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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백성의 살림살이를 살피는 수령의 공간,
근민당(近民堂)

매주 일요일 3,000원 할인 쿠폰, 지역사랑상품권으로 결제 시 3,000원 할인
00치킨 1,000원 할인 쿠폰, 중복할인 가능

일요일, 오늘 저녁 메뉴는 치킨이다. 배달앱 중에 할인 혜택이 가장 높은 곳에서 주문을 했다. 경북 공공 배달앱 ‘먹깨비’에서 결제를 하고 치킨이 오길 기다리며 뉴스를 봤다.

“다음 달 가스와 전기 요금이 동시에 인상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내일 오후 전기 요금 관련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내달 가스·전기요금 동시 인상 (2022.06.26./YTN/유튜브) 더보기



또 오른다. 나의 최애 치킨 한 마리가 18,900원에서 20,900원으로 오르더니, 이젠 전기·가스 요금마저 인상된다고 하니, 쓴웃음이 난다. 공공요금 인상 소식에, 치킨을 먹으며 누릴 소소한 행복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1768년 2월 17일

새해가 되자 관아에서는 올해 낼 세금을 발표하였다.
노상추도 올해의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할지 셈을 해 보았다.
노상추는 올해 부과된 세금 계산을 하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세금을 무사히 낼 수 있도록 올해 농사가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쓴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의 내용이다. 노상추가 무과에 급제하기 전이니, 세금이 주는 경제적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아에서 발표한 세금 목록에 양반인 노상추도 머리 아프다고 하는데, 일반 백성들에게 세금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민본사상을 정치이념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 가혹한 세금만 있고 백성을 위한 복지 정책은 없었을까? 문득, ‘조선 지방 관청의 수령이 세금을 걷어 선정을 베푼 이야기’가 궁금하다. 우리 지역 공무원들이 지역민들의 경제를 위해서, 공공 배달앱을 만들고 재난지원금을 지원하며 지역사랑상품권을 만든 것처럼, 조선 시대에도 고을 백성들의 힘든 삶을 들여다보고 고민했을 수령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부임(赴任) : 관직 임명을 받아 근무지로 가다


1630년 11월 19일

맑고 갑자기 추웠다. 신임 현감 나무송(羅茂松)이 부임하였다.

1630년 12월 14일

예안 현감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았으며,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들을 아껴서 사대부의 풍모가 있으니, 전임 수령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굳세고 명철한 면은 부족하여 굳게 지키지를 못하였다. 또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곧바로 자신의 뜻대로 행하여 어떠한 것도 살펴보지 않으니, 이 점은 염려스럽지만 이는 그가 속이는 짓을 행하지 않는 데 말미암은 것이다.

김령(金坽, 1577~1641)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의 내용이다. 조선 시대에 지방관으로 발령이 나면, 궐내행하(闕內行下)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이것은 수령이 임명되어 지방으로 떠날 때 대전별감이나 승정원 사령들에게 돈을 주는 일을 말한다. 그러면 그 지방관은 그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수령으로 가는 사람이 자기가 발령받아 내려가는 관아에 미리 연락을 해서 궐내행하에 필요한 돈을 아전을 통해 가져오게 한다. 다시 아전은 백성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걷어 수령에게 전하는 것이다. 지방 수령으로서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백성들에게 부임세를 받고 시작하는 공무원이라니,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1장 부임육조(赴任六條)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 수령 맞이에 필요한 말의 사용료를 이미 공적으로 받았음에도 또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왕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하는 것이니, 그래서는 안 된다.

임금께 부임 인사를 드리고, 발령받은 부임지로 떠나는 수령이 ‘청심(淸心)’할 마음가짐을 가지고 온다면 그 고을 백성들은 버선발로 나가 그를 맞이할 것이다. 『계암일록』 속의 신임 현감, 나무송은 예안 관아 동헌인 ‘근민당(近民堂’)에서 예안 지역의 중요한 업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김령은 ‘며칠간 나무송의 행실과 소문을 들어보니 사람됨이 성실하고 활달하여 속이고 꾸미는 짓을 일삼지 않는 듯하였다.’라고 신임 수령에 대한 평을 했는데, 그의 기록처럼 나무송이 ‘군주의 분신(分身)으로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근민지관(近民之官)’으로서 수령칠사(守令七事)에 힘쓴 수령이었길 바란다.


신축 예안 관아의 동헌 근민당의 모습(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
동헌: 관찰사, 병사, 수사, 수령들의 정청으로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을 하던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



옛 예안 관아의 동헌 근민당 편액 (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현재 갤러리로 바뀐 근민당).



진황(賑荒) : 어려운 백성을 구하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함에 있어서 힘써야 할 일곱 가지를 말한다. 농상성(農桑盛: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목민관이라고 하면, 농상성에 힘써야 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농사는 식생활의 근본이고 양잠은 의생활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는 것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이다.’라고 했다. 이는 농사가 백성들의 기본적인 경제 수단이며, 국가 세금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상성에 힘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수령의 임무는 천재지변이나 기근 등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복지 정책이다.

1581년 9월 29일

고을 수령 이준종이 재해로 입은 피해 때문에 파직이 되어 식구들을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성재일기(惺齋日記)』 속 내용이다. 자연재해는 수령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재해가 지나간 후에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안정시켜 주어야 목민의 어진 정사라 할 수 있다. 수령이 구휼에 힘쓰지 않아 굶주리는 백성이 많다면, 그 수령의 인사 평가 점수는 낮을 수밖에 없다. 백성의 입에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제공하지 않는 수령은 파직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1670년, 이규령이 안동 부사로 있을 때 큰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이규령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식구 수를 계산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간혹 식구 수를 더 늘려 속이는 자들이 있었다. 곡식을 더 타 먹기 위함이었다. 아전들은 이 사실을 알고, 그런 자들에게는 곡식을 나눠주지 말아야 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이규령은 아전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주림을 당하여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부모와 처자를 사랑하여 죽음에서 구하려는 계책을 쓰는데, 어찌 차마 모두 거짓이 있다 해서 그들을 구휼하지 않겠는가!”
이규령의 이러한 어진 마음 덕분에 살아난 백성들의 숫자가 수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안동부사로서 기민 구휼에 적극 힘쓴 이규령의 공이 인정받아 옷감을 상으로 받았다.

이규령(李奎齡, 1625~1694)은 대사헌, 공조 참판,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 관인이다. 수령이 구휼을 할 때에는 나름의 기준을 갖고 집행한다. 지금의 복지 정책 중에도 가구원 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것과 같이 이규령이 곡식을 나누어 줄 때 가구원 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가구원 수를 늘려 부정 수급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규령은 그들의 딱한 사정에 마음을 쏟는다. 구휼에 힘쓴 수령, 백성들을 감동시킨 수령은 승진과 상이 기다리고 있다.


신축 예안 관아의 선성현아문의 모습(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
아문: 지방관이 문루 위에 올라 백성들의 생활 실태와 경제 상황 등을 직접 점검했던 곳.



옛 예안 관아의 선성현아문 편액
(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글씨: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1519~1592))


1732년 1월 22일

요즘 천연두가 크게 번지고 전염병이 또 일어나 흉년에 병들고 굶주려 죽는 사람이 자못 많다. 본현에서 이번 달 7일부터 비로소 진휼을 실시하는데 결복(結卜)이 없는 자들은 그냥 지급하고, 파·속·복(把束卜)이 있는 자들은 더 추가할 수 없으며, 60복(卜) 이하인 자는 유토(有土)의 환곡을 받고, 60복 이상인 자는 거론하지 않아서 민간에 혹 원성이 있기도 하였다. 이때가 되어서야 식량 대신 칡을 찧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니 백성의 곤궁함을 상상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학자 구상덕(仇相德, 1706~1761)의 일기 『승총명록(勝聰明錄)』의 내용이다. 재산의 규모 정도에 따라 차등 지급하고 있는 조선의 복지 정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행정 서비스가 가능한 이유는 지방 수령이 백성들의 인구와 토지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고 꼼꼼히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데이터가 복지만을 위한 조사 보고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세나 균역 등 세금을 더 잘 거두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세금을 걷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일정부분 사용했다는 것이다.

1732년 4월 12일

금년 봄은 흉년이 매우 심한 데다 전염병까지 겹쳐서 사망자가 잇따라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도 필시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었으며, 그 다음 집안은 간혹 끼니를 거르는 때가 있으니, 칡뿌리가 없었다면 가난한 백성은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이다. 고을 사또의 새로운 정사에 대해 혹 잘했네, 못했네 하는 기롱이 있기도 하지만 중간에는 자못 선정을 베풀었다는 칭송이 많았다. 진휼을 베풀던 날이 되어 백성들 가운데 더러 원통함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끝에는 타당하게 처리했으니 그런대로 잘 다스린 관리라고 할만하다. 처음에는 얼굴에 누렇게 뜬 기색이 있는 자를 골라서 진소(賑所)에 보냈고, 지금은 또 유토(有土) 중에서 굶주림이 심한 사람을 가려내서 진소에 보내 부지런히 구활(救活)하도록 하였다. 본읍의 백성 중에 굶주려 죽은 자가 다른 읍에 비해 적었던 것은 우리 사또의 은혜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300년 전, 구상덕이 살았던 조선 시대 모습이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로 계속 진화 중인 코로나19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가 급등까지 갈수록 팍팍해지는 지금의 우리 삶과 많이 닮아있다. 구휼 사업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집행한 지방관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수령이 구휼에 힘쓴다면 백성들 역시 위기 극복의 내적인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해관(解官) : 관직에서 물러나다.


1752년 2월 22일

영해(寧海)는 온갖 폐단이 집중되어 있어 오랫동안 파국을 이루었던 고을이었다. 토호들이 웅거하여 무력으로 제멋대로 하는 것이 습속이 되었고, 여러 해 흉년이 거듭된 데다가 자주 부사(府使)를 교체하여 관가의 업무와 백성의 일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다가 부사 류작(柳綽)이 도임한 이후 임의대로 쇄신하여 예리한 뜻으로 정치를 하니, 토호들은 다리를 떨고 간악한 아전들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한 환곡(還穀)을 모두 징수하였고 전정(田政)의 허위를 모두 다스려 고쳤으며, 기타 봉산(封山) 벌채(伐採) 금지와 군적(軍籍) 누락의 보전(補塡)을 극도로 엄밀하게 하였으며, 어민세의 납부와 부역의 면제 또한 고르게 하니, 육지와 바다의 백성들이 모두 안도하여 거의 소생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

조재호(趙載浩, 1702~1762)의 『영영일기(嶺營日記)』의 내용이다. 목민관으로서 힘써 일한 결과 류작은 정3품에 해당하는 길주 목사(吉州牧師)로 제수되었다. 영해 부사 류작은 목민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기근이 심한 북녘 고을에 승진 임명된 것이다. 승진해서 가는 곳이 만만찮은 곳이지만 류작이라면 그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편에서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지 않을까?

한 고을의 수령직은 평생직이 아니다. 반드시 교체되기 마련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벼슬살이는 머슴살이’라고 하며, 현명한 수령이란 ‘관아를 여관으로 여겨 이른 아침에 떠나갈 듯이 늘 문서와 장부를 깨끗이 해두고, 항상 행장을 꾸려 놓아 마치 가을 새매가 가지에 앉아 있다 훌쩍 날아갈 듯이 하고, 한 점의 속된 애착도 마음에 품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축 예안 관아의 장부당 모습(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
인리청(人吏廳): 관아에서 일하는 아전들이 근무하던 건물.



옛 예안 관아의 장부당(掌簿堂) 편액
(장소: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 현재 커피숍으로 바뀐 장부당)



늘 함께하는 목민관(牧民官)이 되다


지역 소상공인을 돕기 위한 지역사랑상품권은 할인 혜택이 커서 소비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 할인된 금액으로 상품권을 구매할 수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6% 할인된 금액으로 살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화폐 할인율을 낮추거나 할인 판매를 중단하고 있다. 국비 지원이 줄어 지자체의 지원금 부담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공 배달앱에서 주문할 때 지역사랑상품권으로 결제를 하면 추가 3,000원 할인 혜택을 줘서 좋았는데, 이젠 그것도 없어질지 모른다.


쏠쏠했던 지역화폐 혜택, 왜 줄어들지? (2022.07.14./MBC/유튜브)더보기



‘세상에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 뿐’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듯 세금도 피할 수 없다. 기꺼운 마음으로 낸 세금,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을 밝혀줬으면 좋겠다. 오늘의 우리 지역 수령이 선거철에만 ‘국민 가까이’에 있지 말고, 늘 ‘국민 가까이’에 있으면서 우리의 살림살이를 살피고 고민을 했으면 한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
   노상추의 『노상추일기』, 조재호의 『영영일기』
2. 박영규, 『조선 관청 기행』, 김영사, 2018.
3. 박영서,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들녘, 2022.
4. 정약용, 다산연구회 편역, 『정선 목민심서』, 창비, 2018.
5. 정약용, 미리내공방 편저, 『누구나 한번 쯤 읽어야 할 목민심서』,
   정민미디어, 2020.
6. 구상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역, 『국역 승총명록1』, 경상남도 고성군청
7. 금난수, 신상목·장재석·조천래 역, 『국역 성재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9.
8. 김령, 신상목·장재석 역, 『국역 계암일록 4』, 한국국학진흥원, 2013.
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종이를 내다 판 선비, 비루하다는 비난을 사다”

김령, 계암일록, 1609-10-05 ~

1609년 10월 5일, 추운 날이다.

들으니, 안창(安昶)이 종이를 팔았는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했다고 하여 논박 당했다고 한다.

“값을 무명 20필로 깎아주시오! - 지팡이 짚고 오가며 밭을 사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2-01-17 ~ 1612-01-30

1612년 1월 17일, 택룡은 아들 대생과 함께 가동(檟洞)에 갔다. 반유실(潘有實)이 밭을 판다고 하기에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가동의 노비 천실(千實)의 집에서 만나기로 해 그 곳으로 갔는데, 천실은 외출하고 없었고 반유실도 오지 않았다. 택룡은 늙은이를 진흙밭에 불러놓고 일부러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택룡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 뒤, 반유실이 가동의 밭을 팔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밭 면적은 한 섬지기[일석락(一石落)]정도였는데, 반유실이 부른 가격은 무명 50여 필이었다. 택룡은 무명 50여 필을 소 2마리, 옷 2벌, 무명 20여 필로 대체 환산해 지급하고 샀다. 매매문서를 만들고 공증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작성하게 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30일 날, 반유실과 임수공(林守工)이 밭을 거래하는 문서 일 때문에 택룡의 집에 찾아왔다.

“당백전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다”

상평통보당백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박한광(朴漢光), 박득녕(朴得寧), 박주대(朴周大), 박면진(朴冕鎭), 박희수(朴熙洙), 박영래(朴榮來), 저상일월, 미상

1866년 11월, 장령 최익현이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진사 정학교가 역시 운현궁에 나아가 대원군에게 당백전의 폐단을 극언하였다고 한다. 이 당백전의 발행으로 서울의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정부에서는 10월부터 당백전을 폐지하고 엽전 사용을 허락하였으며, 호적의 인구 수대로 당백전을 환수하게 되자 물가가 조금씩 떨어지고 시장에 물건이 다시 풍성해졌다.

이 당백전이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올 초부터였다. 경복궁을 재건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에서 발행한 것인데, 당백전이 등장하자마자 장안의 쌀값이 너무 뛰어올라 성균관의 밥 한상 값이 몇 배나 뛰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한 냥 이상의 거액은 반드시 당백전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한 냥 이하에 한해서만 엽전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리고 이 분부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먼저 참하고 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백전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지방관서에 더욱 엄하게 사용 명령을 전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이 몸소 시장을 돌아보고 흥정하는 현장을 살피는 등 당백전 사용 독려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당백전 통용 이전에 소값은 30-40전이었는데, 당백전 이후에는 60-70전에 이르고 이후에는 수백전으로 폭등하여 시장에서는 소가 팔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또 소금장수들도 시장에 들어서기를 꺼려 하여 올해는 당최 소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제일 문제는 쌀이었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쌀값이 폭등한데다, 장사치들은 당백전 사용을 꺼려 하여 시장에 나오지 않아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방관리들이 직접 시전을 돌아다니면서 당백전 사용을 독촉할 뿐 아니라 부민들을 편달하여 쌀을 시장에 내다 팔도록 독촉하고, 심지어는 집집마다 창고를 뒤져서 적발하기에 이르렀다. 창고 열기를 꺼려 하는 집에서는 창고 문을 부수어 쌀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리곤 쌀 1두에 당백전 1푼으로 값을 정해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건값을 나라에서 정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이 모두 죽어나가게 생긴 판이었다. 이러자 대원군도 할 수 없었는지 정학교의 상소를 받아들여 당백전뿐만 아니라 엽전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한숨을 쉬며 살 방도가 생겨났다고 기뻐하였다. 무릇 나라의 궁실이 높을수록 백성의 삶이 힘든 법인데, 궁궐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의 삶을 이토록 피폐하게 해 놓았으니, 과연 대원군의 정치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사당 공사 석 달, 목수의 품삯 22냥”

미상, 분강서원창원일기,
1699-08-30 ~ 1700-03-30

사당 공사를 시작한 것이 1699년 8월 30일이었고, 사당 공사를 마친 것이 이듬해 3월 30일이다. 겨울에 공사를 중단한 4개월 동안을 제외시키면 대략 3개월만에 사당 공사가 끝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당 공사를 맡았던 목수는 품삯 22냥을 받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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