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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바다 뱃길에서 고생을 겪다
1618년 5월 4일,
양경우(梁慶遇)
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보성을 떠나 흥양(興陽 : 고흥의 옛 이름)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보성의 수령인 정홍량이 양경우를 바래다주기 위해 해창(海倉 : 바닷가에 있는 세곡(稅穀) 창고)까지 따라왔다.
그가 말하기를, “여기서 흥양까지 육로로 간다면 거의 70나 됩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바닷길로 간다면 겨우 40리 정도입니다. 거리에 차이가 많이 나지만 바닷길은 위험하고 육로는 안전합니다만 결정은 공이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양경우는 “나는 바닷길로 장엄하게 여행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곧 세 척의 배에 돛을 올려 항해를 준비하였다. 두 척에는 짐과 말 등을 싣고 한 척에는 양경우와 수행하는 이 5~6명, 그리고 뱃사공 한 사람이 탔다. 배가 출항하려고 할 때 정홍량이 또 당부하였다. “풍파가 자주 일어나니 부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한번 웃고 헤어졌다.
배를 타고 수십 리를 가다보니 돛이 순풍을 만나 매우 빠르게 나아갔다. 그런데 문득 배 뒤에 있던 뱃사공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거친 바람이 오고 있다!”고 하였다. 양경우도 일어나서 바라보니 동남쪽에서 마치 눈 덮인 산과 같이 큰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양경우가 뱃사공에게 “이럴 때는 대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었다.
뱃사공은 “앞으로 갈 길이 20리 나 남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려운 항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돛 아래 자리로 가서 배에 탄 사람들에게 각자 노를 가지고 힘껏 저어서 나아가라고 하신다면, 비록 위험한 순간은 있겠지만 결국은 무사하게 지나갈 것입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배 안에는 마침 술이 있었다. 양경우는 배에 탄 사람들에게 술을 한 사발씩 나누어주어 놀란 마음을 진정하게 한 후에, 노를 부지런히 저으라고 하였다. 이윽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몰아쳤다. 높은 물결이 솟아오르자 바다 위에 외로이 뜬 배는 힘에 부쳐하며 파도를 넘을 듯 넘지 못했다. 몇 번이나 그러한 상황이 이어졌다. 배에 탄 사람들은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탄식하였고 살아남기가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였다.
양경우는 조찬한이 압록협에서 지은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나름대로 마음의 안정을 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뱃사공은 양경우가 걱정이 되었는지 자주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하고 소리쳤다. 양경우는 자신의 얼굴색이 평상시와 달라 뱃사공이 걱정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육지부근으로 와서 강기슭으로 올라와 배를 대니 겨우 정오 무렵이었다. 이날은 고흥에서 숙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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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歷盡沿海郡縣仍入頭流賞雙溪新興紀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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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양경우(梁慶遇)
주제 : 운송수단, 바다
시기 : 1618-05-0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고흥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양경우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여행의 이동수단 중 하나였던 배
양반들은 여행 중에 이동수단으로 배를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 배는 하천이나 바다를 건너거나 유람할 때 이용하였다. 배 중에는 큰 나무의 속을 파낸 배와 같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배 위에 누각을 설치한 관광선까지 있었다. 사적인 여행을 할 때는 배 삯을 주고 탔으나, 공무 여행인 경우에는 편의를 제공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수로가 육로만큼이나 중요했으며 무거운 화물을 수송하는 데에는 수로가 더 많이 이용되었다. 수운은 화물 수송에 효율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속도도 더 빠른 경우가 많았는데, 양경우의 경우도 높은 파도로 고생하기는 했으나 육로를 이용한 것보다 훨씬 빨리 목적지인 고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조찬한의 시에 답시를 지은 양 경우 조찬한(趙纘韓 : 1572~1631)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이다. 160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에 제수되고 호조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영암과 영천(榮川)의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18년에는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에 임명되어 호남·영남 지방에 들끓는 도적의 무리를 토평,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양경우의 지인으로, 토포사가 되어 남부로 파견되는 중에 양경우에게 지리산 유람을 권하였다. 먼저 유람을 하던 중 시를 보냈고 양경우는 이 시의 운에 맞추어 시를 지었던 것이다. 조찬한이 지은 시는 「현주집(玄洲集)」 권7에 실린 칠언율시에 보인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5월 4일 신묘 맑음.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고을 수령인 정홍량(鄭弘亮) 군이 나를 전송하기 위해 해창(海倉)에까지 왔다.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여기서 흥양(興陽)까지는 육로로 거의 70리가 됩니다. 만약 배를 타고 바닷길을 택한다면 수로로는 겨우 40리 정도입니다. 돌아가는 것과 빠른 것이 매우 차이가 나는데 다만 바닷길은 위험하니 육로를 택하십시오. 공이 두 길 중에 취하십시오.” 라 하니, 내가, “바닷길의 장엄한 여행길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세 척의 배에 돛을 올렸다. 두 척의 배에는 짐과 말 등을 싣고 한 척의 배에는 나와 따라오는 자 5, 6명과 뱃사공 한 사람이 탔다. 떠나려고 할 때 정군이 나에게 경계하여, “풍파가 쉽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작별을 하였다. 수십 리를 가니 돛이 순풍을 받아 매우 빠르게 나아갔다. 문득 뱃사공이 배 뒤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고하여, “거센 바람이 오고 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일어나 바라보니 동남쪽의 바다의 파도가 마치 설산(雪山)처럼 서 있는데, 그 형세가 이미 가까웠다. 내가 뱃사공에게 묻기를, “이와 같으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하자, 뱃사공이, “앞으로 갈 길은 멀어 아직 20리가 남았으니 이번 여행은 진실로 힘들겠습니다. 그러나 돛 아래의 자리에 가셔서 배에 탄 사람에게 명하여 각각 노를 가지고 힘써 젓는다면 비록 위험한 것을 면할 수는 없으나 별 탈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배 안에 마침 술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한 사발씩 나눠주어 놀램을 진정시키고 노를 부지런히 저으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바람과 파도가 이르니 높은 물결이 솟아 올랐다. 고단한 배는 힘이 약하여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데,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고 굽어 천 길의 바다를 쳐다보면서 배 안의 사람들에게서는 살아남는다는 희망이 없었다. 내가 이때에 현주(玄州)가 압록협(鴨綠峽)에서 지은 율시 한 수의 운자를 사용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못 마음으로 안정을 취한다고 여겼는데, 뱃사공이 자주 고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라고 한다. 문득 나의 안색이 평상시와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니 부끄럽다. 강기슭에 배를 대니 해는 겨우 정오 무렵이었다. 저녁에 흥양현에서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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