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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되어도 잊지 못하는 유모의 사랑
1638년, 김광계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김광계의 할머니가 한 여종에게 명하여 양육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유모를 가지기에는 다소 나이가 많은 때였지만, 김광계는 유모에게 상당히 정을 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유모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언제나 온화하고 자애롭게 모두를 대하였으며, 일을 함에 있어서도 부지런하고, 누구나 꺼리는 일에 먼저 나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윗사람을 섬겼으며, 김광계와 그 형제들을 아껴 주었다. 유모는 비록 여종이었지만 『소학(小學)』에서 말한 참된 어진 행동과 같이 늘 행동하였다. 그래서 김광계는 그와 일생을 같이 한 60여 년 동안 유모를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그 유모도 1638년에는 87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김광계는 아흔이 다 된 유모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걱정스러워하였다. 병을 앓으면서도 유모는 1년 넘게 더 생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639년 여름에는 유모가 이질에 걸렸다. 노인인데다가 계속해서 병을 앓고 있던 와중이라 더욱 병세가 위중하였다. 유모는 날로 초췌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해 김광계는 더욱 애간장이 탔다.

9월 7일 저녁, 집 밖에 있던 김광계는 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집으로 달려왔다. 이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유모는 김광계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결국 이 날 숨이 끊어졌다. 88세였다. 김광계는 유모의 덕성을 다시금 헤아리며, 갑자기 유모를 잃은 것을 슬퍼하며 어린아이처럼 통곡하였다. 길러준 은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슬픔이 더욱 컸던 것이다.

김광계는 다음 날 직접 유모의 초상을 치르는 일을 감독하고, 9월 9일에 양지바른 언덕에 유모를 묻었다. 김광계를 위로하기 위해 아우들과 조카들이 찾아왔지만, 다음날까지 김광계는 문을 닫아걸고 유모를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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