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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는 선비에게도 농사를 돌보는 것은 집안의 급무이다
1932년 10월 10일. 남붕은 아침에 아이 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후 머슴들을 시켜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내일 보리 파종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남붕은 새벽 일과를 마치고,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친 후 올해 시전에 관해 논의하는 문제로 종파에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아침에 다소 분주했다. 그리고 백일동 어머님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오후에야 미려의 논에 나가볼 수 있었다.
머슴과 일꾼들이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들기 위해 땅을 다듬은 후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몇 명 안 되어 겨우 일을 마치기도 했지만, 남붕이 가기 전까지 해놓은 일이 온전하지 않아 일이 늦기도 했다. 남붕이 보아하니 새로 흙을 갈아엎어 놓긴 하였으나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이 상태로는 보리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남붕은 결국 머슴과 일꾼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하게 했다.
남붕은 만약 자신이 이때 나가 보지 않고 거친 땅에 이미 파종을 한 다음에 나갔거나, 머슴에게 맡겨놓고 나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심하게 후회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남붕은 이제 겨우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감독했는데 일이 이와 같았다.
다음날에도 파종하는 일로 소란스러워 남붕은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만 고수하면서 전혀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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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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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해주일록(海洲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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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붕(南鵬)
주제 : 보리 파종
시기 : 1932-10-10 ~ 1932-10-13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영덕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남붕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보리 파종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인 보리는 벼과에 속하는 곡류로 다른 곡류에 비해 다양한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곡(五穀 : 쌀, 보리, 조, 콩, 기장) 중 하나이며 쌀 다음가는 주식(主食) 곡물이다. 보리로는 보리밥, 보리죽, 보리수제비, 보리수단, 보리감주, 보리막걸리, 보리차, 보리누룩, 보리고추장 등을 만들 수 있으며, 맥주의 원료 등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주산지는 전라도와 경상도이다. 보리재배에 관한 기록으로는 중국 은(殷)나라 때 갑골문자에서 보리에 해당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보리가 오곡 중의 하나로 설정된 것이 BC 2700년경의 신농시대(神農時代)라는 점에서 고찰한다면, 그 재배 역사가 매우 오래됨을 알 수 있다. 한국에는 고대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일설에는 4∼5세기경에 보리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보리농사에 있어 우량 종자확보는 보리 재배의 시작이다. 우량종자는 발아율이 높고, 병충해의 피해가 없고, 등숙이 잘되고 균일하고, 유전적으로 순수한 것이다. 토양은 부드럽게 만들어야 토양 사이의 공극이 많아 토양공기를 잘 공급할 수 있다. 파종은 균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리파종을 하는 시기는 그 지역의 적기를 준수하여 월동 전에 잎이 5~6개 나올 수 있게 파종하는 것이 그 지역의 알맞은 파종 적기이다. 남붕이 보리파종을 한 날은 양력으로 1932년 11월 8일이었다.
◆ 원문 번역
1932년 10월 9일 신미.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주자서절요』를 「여조수서」부터 「여유승상서」의 별지까지 외웠다. 그리고 『대학』을 서문부터 격치장格致章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동튼 뒤에 『대학』을 성의장誠意章부터 편말까지 외웠다. 아침에 궤연에 배알하고 이어서 백일동에 가서 선고의 묘 및 선비의 묘에 시사時事를 행하였다. 대개 이미 선고와 선비를 합장했으나 선비는 돌아가신 지 삼년 이내이므로 묘사를 각각 행하였다. 대개 올해 농사가 큰 흉작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한두 번의 의논으로 갑자기 니전泥田의 선영에 과일로 제사를 지낼 것을 정했다. 그래서 도동道洞·화전花田 등 여러 곳의 선영에도 그에 따라 과일로 제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토점土店·장등長嶝에 은전殷奠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이나 이미 준비한 제사를 또한 중지할 수 없으므로 전처럼 은전으로 제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대수가 가까운 부모의 산소와 가문에서 제수를 마련하는 여러 곳은 의당 과일로 제사를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백일동의 부모 묘소에도 과일로 제사를 행했으나 서너 가지 제수로 조촐하게 지내니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 같다. 산지기의 집에서 음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등에 이르러 손자아이로 하여금 대신 회전을 행하게 하고, 부모님 산소에는 내가 스스로 제사를 행하였다. 음복을 한 뒤에 헤어져 돌아왔다. 잠시 잡다한 일이 있었다. 오늘 이른 아침에도 계속 자석환磁石丸을 복용하고, 오후에도 복용했는데, 한 번 복용할 때마다 50개씩을 술과 함께 삼켰다. 저녁에 『대학혹문』을 외우기 시작하여 편수부터 ‘무유한의無遺恨矣’까지 외웠다. 밤에 『대학혹문』을 ‘대저대학일편大抵大學一篇’부터 ‘기희의幾希矣’까지 외웠다. 10월 10일 임신. 맑고 서늘함. 입동立冬이다.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주자서절요』를 전과 같이 외웠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일장이하一章以下’부터 ‘약유서의略有序矣’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동튼 뒤에, 『대학혹문』을 ‘반지유명盤之有銘’부터 ‘탈연유오처脫然有悟處’까지 외웠다.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똥거름과 재거름 위에 미려에 심을 보리 종자를 쌓아 놓았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궤연을 모셨다. 잡다한 일이 있었다. 오후에 방바닥에 장판을 발랐다. 밤에 암송을 하지 않았다. 10월 11일 계유. 맑음. 추위가 심한데 겨울 기후가 이른 때문이 아니겠는가.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주자서절요』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우왈자일신지중又曰自一身之中’부터 정심장正心章 끝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동튼 뒤에, 『대학혹문』을 ‘팔장지설八章之說’부터 ‘시역차편선후본말지의야是亦此篇先後本末之意也’까지 외웠다. 아침에 궤연에 배알하고,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어제 도동에 가는 인편을 통해 종파 내에서 화전花田에 성묘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년 묘사에 과일로 제사를 지내자는 의논이 종파의 몇 사람에게서 나왔으나 우리 계파는 전혀 들어 알지 못했으므로 도동의 선영 이하 부모의 선영에는 모두 은전을 올리기로 정했는데, 니전泥田의 회전會奠에 임시로 과일로 제사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미 조두를 올린 토점과 장등은 은전으로 제사를 행했으나 화전花田의 저심底心 및 도동의 회전은 모두 어쩔 수 없이 술과 과일로 제사를 지내니, 일마다 구애되어 극히 미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종파의 사람들 중에 노성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다른 종파가 니전泥田의 회전에 과일로 제사지내는 것을 멋대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번 종파의 사람들에게 따지지 않을 수 없으나 선영의 시사를 지내기 전에 만약 다투어 따진다면 제사에 미안함이 있을까 걱정되므로 최후 회전의 제사를 마치고 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자리에서 한마디 말을 하여 드러내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종파의 노소가 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자리 참석하지 않으려 하는데, 우리 종파의 사람들이 과연 믿고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소에 가서 곡했는데,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서 가는 길에 꽤 고생했다. 돌아올 때는 바람이 조금 진정되었고, 돌아와서 궤연을 모셨다. 오늘 미려의 논에 보리를 파종했는데, 일꾼이 심히 적어서 겨우 종자를 낼 수 있었다. 오후에 미려에 나가서 논을 손질하여 보리 파종할 땅으로 만드는 것을 살펴보았다. 새로 흙을 갈아엎어 주먹만 한 흙덩이가 바둑알처럼 어지럽고 별처럼 깔려서 종자를 넣을 수 없었다. 결국 머슴에게 다시 써레질로 곱게 부시게 하고 그런 뒤에 보리를 파종할 것을 명하였다. 만약 이때에 나가 보지 않고 머슴에게 맡겼다면 보리농사는 허사가 되어 후회막급이 되었을 것이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는데, 겨우 이때 한 번 나가서 보리농사를 도운 것이 이와 같았다. 독서하는 선비도 책상 아래를 고수하며 전연 농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밤에 『대학혹문』을 평천하장平天下章의 ‘자신이가自身而家’부터 편말까지 외웠다. 밤에 동생이 도동의 회전에서 와서, 선영에는 과일로 제사를 지내기로 한 일을 대략 전하였다. 10월 12일 갑술.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주자서절요』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재차 편수부터 ‘유한의遺恨矣’까지 외웠다. 닭이 처음 운 뒤에, 잠시 눈을 붙였다. 창이 밝은 뒤에, 『대학혹문』을 ‘대저대학大抵大學’부터 ‘약유서의略有序矣’까지 외웠다.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궤연을 모셨다. 오후에 호의浩義 족제가 와서 문장의 형식에 대해 묻기에, 내가 올겨울에 『중용』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 잠시 뒤에 손자아이가 화전花田에서 내려와서 말하기를, 간화전間花田 선영에 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자리에서 “선영에 과일로 제사를 올리자는 의논이 어디에서 나왔기에 올해처럼 평년작인 해에 선조 봉양을 조촐하게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대답을 미루다가 종제인 양숙이 또한 그 까닭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대저 이 양숙 군은 매양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심히 민망하다. 내가 역시 손자아이에게 올겨울에 『대학』을 읽을 것을 명했는데, 그들이 과연 듣고 믿을지 모르겠다. 밤에 『대학혹문』을 ‘반지유명盤之有銘’부터 ‘일신지중이지만물지리一身之中以至萬物之理’까지 외웠다. 10월 13일 을해.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주자서절요』를 전과 같이 외웠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우왈궁리자又曰竆理者’부터 ‘불가불찰야不可不察也’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동튼 뒤에, 『대학혹문』을 ‘육장지지六章之旨’부터 마지막 장까지 외웠다. 아침에 궤연에 배알하고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동생이 와서 의논하길, 금번 선영에 과일로 제사를 올린 잘못은 희원熙遠이 간화전에 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자리에서 이미 분명하게 말했으니, 이후에 다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뜻을 말했는데, 나도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궤연을 모셨다. 오늘 잇따라 농가의 파종하는 소란스러움이 있어서 종일토록 공부를 접었다. 대개 농사에 힘쓰는 한 가지 절차는 집안의 급무이고, 배우는 자가 세상은 알지 못하면서 오래도록 책만 보는 것은 집안을 보전하는 양책이 아니다. 밤에 피곤하여 암송을 하지 않았다. 10월 16일 무인.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주자서절요』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차인현조지시此引玄鳥之詩’부터 격치장格致章의 ‘난지재亂之哉’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동튼 뒤에, 『대학혹문』을 ‘자정자이격물위궁리自程子以格物爲竆理’부터 마지막 장까지 외웠다. 아침에 궤연에 배알하고,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대학혹문』을 편수부터 신민장新民章 끝까지를 5회 외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소에 가서 곡하고 돌아와 궤연을 모셨다. 이도수 선오 형제가 괴시에서 다시 내방하여 점심 요기를 하였다. 도수가 말하길, “‘시정을 논하여 총독부에 장문의 편지를 했다’고 전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입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길, “필부로서 분수를 넘어서, 나와 동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말하는 것은 향당의 자신을 아끼는 자도 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다만 서로 잘 아는 처지에 끝까지 숨길 수 없어서 다만 그 말과 그 사실을 말하고, 이어서 「중국과 일본 정부에게 전쟁을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장문의 편지[中日政府停戰長書]」를 꺼내 보여 주니, 도수 형제가 크게 감탄하며, “이와 같다면 이것은 의견을 발표한 것이니, 저들이 듣고 안 듣고는 절로 일에 관계되지 않으니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저녁에, 갈암葛菴의 묘소에 장차 내일 장군석·망주석 등의 석물을 설치할 것이므로 익동으로 넘어갔다. 밤에 『대학혹문』을 ‘차인현조지시此引玄鳥之詩’부터 격물장格物章 끝까지 외웠다. 밤에 건숙建叔이 와서, 선영에 과일로 제사를 올린 의논은 아무개 아무개에게서 나온 것으로 모든 사람의 공론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내가 질책하기를, “그곳에 노성한 사람이 없는데 일 년에 한 번 지내는 선영의 제사에 조촐한 제사를 멋대로 행하고, 이웃에 살면서 아득히 마치 멀리 떨어진 나라에 사는 것처럼 찾아와 묻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우리 종파는 본래 은전을 하므로 서너 곳은 이미 조두에 제수를 올리고 제사를 행했는데, 화전과 도동의 경우에는 윗대 선영에 과일로 제사를 지낸 예에 의거하여 임시로 고쳐서 과일로 제사를 올렸으니, 어찌 극히 미안하고 크게 구애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도 사리에 닿지 않음을 알고 사과하기에, 나도 결국 중지하였다. 밤이 오래되어 헤어졌다. 『대학혹문』 외우기를 위에 기록한 대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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