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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새해가 되자마자 월파(月波)의 성곡(省谷) 족숙이 숙환으로 별세하였다는 부고가 날아들었다. 올해 71세가 되었으니, 수명은 충분히 누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성곡 족숙의 아들 노상해(盧尙楷)가 자손 없이 요절했기에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노상추는 조카 노정엽(盧珽燁)을 데리고 빈소를 찾았다. 노상추가 도착했을 때, 성곡 족숙모는 백송(白松) 족숙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망자에 대한 애틋함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후사 문제로 고민이 많아서인 것 같았다.
본디 집안의 후사를 위해 양자를 들이냐 마느냐는 종부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하지만 일전에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한 여러 친족에 의해 임의로 양자가 정해진 일이 있었다. 성곡 족숙모는 마뜩하지 않았지만 일단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정식으로 입후(入後) 절차를 밟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양자로 삼은 사람이 요절해 버리고, 그의 부인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흐지부지되었는데 그때의 일이 성곡 족숙이 돌아가신 지금 문제가 된 것이다. 족숙모는 “망인이 남기신 뜻은 전에 명목상 아들로 삼은 자를 파양하고 상오(尙梧)를 후사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종 전에 아주버님(백송 족숙)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노상오는 백송 족숙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래서 성곡 족숙모는 백송 족숙을 잡고 노상오를 양자로 달라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백송 족숙은 난감한 듯했다. 전에 아들로 삼은 자는 이미 명을 달리했고, 그에게도 후사를 이을 아들 없이 그 부인만 남아 있었기에 파양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기는 했다. 그래서 여러 친척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성곡 족숙의 양자를 세우기보다는 족숙의 아들인 노상해의 양자를 들이는 편이 낫다고 보고 그 항렬 중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윈 노경엽(盧敬燁)을 후사로 삼기로 했다. 성곡 족숙모도 노상오를 양자로 세우는 것을 더는 고집하지 않고 친척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것으로 상황은 정리된 듯하였다.
5개월 뒤인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다음 해, 성곡 족숙의 소상(小喪) 때에는 결국 성곡 족숙모가 당초에 임의로 세운 양자를 파양하는 한글 편지를 자신에게 맞선 며느리에게 보냈다. 종부의 강력한 권한을 침해할 생각이 없었던 친척들은 이 일에 대해 누구도 참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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