보[遷官]와 진급[加階]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하절기에는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 동절기에는 진시(辰時)에서 신시(申時)로 규정하였다. 둘째, 업무실적을 점검하였다. 특히, 형조·한성부·개성부·장례원(掌隷院) 등의 사법기관에서는 당하관들의 재판처리건수를 보고하도록 하고, 기준에 미달되는 자는 징계하였다. 셋째, 매년 말에 경관들은 이조에서 실제 근무일수와 기타 사항들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고, 지방관들은 관찰사가 수령7사(農桑·學校·詞訟·奸猾·軍政·戶口·賦役)의 실적을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넷째, 질병으로 인한 장기결근자(연간 30일 이상)·범법자(특히 왕족이나 공신)·집회불참자 및 근무성적평정에서 하등급을 받은 자, 사소한 죄로 파직된 자 등을 보고, 징계, 기록하고 일정기간에 재임용되지 않도록 하였다. 다섯째, 녹사(錄事)와 서리(書吏)의 근태상황을 점검하고 불량시에 징계하였다. 특히 서리들은 명부를 따로 비치해 관리함으로써 그들의 부정과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일기에서 보이는 오모의 승진을 위한 부임은 아마도 근무일수를 모두 채우지 못하여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수령칠사(守令七事)”

수령(守令)은 고려·조선시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이다. 군수와 현령(縣令)의 준말로도 부르며 속칭 ‘원님’이라고도 부른다. 왕이 임명하고,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의 권한을 행사했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부윤(府尹, 종2품)·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목사(牧使, 정3품)·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군수(郡守, 종4품)·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이다. 그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까지에 걸쳐 있었다. 주·부·군·현의 읍격(邑格)과 수령의 품계는 호구·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행정상으로는 모두 관찰사의 관할 밑에 있었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의 정원은 부윤 4인, 대도호부사 4인, 목사 20인, 도호부사 44인, 군수 82인, 현령 34인, 현감 141인이었다. 후기로 올수록 수령의 정원이 증가하는데, 특히 도호부사의 정원이 늘어났다.

수령에 임용되려면 문과·무과·음과 중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급수령에는 문과가 많고, 연변(沿邊) 군현에는 무과가 많으며, 중소 군현에는 음과가 절대 다수였다.

수령의 임무는 칠사(七事)가 말해 주듯이 권농(勸農)·호구 증식·군정(軍政)·교육 장려·징세 조역(徵稅調役)·소송 간평(訴訟簡平)·풍속 교정이었으며, 수령의 하부 행정 체계로서는 향리와 면리임(面里任)이 있고, 자문 및 보좌 기관으로 유향소(留鄕所, 鄕廳)가 있었다. 또한 감사와 병사(兵使)를 지낸 사람은 그 도의 수령이 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제한 규정이 있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이다.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수령오사, 즉 전야벽(田野闢 : 전지를 개척함)·호구증·부역균·사송간·도적식(盜賊息 : 도적을 그치게 함)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수령 고적(考績)의 법으로 삼았다.

양자를 비교하면 오사의 전야벽·도적식과 칠사의 농상성·간활식은 문자는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칠사는 오사에 학교흥·군정수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령오사는 조선 초기에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어오다가 태종 6년(1406) 12월의 기록에 처음 칠사가 등장하였다.

이 때 칠사를 존심인서(存心仁恕 : 마음은 仁과 恕에 둠)·행기염근(行己廉謹 : 몸소 청렴과 근신을 행함)·봉행조령(奉行條令 : 조칙과 법령을 받들어 행함)·권과농상(勸課農桑 : 농상을 권장해 맡김)·수명학교(修明學校 : 학교를 수리하고 학문 풍토를 밝게 함)·부역균평(賦役均平 : 역의 부과를 균등하고 공정하게 함)·결송명윤(決訟明允 : 소송에 대한 판결은 공명하고 진실되게 함)을 들고 있다.

이 일곱가지 중 권과농상은 ≪경국대전≫에 수록된 수령칠사의 첫째인 농상성, 수명학교는 셋째인 학교흥, 부역균평은 다섯째인 부역균, 결송명윤은 같은 여섯째인 사송간과 문자는 약간 달라도 내용은 같으므로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존심인서·행기염근·봉행조령의 세 가지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내용도 ≪경국대전≫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수령오사 중 호구증과 도적식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하다. 태종 때 이러한 칠사지목(七事之目)이 어떤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406년(태종 6) 이후에도 칠사란 말이 실록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또 태종 11년(1411) 윤12월의 기사에 보이는 칠최지목(七最之目) 중에 호구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령칠사는 고려적인 제도가 조선적인 제도로 전환하는 태종·세종대에 ≪경국대전≫의 내용과 비슷한 원형이 마련되었으리라고 보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과 똑같은 수령칠사가 실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훨씬 뒤인 성종 14년(1483) 9월의 기사이다. 즉 성종이 평택현감 변징원(卞澄源)을 인견하고 수령칠사를 물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농상성·학교흥·사송간·간활식·군정수·호구증·부역균의 일곱가지를 암송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령칠사는 태종과 세종대에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의 ≪성종실록≫에 보이는 수령칠사와 같이 간결하게 다듬어진 것은 ≪경국대전≫ 편찬 때로 보인다.

수령칠사는 그 뒤 조선 중·후기에도 그대로 지켜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737년(영조 13) 인재의 선택을 하교하면서 목민관의 역할에서 수령칠사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도 수령칠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도 지켜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권문해, 굶주린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

권문해, 초간일기,
1590-01-01 ~ 1590-02-02

1590년 1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갔다. 권문해는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도울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그리고 결국 직접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누어 구휼하기 시작했다. 대구 달성지역의 하빈(河濱)의 동면, 북면, 서면의 각 마을로 향하여 분진(分賑)하였다. 아침부터 시작된 구휼은 밤이 깊어가도록 이어졌다. 권문해는 밤이 깊어지자 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윤효언(尹孝彦)의 집을 찾았다. 다음날도 분진은 계속되었다. 하빈현의 동면과 북면 서면에 이어 남면의 구휼이 시작되었다. 남면의 사람들도 굶주린 이들이 마을의 정자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분진은 오후 1시 되어서 끝이 났다. 이어 신서촌(身西村) 성당리(聖堂里)로 향하였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구휼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1월 9일, 마지막으로 임암현(立岩縣), 내역리(內驛里), 검정리(檢丁里), 해안현(解顔縣)의 동촌리, 상향리, 서부리의 마을까지 모두 분진을 하였다.

사흘간 계속되는 분진이지만 여전히 굶주린 백성들이 이어졌다. 권문해는 한 달이 지난 2월 2일에도 읍내의 마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담배피우며 시강하다가 귀양 간 시관”

담배를 피우며 강연하는 시관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2-02-18

학례강(學禮講) 시관이 귀양을 갔다. 시강을 할 때 생도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앉아 관을 비뚤게 쓰고 담배까지 피웠으며 잡스러운 농담도 툭툭 던져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한심해하며 시관 모두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또 이런 풍조를 알면서도 감찰해내지 못한 감찰, 사관,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여러 관원들도 잡아들여 신문하며 혼을 냈다. 당연히 이들 기관의 책임자인 대사성도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성균관의 재임(齋任)과 동재(東齋)·서재(西齋)의 반수(班首) 역시 모두 그 직무를 정지시켰고, 공무를 집행한 관리들도 추고 당했다. 미리 경계하지 못하고 왕의 귀에 들어 갈까봐 쉬쉬하며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죄 때문이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알았다. 마침 생원시가 있는 날이었는데, 아마도 더욱 엄정한 분위기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벌벌 떨면서 시험을 보겠구먼! 하며 노상추는 담뱃대에 불을 붙여 일부러 비뚜름하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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