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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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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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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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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F.A. 매켄지
주제 : 불친절한 마을 사람들
시기 : ( 미상 )
장소 : 강원도 원주시
일기분류 : 의병일기
인물 : F.A. 매켄지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1907년 8월 제천과 충주에서의 일본군의 움직임
독립운동사 자료집 3집에 실린 《조선 폭도 토벌지》는 1913년 3월에 발간된 일제의 의병 진압 기록인데, 이 자료는 일본군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이고, 보고를 목적으로 작성된 자료라서 자신들에 대한 전적은 과장하거나 의병들에 대한 사실은 축소시키는 등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과 일본군의 이동과 작전 등을 파악하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매켄지가 찾아 간 이천, 충주, 제천 등지에서 벌어진 의병과 일본군들의 전투와 이동 등에 대해 조선폭도토벌지에 쓰인 1907년 8월 한 달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07년 8월 6일 원주진위대의 봉기 소식을 보고받은 군 사령관은 서울의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하야시(林)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보병 2중대, 기관총 4, 공병 1소대로 된 1지대를 편성하여 원주 부근의 진압을 일임하였다. 지대는 7일 서울을 떠나 이수두(二水頭), 지평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했다. 원주에 도착해 지형을 살피다보니 의병들이 마을 주민들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그 후 원주를 포함한 인근마을을 소탕하였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12일 약 2백여 명의 의병이 여주에 나타나 경무분경소를 포위하고 일본군경의 가족들을 처단하였고, 마을 주민들도 의병에 가담하여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는데 그 수가 1천여 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러한 정보들이 원주지대장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정도로 의병들과 주민들의 활동은 용의주도하였다. 1907년 8월 15일 스에야스(末安)중위가 인솔하는 1소대는 제천방면으로 향해 한국의병 약 3백 50명과 4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는데, 그날 밤 의병들에게 포위되자 총탄이 다 떨어지도록 교전하다가 결국 충주로 퇴각했다고 한다. 16일 일본군 충주수비대에서 파견한 전선(電線)검사의 호위병 임모(林某) 이하 6명은 장호원에서 의병들과 마주치자 총을 쏘며 겨우 빠져나갔으나 그 과정에서 인부 2명이 사망하였다. 충주는 니노미야(二宮)소위가 인솔하는 1소대가 수비하고 있었으나 그 인근 지역의 의병들의 세가 강하여 오카자키(岡崎) 제 13사단장은 서울에 있던 보병 제51연대에서 노택(蘆澤)대위가 인솔하는 1소대를 증파하였다. 이 부대는 16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충주로 향하는 도중인 18일 오후 장호원에서 약 1백 50여 명의 의병과 만나 전투를 벌여 의병들을 궤란시키고, 19일 충주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전선(電線)검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파견한 공병 1분대는 19일 이천 동남 약 8km 지점에서 의병들의 습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격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원주와 충주 부근의 의병들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 영향력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 있는 스모바야시(下林)지대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여 군사령관은 장기적으로 보아 의병들에 대해 맹렬하게 응징적 토벌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병 제51연대 부족(附足)중좌에게 동 연대 제2대대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공병 1소대를 추가로 파견하였고, 그 후 충주를 거쳐 청풍, 제천, 영월, 평창 부근의 의병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지대장은 충주 도착 후부터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스모바야시지대를 지휘하도록 하며 필요한 경우엔 강릉파견대까지도 지휘하게 했다. 18일 오전 11시, 족달(足達)지대는 조치원에 하차하여 청주로 향했다. 청주 이북 음성과 괴산 부근에 의병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지대는 주력으로 음성을 1중대로써 괴산을 거쳐 의병을 피해 21일 밤 충주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군들은 양민으로 분장하고 산곡에 은신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20일 보병 제50연대의 하사 7명은 서울을 떠나 장호원 동남방 약 4km지점 마을에서 약 3백여 명의 의병에게 포위되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와 충주에 도착했다. 21일 군사령관은 이천, 장호원, 여주방면 의병 진압을 위해 다시 재 대전 보병 제14연대 제3대대장 후와(不破)소좌에게 제9중대 고야나기(小柳)대위 및 수원지역을 수비하고 있는 제3중대 노무라(野村)대위를 배속시켜 그 지역으로 파견하고, 또 동시에 서울의 보병 제51연대 제9중대를 양근과 이천방면으로 파견, 불파 토벌대와 협력을 도모하게 했다. 족달지대는 우선 제천과 영월에 있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2종대(縱隊)가 되어 22일 오후 3시 충주에서 떠나 그 주력은 청푼을 거쳐 제천으로,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는 주포를 거쳐 제천으로 향하게 했다. 또 1소대를 장호원방향으로 파견하여 대전에서 나오는 불파토벌대와 협력하게 했다. 족달지대의 주력은 의병과 마주치지 않고 22일 청풍에, 23일 오전 6시에는 제천에 도착했다. 주포와 제천을 향하던 제2중대는 박달령 부근에서 약 1백명의 의병과 만나 이를 진압하고 전진하여 23일 오전 5시에 제천에 도착했는데, 마을에 거처하며 저항하는 소수의 의병들을 공격하여 30명을 사살하고 본대에 합류했다. 그 후 제천은 의병들의 근거지로서 전 마을이 의병의 편을 들어 그 북방고지에는 뿔뿔이 흩어진 의병들의 참호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대장은 의병들이 제천에서 도움을 받는 것을 방지하고, 의병들과 협력하는 마을사람들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천마을 대부분을 소각하는 작전을 펼쳤다. 8월 15일 스에야스(末安)중위가 인솔하는 1소대를 곤경에 빠트렸던 제천의 의병들은 그 이후 병력이 증가하여 6백여 명에 이르렀고, 일본군으로부터 충주를 탈환하여 지켜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22일 오전 9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들은 두 무리로 나누어 하나는 제천과 청풍가도를, 주력은 제천과 주포가도를 통해 충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같은 날 의병 2백여 명이 강릉에서 출발하여 충주를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그러나 일본군들이 청주로 향하는 도중에 의병과 마주친 일이 거의 없어서 의병들의 경계가 매우 교묘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의병대는 민긍호 의병장의 부하들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충주에 주둔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충주와 청풍가도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의병들을 도운 여주마을을 다시 소각하였다. 강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 불파토벌대의 소류중대는 죽산과 음죽을 거쳐 장호원으로 향했고, 능촌중대는 양지와 이천을 거쳐 26일 장호원에 도착하는 동안 지나치는 마을에서 모두 의병소탕을 벌였다. 장호원에서 합류한 소류중대와 능촌중대는 여주, 지평, 이호, 이천을 소탕하고, 30일엔 이천 서방의 설봉산 부근에서 대한제국군 시위 제1연대 중대장 허준이 인솔하는 의병 약 1백여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의병들이 흩어지게 했다. 31일엔 토벌대의 편성을 풀고 각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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