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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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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94-02-14 ~ 1794-03-2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북도 삭주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김영억, 노익엽, 이운경, 김주옥, 노정엽, 조석년, 이동겸, 이국연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 수령의 손님접대
박계숙이 홍원현의 수령인 김충민과 같은 도 출신이라 하여 환대를 받은 장면이다. 조선시대에는 본래 출생지인 거주지를 떠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양반의 경우 관직에 진출하여 서울에 거주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지역의 수령으로 가는 경우가 있고, 무관이라면 변방지역에 근무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외에도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가게 되거나, 기타 개인적인 이유로 여행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때문에 이런 외지에서 동향인을 만나면 서로 매우 반기고 환대하는 일이 많았다.
보통은 같은 고을 출신을 동향 출신이라고 하였지만, 같은 도 출신 정도만 되어도 동향인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반의 경우, 지역 사회에서 혼맥과 학맥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오늘날보다 훨씬 지역 사회 내에서 인적 관계망이 촘촘하고 복잡하였다. 때문에 양반 신분 내에서 같은 도 출신이라 한다면 꼭 개인간에 안면이 없다 하더라도 집안이나 학문적 관계로 묶여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충민은 홍원현 수령의 신분으로 이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고 있는데, 조선시대 수령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빈객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수령들의 일기 등을 살펴보면 일과 중 가장 중요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을 만나 접대한 일이었다. 공무를 위하여 해당 지역에 들른 관원, 수령 개인을 만나보기 위해 온 친구나 가족, 수령에게 청탁을 하기 위하여 서울의 지인들이 보낸 사람들, 인근 군현의 수령들, 군사업무 협조 등을 위하여 인근 병영이나 수영 등에서 건너온 군지휘관들 등 빈객의 구성원은 매우 다양하였고 성격 역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혼재해 있었다. 박계숙의 경우는 신분이 비록 군관이라고는 하나, 숙박이나 식량 지급을 넘어서 기생을 동반한 연회를 열어준 것 등을 봤을 때 역시 동향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특별히 후대한 것으로 보인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2월 14일(신미) 볕이 남. 영천榮川의 김영억金永億 상인喪人이 도착하였다. 1천 6백리를 산 넘고 물 건너서 왔는데 지나친 행동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조보를 보니 사간원에서 절도사로 천거하는 후보 단자에 3인을 올렸는데, 최범성崔範星이 수망이고 내 이름은 부망副望이며 장동원張東源이 말망末望이었다. 이를 보니 스스로 매우 부끄러웠다. 2월 17일(을해) 볕이 남. 김영억金永億 상인喪人과 동행한 최崔 생生이라는 자가 등에 종기가 나서 대단히 심하다고 하니 염려스럽기 그지없다. 2월 27일(을해) 볕이 남. 닭이 울자 길을 출발해서 산창山倉에 도착하니 이미 동쪽에서 해가 떴다. 환곡의 분급이 끝나기 전에 아들의 편지가 파발로 도착했는데 어제 대관참大館站에 도착했다고 한다. 잠시 있다가 아들 익엽翼燁이 이운경李運慶 생生과 같이 첩妾을 데리고 도착했고, 박천博川의 천賤 고모도 함께 따라왔다. 환곡을 다 나누어 주는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하처下處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부府로 들어가게 하였다. 내가 길을 떠나 송령松嶺의 남쪽 골짜기 아래에 도착하니 뜻 밖에 노루 세 마리가 평지 입구로부터 곧바로 말머리를 향해 옆으로 넘어가니 괴이하다. 가서 대관大館에 도착하니 환곡의 분급이 끝났고, 남창南倉으로 가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4경(오전 1~3시)이 되자 파발군이 고하면서 중군中軍의 고목告目을 전달하였다. 고목에 “어제 본창本倉에서 환곡을 나눠줄 때에 북면北面 송정리松亭里의 환민還民 아동 김세황金世况과 읍내의 향교 남자종 장삼득張三得의 아들 장천항張天恒이 함께 동전 던지기 놀이를 하다가 서로 싸웠는데 기왓장 돌로 김세황을 때려서 한나절이 지나 신시(오후 3~5시)에 죽었습니다.”라고 한다. 들으니, 매우 경악스럽다. 3월 초7일(갑신) 흐림. 닭이 세 홰 째 울 때 북창北倉에서 환곡을 나눠주기 위해 길을 출발하였다. 북창 앞쪽의 고개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새벽이 되었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창고에 도착해 나눠 준 뒤에 비를 무릅쓰고 관아로 돌아왔다. 종일 가랑비가 그치지 않았다. 어제 영천榮川의 김영억金永億 상인喪人이 돌아가므로 돈 150금金을 주어서 상喪을 치르면서 진 빚에 보태주었다. 같이 온 최崔 생生은 병이 나서 돌아가지를 못했는데 살펴보니 매우 걱정스러웠다. 3월 12일(기축) 볕이 남. 장천항張天恒 옥안獄案에 대한 복검장覆檢狀이 다시 돌아왔다. 처분 내용에 “이 옥사만큼 잔인한 것이 없지만 처형을 행할 나이에 차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해 차율次律을 적용해서 장杖 1백으로 죄를 결정하여 희천군熙川郡에서 유流 3천리 떨어진 곳에 정배하라.”라고 하였다. 이날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이 남자종을 데리고 걸어서 도착하였다. 이 사람은 익엽翼燁의 이종姨從 사촌인데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여서 상대방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천리도 멀다 하지 않고 왔으니 진실로 매우 답답하다. 저녁 무렵에 조카 정엽珽燁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씨가 들어왔는데 별탈없이 도착했으니 다행이다. 영중英仲은 회시會試에서 2발을 명중시켰으나 1분分이 모자라서 낙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운수이니 어찌하겠는가? 3월 24일(신유) 볕이 남. 일찍 출발할 때에 고을 수령이 하처下處로 와서 보았다. 그의 대마大馬를 빌려서 삭주朔州의 남창南倉에 도착한 뒤에 그 대마를 돌려보냈다. 말을 먹인 뒤에 산창山倉에 도착해 말을 먹이고 계반령界畔嶺을 넘었다. 왕래하는 동안에 고개를 넘는 곳에서는 견여를 치우고 말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말 타기도 어려운 곳에선 도보로 가서 가마꾼들의 어깨를 쉬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대개 예전부터 각 고개의 가마꾼에 대한 정식이 있어서 고개마다 약정約正이 8명을 거느리고 종일 대령하는데, 이 역시 민폐 중의 하나다. 날이 저물기 전에 관아에 돌아오니 관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지금 와서 머물고 있는 여러 손님들 중 영천永川의 이동겸李東謙은 봉산鳳山에서부터 함종咸從과 선천宣川을 거쳐서 여기에 도착하였다. 이 때 봉산 수령은 조학신曺學臣 영공이고, 함종 수령은 친구 이시함李時菡이며 선천 수령은 친구 이욱연李郁延인데 이 친지들의 고을을 굽이굽이 들러서 온 것이다. 또 이국연李國延, 김주옥金調玉, 홍□□洪□□, 지우룡池遇龍, 김철관金鐵寬 및 내종숙, 영중英仲, 정엽珽燁, 익엽翼燁, 책실冊室 이운경李運慶, 또 그 아래 남자종 4명, 여자종 1명, 겸인傔人 1명 등이 있으니 많은 권속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또 김영억金永億과 함께 온 병든 손님이 아직도 있으니 담당 업무 이외에도 근심스럽고 어지러운 일을 이루 말할 수 없다. 3월 27일(갑자) 아침에 흐리고 늦게 바람도 불다가 볕이 남. 양무養武 및 백일원百一院의 무도회武都會 시사試射를 서문 밖에서 시행하였다. 이날 고을 장교로서 새로 급제한 서덕겸徐德謙, 서유화徐有華 부자가 도문연到門宴을 열었다. 부자가 함께 같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일은 예전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으나 이번에 특교로 시행한 것이니 그 영광스러움이 다른 때보다 갑절로 더하다. 날이 저물도록 시사를 마치지 못하였다. 친구 이동겸李東謙에게 1천 동銅의 노자를 주어 보내고, 하인과 말을 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냈다. 이국연李國延은 1천 동의 노자를 주어 보냈는데도 불만스러워하면서 말투가 곱지 않으니 괴이하다. 그는 갈 때에 이李 친구와 동행해 나갔는데 이 사람은 하인과 말을 갖추어 와서 머무른 자다. 김주옥金調玉은 하인 1명을 거느리고 와서 머물렀는데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은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은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 세 사람은 걸어서 이곳에 왔고 걸어서 돌아가니, 이 사람들의 행색으로 인하여 내가 박대한 잘못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대부분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알면서도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와서, 새로 부임한 나의 어렵고 궁핍한 처지를 헤아리지 않으니 진실로 통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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