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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에서 모내기를 ‘정(井)’자로 하도록 지시하다
1926년 5월 8일. 이날 남붕이 사는 원구리 마을에서는 모내기가 처음 시작되었는데, 또 군청과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왔다. 새로운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는지 감독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청에서는 몇 해 전부터 모내기할 때는 ‘정(井)’ 자로 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이를 잘 따르지 않자 이제 관원까지 내보내 이를 강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무작정 말을 안 듣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에 관에서 시키는 대로 ‘정’자로 모내기를 해봤으나 소출이 오히려 줄어들어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런데 올해 또 관청에서 사람을 보내 억지로 시키니 이를 따를 수 없었던 동네의 노인과 젊은이들이 직접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담당자를 만나 소출이 감소되어 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돌아와서 오후에 다시 모내기하였는데, ‘정’ 자로 심는 새로운 법을 따르지 않고 전날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였다고 한다.
1926년 5월 11일 이날은 남붕도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먼저 아침 일찍 옥금(玉今)으로 가서 소작인과 일꾼들에게 논 5두락에 모내기를 시작하게 했다. 그런데 봇물이 오지 않아 일손을 멈추고 나머지 일을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7두락에도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이번 모내기에 예전과 달리 이렇게 많은 일꾼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해서였다. 엊그제 마을 사람들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온 후로 예전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자 면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 아직 모내기하지 않은 집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반드시 ‘정’자로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성화를 하고 다녔다. 남붕 또한 면사무소 사람의 방문을 받고 마지못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결국,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은 전보다 더 들었고, 앞으로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될 것이 분명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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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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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해주일록(海洲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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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붕(南鵬)
주제 : 모내기
시기 : 1926-05-08 ~ 1926-05-1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영덕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남붕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1920년대 일제의 산미증식정책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자국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를 공급받기 위해 생산성 증대를 농업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1912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쌀 생산과 면화 생산 그리고 양잠(養蠶)과 목축업의 개량과 증산에 대한 중대 훈시(訓示)를 발표하면서 구체적인 농업 정책을 내놓았는데 쌀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일본은 자국의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되는 저임금 기반을 위해서 조선의 쌀이 무엇보다 필요하였기 때문에 농업 정책의 중심은 쌀이었다. 쌀 생산의 증대를 위해 조선 총독부는 품종 개량, 비료, 개관 사업 등을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인 쌀의 품종과 재배법을 개량한다는 핑계로 일본의 품종과 일본 농법의 보급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강제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일본은 조선 농업을 개량하기 위해 ‘한국 토지 농산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여 1906년 4월 권업모범장 관제(勸業模範場官制)를 발포하고, 6월에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다. 통감부의 목적은 일본의 농업 방법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행해 보고 그것을 보급하여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쌀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 개량 품종의 보급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조선 총독부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의 개량과 투입을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쌀 폭동으로 인해 더 많은 조선 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되자 1920년대에는 개량종 보급이나 비료 투입보다는 대규모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수전 농법을 보급하는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재배법에 대해서도 강제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남붕이 사는 원구리에서도 관청의 감독과 감시를 받으며 모내기를 한 것이다.
◆ 원문 번역
1926년 5월 8일 정축 날이 맑았다. 새벽에 이전과 같이 하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에 문안드리고 사당을 참배하였다. 『중용혹문』을 조금 외웠다. 아이 1명에게 수업하였다. 아침 뒤에 아우 집으로 갔으니, 정 사형이 마을에 머무르고 있어 어른들이 와서 모였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정 사형이 떠나갔다. 이날 동네에 모내기가 처음 시작되었는데, 군청과 면사무소에서 사람을 보내 ‘정井’ 자로 모내기를 하도록 시켰다. 대개 작년에 이와 같이 하였으나 소출이 줄어들었으므로 동네의 노인과 젊은이들이 면사무소에 가서 담당자를 만나 소출이 감소되어 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오후에 드디어 ‘정井’ 자로 심는 새로운 법을 따르지 않고 전날 방식으로 모내기를 하였다고 한다. 밤에 외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9일 무인 날이 맑았다. 새벽에 이전과 같이 하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에 문안드리고 사당을 참배하였다. 『중용혹문』 끝 장을 외웠다. 대개 지난달 21일 새벽부터 『중용혹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는데, 의심스럽고 막히는 곳이 많았으므로 혹은 몇 번 익혔다. 그러나 근래에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 외우고 익히는 공부가 전일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거의 2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 외웠다. 공부가 엉성한 것이 이러하니 어떻게 진보할 수 있겠는가. 매우 두려워할 만하다. 아침 뒤에 익동翊洞 김상락金相洛의 상가에 가서 조문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또 묘곡畝谷으로 가서 만향계晚香契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11일에 모내기를 하려고 묘곡의 소작인 이명복李命卜과 윤광현尹光賢 두 집에 일꾼과 소를 부탁하였다. 저녁에 또 『중용혹문』을 외웠으니, 대개 두 가지 책을 연이어 외우려 하였기 때문이다. 밤에 『중용혹문』을 ‘유이용기력야[有以用其力也]’까지 외웠다. 1926년 5월 11일 경진 날이 맑았다. 새벽에 이전과 같이 하였다.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에 문안드리고 사당을 참배하였다. 『중용혹문』을 ‘지심재之甚哉’까지 외웠다. 아침 뒤에 옥금玉今의 논 5두락에 모내기를 하였는데, 봇물이 오지 않았으므로 뒤로 미루었다. 봉후峰後, 유전田畓, 강단江端의 논 도합 7두락에 모내기를 하였는데, 일꾼 20여 명을 썼다. 대개 면사무소 사람이 채근하는 바람에 한 줄씩 모를 심었으므로 일꾼이 전보다 더 들었다. 곡식 소출도 이익이 없고 감소되었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영봉의 편지를 다 쓰고 이어서 정본을 베껴 「성심록惺心錄」 1책과 합해 봉하였다. 『중용혹문』을 ‘가문이시문야可紊耳是文也’까지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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