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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북한성, 산봉우리를 빙 둘러 있는 옛 성을 보다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미수 허목은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 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허목이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허목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허목은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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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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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고양산수기(高陽山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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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목(許穆)
주제 : 북한산 유산기
시기 : ( 미상 )
장소 :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허목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중흥산성(中興山城)
중흥산성(中興山城)은 고려시대에 삼각산, 현재의 북한산에 쌓은 성이다. 우왕 13년(1387)에 증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활용해 조선시대에 북한산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흥사를 중심으로 축성되었는데 현재도 중성문 안쪽으로 여전히 견고하게 축조된 축대가 잘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적석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중흥사는 등안봉아래 옛 석성인 중흥산성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고려 말기 고승 보우가 중수한 중흥산성의 중심 사찰이었다. 고려 현종은 즉위하기 전 목종에게 왕자가 없자 태조의 아들 욱의 직손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대량원군으로 있었다. 그런데 12세 때 경종의 태후였던 천추태후가 그를 없애고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자기가 낳은 사생아를 옹립하고자 하였다. 목종에게 참소하여 개경에 있는 숭교사에 대량원군을 출가시켜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신혈사로 옮겼는데 진관대사가 본존불이 안치된 수미단 아래에 지하굴을 마련하여 대량원군을 숨겨 주어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에 3년 뒤 개경에 돌아와 목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현종은 1011년에 신혈사 자리에 새 절을 세웠다고 한다. 조선 임진왜란 때 왜군이 명나라 군대에 쫓겨 남하하자, 선조는 왜군의 재북상에 대비, 반격할 만한 거점을 찾았다. 당시 병조판서 이덕형이 삼각산 일대를 답사하고 『중흥산성간심서』라는 보고서를 내었다. 여기에 '북한산'이란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또 이 글에 "중흥의 형세는 참으로 하늘이 만든 험난한 곳입니다. 만일 여기에 성을 쌓으면 서울과는 표리가 되어 서로 호응할 수 있어 적이 비록 많은 군사로 침범해 와도 또한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어 북한산이 '中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흥은 북한산 안에 중흥사(中興寺)가 있고, 그 곳을 중흥동(中興洞)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에서 보듯이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 중심 요새지로서 삼국 사이의 주요한 쟁탈 대상지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북한산의 중요성은 여전하였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임금의 관)을 양주(지금이 한양)에 있는 부아산(현 북한산) 향림사로 옮겨오고, 고종 19년(1232)에는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우왕 13년(1387)에는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최영장군을 보내어 노적봉을 중심으로 중흥산성을 수축하였다. 이때 최영장군이 머문 곳을 지금도 장군봉이라 부른다. 중흥사 왼편에 장군봉이 있다. 이 성은 조선 후기까지 중흥사 북쪽에 성문터와 더불어 남아 있었다.
◆ 원문 번역
무술년(1658년, 효종 9년) 9년 여름에,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고양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간 머물렀다.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의 계곡에서 유람하였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고, 그 밑에는 절벽이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디는 주거할 만하고, 어디는 경작할 만하며, 어디는 목욕할 만하고, 어디는 노닐만 하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봉우리를 빙 둘러 석문(石門)의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성(北漢城)이다. 석문을 지나니 너른 바위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산 꼭대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 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의 재신(宰臣)으로 불교를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으니, 내가 일찍이 (금강산)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옛 자취가 있었다. 너른 바위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내려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많이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하였다. 깊숙이 바위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이 어두워지니,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西山)의 주인(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 정문옹(鄭文翁), 한중징(韓仲澄), 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 형제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백주(白酒)를 마시며 즐거웠다. 나는 병이 있어 의원을 구하려고 몇몇 친구를 좇아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 산봉우리에서 쉬고,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에 산수에서 유람한 일에 대하여 산수기(山水記)를 지었다. 그러나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미수(眉叟)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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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초상
허목(許穆)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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