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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관직을 구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소득 없이 고향에 내려가게 된 노상추는 노잣돈이 떨어져 쩔쩔매고 있었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몇몇 있다고는 하나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것은 모양도 빠지거니와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히 태묘동(大廟洞)의 박례택(朴禮宅)에게 청하여 부족하나마 200동(銅)을 빌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굶으며 고향까지 가게 될 뻔하였다.
마침내 노잣돈도 마련하여 귀향하기로 한 날이 되었는데, 동행하여 내려가기로 약속한 주서(注書) 김기찬(金驥燦)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오후까지 기다려 봤지만 결국 오지 않기에 저녁이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첫날은 출발이 늦었기에 서울에서 30리 떨어진 광주(廣州)의 신원참(新院站)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일찌감치 출발하여 하루에 130리 길을 갔다.
출발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단월참(丹月站)에서 묵어가려고 말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데 먼저 와서 쉬고 있던 교리(校理) 이정규(李鼎揆)가 인사를 했다. 이정규는 김기찬이 약속을 어기지 않았냐고 하며, 노상추에게 김기찬의 당시 상태를 전해 주었다. 김기찬은 토하고 설사하기 시작했고, 남자종은 등에 종기가 나서 도저히 길을 나설 수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노상추는 김기찬에게 났던 화가 조금 가라앉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조금 늦게 이정규와 함께 길을 나선 노상추는 마침내 영남 땅으로 넘나드는 관문인 조령(鳥嶺)에 다다랐다. 새조차 넘기 힘든 고개라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견여(肩輿)를 타고 고개를 넘곤 했다. 이정규도 견여를 탔으나, 노상추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두 다리를 믿고 걸어서 40리 고개를 묵묵히 넘어야 했다. 문경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유곡참(幽谷站)에서 동행하던 이정규와는 길이 갈렸다. 대신 청도(淸道) 사람 이동식(李東植)이 이후 길을 동행하게 되었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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