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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중에 작업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
올해는 비가 많이 왔다. 선산부(善山府)에서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서쪽에 새로 보(潽)를 쌓아 놓았었는데, 7월에 내린 큰비 때문에 이 보가 무너졌다. 이에 관아에서는
동부(東部)
와 서부(西部) 사람들을 보를 새로 쌓는 역(役)에 동원하였다. 그런데 아직 보를 새로 쌓기에는 비로 불어난 강물이 조금도 줄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불어난 물이 좀 빠진 뒤에 작업하자고 요청하였지만, 보를 쌓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나온 좌수, 이방, 군관, 장교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독촉하기만 했다. 마침 선산부사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좌수 이하 사령들은 더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하지만 불어난 물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강으로 누구도 선뜻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이 뻔했다. 모인 장정들이 모두 뒷걸음질을 치자 좌수는 지금 물에 들어가 작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곤장을 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곤장에 맞아 죽느냐, 물에 빠져 죽느냐였다. 공권력 앞에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거센 강물로 들어갔다. 불어난 물은 깊었고, 그 기세는 거셌다. 그날 작업자 중 네 사람이 수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예견된 결과였다.
이날 목숨을 잃은 네 사람의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호소를 들어줄 선산부사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뒤로부터 3개월 뒤인 10월, 새로운 선산부사가 부임하였다. 그제야 유족들은 7월에 있었던 참사를 일으킨 당사자들을 고발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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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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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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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사고, 재난
시기 : 1774-10-15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 홍수의 피해
농업경제기반의 조선 시대는 비의 많고 적음이 농작물의 생산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많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이는 비의 종류에 따라 미우(微雨), 세우(細雨), 소우(小雨), 하우(下雨), 쇄우(灑雨), 취우(驟雨), 대우(大雨), 폭우(暴雨) 등 8가지(김연옥, 1984)로 상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홍수를 발생시키는 호우는 대우(大雨)와 폭우(暴雨)이며 그 외에도 대수(大水), 홍수, 물난리 등의 표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호우 기록은 '큰비'가 '457건', '큰물'이 '119건', '홍수'가 '102건', '폭우'가 74건', '물난리'는 '6건'으로 총 '827건'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는 '798건'이 있었고 『승정원일기』에는 '29건'이 있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象緯考) 9권의 물이(物異)에서 '우이(雨異)'는 총 '82건'이었다.
조선 시대는 홍수의 재해가 '극심' 또는 '약'의 양극단의 특성으로 나타났다. 재해의 빈도는 중기-후기-전기의 순으로 나타났고, 재해의 규모는 전기-중기-후기로 갈수록 강해지는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홍수 재해는 50년을 주기로 증감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호우 발생빈도는 높았지만, 재해로 이어진 홍수의 빈도는 낮았고 대부분 '약'에 해당하는 재해가 발생했다. 전기 말인 1501~1550년대부터는 재해의 빈도가 크게 증가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재해의 빈도가 가장 높게 나타났고 역시 '약'에 해당하는 재해가 대부분이지만 '중'이상의 규모가 증가했다. 조선 후기에는 중기보다는 약간 낮은 빈도로 발생했지만 대부분 '극심'에 해당하는 재해가 발생했다. 시기적 분포 특성으로는 홍수 재해의 규모와 빈도가 연대별로는 1651~1700년대에 가장 높게 나타났고 다음으로 1601~1650년대와 1701~1750년대가 높게 나타났다. 월별로는 5~8월에 재해가 발생했고 7월에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분포했다.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주로 6, 7월에 집중해서 분포하고 조선 후기에는 7, 8월에 발생빈도가 크게 증가하였다.
공간적 분포 특성으로는 홍수 재해의 규모와 빈도가 조선 전기에는 한성과 경기도의 양주목, 양근군, 광주목, 가평현, 고양군 등의 내륙지역에서 주로 발생했다.
조선 중기에는 경상도의 안동부, 군위현, 인동부, 영산현, 밀양부, 양산현, 사천현 등과 전라도 순천부, 광양현, 구례현, 용담현, 진안현 등, 충청도의 임천군, 충원현, 청풍군, 단양군, 영춘현 등의 내륙/해안지역에 분포했다.
조선 후기에는 평안도의 평양부 ,안주목 등, 함경도의 이원현, 명천부 등의 북부지역에서 빈도가 증가했지만 중기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내륙/해안지역에서의 분포가 가장 많았다.
'영남(嶺南)과 관동(關東)에 홍수가 졌다. 영남의 인동(仁同)·영산(靈山)·안동(安東)·군위(軍威)·창원(昌原)·의흥(義興)·용궁(龍宮)·고령(高靈)·상주(尙州)·예안(禮安)·초계(草溪)·의령(宜寧)·김해(金海)·함안(咸安)과 관동의 회양(淮陽)·양양(襄陽)·금성(金城)·간성(杆城)·평강(平康)·홍천(洪川)·양구(楊口)·철원(鐵原)·춘천(春川)·횡성(橫城)·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인제(麟蹄) 등의 재해가 더욱 혹심하였다. 산사태가 나고 죽은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관청과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고 깊은 산의 큰 나무들도 뿌리째 뽑혀 한강과 낙동강으로 떠내려왔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8년(1605) 7월 1일)
'홍청도에 큰물이 져 금강이 크게 넘쳐 집 수십여 채가 침수되었다. 임천(林川)·충원(忠原)·청풍(淸風)·단양(丹陽)·영춘(永春) 등 고을에서는 침수된 민가가 1백 40여 채였고, 진천현(鎭川縣)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4인이었으며, 평택현(平澤縣)에서는 들판의 여염집이 거의 다 침수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25년(1647) 7월 13일)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큰비가 퍼붓듯이 내려 서흥(瑞興)에서 부(府)까지와 부에서 바다 어귀까지 90여 리 사이의 평지가 바다로 변하였는데 떠내려가거나 잠긴 민가가 100여 호이고, 마소와 사람은 거의 피할 수 있었다. 신천(信川)·옹진(甕津)·수안(遂安) 세 고을도 마찬가지여서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터져서 들판이 모두 침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6년(1603) 7월 2일)
주로 낙동강, 금강 등의 큰 강이 범람하여 재해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강의 하류 저지대뿐만 아니라 상류 내륙지역에서도 극심한 재해가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 원문 번역
갑오일기 1774년(영조50) 10월 15일(을미) 바람이 불다가 볕이 났으나, 비가 내림. 들으니, 좌수 김진항金晉恒, 전임 이방吏房 유복기劉復基, 군관 지덕상池德尙을 모두 칼을 씌우고 엄히 가두었다고 한다. 이 일은 지난 7월에 내린 비로 선산부善山府 서쪽의 새로 쌓은 보湺가 무너지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 사람들에게 역에 나오도록 하였다. 그 때에 홍수로 인하여 침수되어서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좌수·이방·군관·장교들은 선산 부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사람들을 독촉하여 일에 나가도록 하였다. 군정들이 물이 줄지 않은 것에 겁을 먹고 일을 하지 않자 곤장으로 위협하였다. 군정이 물에 들어갔지만 물살이 여전히 세고 깊어서 죽은 사람이 4명이나 되었다. 신임 선산 부사가 부임하자 죽은 사람들의 부모와 처자가 호소하니, 그 원수들을 이번에 구금하고 감영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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