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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으로 가는 유구국 사람을 만나보다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으로 뽑힌 노상추는 가산(嘉山)에 와서 이번 동지사 사행이 가져갈 방물 포장을 위해 한참을 머무르고 있었다. 가산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아직 방물도, 사행도 어디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물과 사행을 기다리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사행의 차사원으로 차출되어 가산에 머무르고 있던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늦은 시간에 노상추를 방문했다.
서택성은 이번에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의 표해인(漂海人)을 연경(燕京: 베이징)까지 데리고 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표해인은 아직 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 서택성은 이번 임무를 위해 제법 공부를 해 놓은 듯했다. 노상추도 서택성에게 유구국 표해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들었다. 유구국은 조선의 서남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이번에 표해인 무리가 연경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래서 동지사가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1월 8일, 마침내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 표해인 3명을 인솔하여 가산에 도착하였다. 이경희는 서택성에게 이들을 인계하였다. 한 번도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노상추도 호기심이 동해 이경희, 서택성과 함께 유구국 사람들이 있는 관아에 들어가 보았다.
유구국 사람들은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방식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는데, 제주에서 온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해 주었다. 이경희, 서택성, 그리고 노상추가 관에 들어가자 유구국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깔아놓은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그 자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데 앉지 않고 수령들을 위해 양보한 것은 구태여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과연 유구국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이런 데서 알 수 있었다.
유구국 사람들을 인솔해 온 이경희가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구국 사람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앞으로 이들을 인솔할 서택성이 다담상을 들여와 대접하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는, 역통사를 통해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에게도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인정을 보였다. 유구국 사람들의 신중한 처신에 노상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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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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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94-11-03 ~ 1794-11-0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북도 삭주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서택성, 이경희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 외국인과의 교류
조선시대 국내거주 외국인은 일정정도 있었고 그들과의 교류 및 혼인 등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외국국적이라기 보다 귀화를 하였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귀화인 우대 정책은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의 귀화 정책은 여진족에 대한 포섭과 격려, 결혼 정책, 강제 이주, 인질책 등 이었다. 세종 9년(1427.4.4)에는 조정 대신들이 회회교도의 혼인 문제에 대해 임금에게 상신한 청원문이 발견되는 데,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사람들과 달라 모든 백성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입는다면 백성들과 혼인도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년초 1일, 16일 입춘과 동지에 갖는 조회)때 회회교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바람직 합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정미(1427,선덕 2) 4월4일 (임술)) 이 기록은 조선의 지도부가 이슬람교도들을 우리나라에 정착시키고 조선 사람과 혼인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슬람교도들은 특유의 종교 의식을 금지시킴으로써 그들은 고유의 풍습을 버리고 조선에 귀화되어야 했다.([출처] 조선시대에도 외국인들이 함께(상))
조선시대 때 일본인이 집단 거주하던 곳은 지금의 부산시 광복동 일대로 이곳을 왜관(倭館)이라 하여 사방에 담을 만들고 군졸을 시켜 출입을 엄격히 관리했다. 이후 이들이 삼포왜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없어졌다가 19세기 후반 강화도 조약 이후 다시 일본인들이 진출하게 된다.
여진인들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조선인들과 잡거하는 형태였고, 훗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청의 요구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일정정도 조선인화 되어 상징적인 숫자만 돌려보내고 대부분 조선에 거주하게 된다.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조선 초기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큐국에서 일단의 망명객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경남 진주에 거주케 하였다. 또 임진왜란 당시 많은 왜인이 투항하는데(항왜) 이들을 처음에는 요동으로 보내 살게하자는 안이 대두되었다가 이들을 분산 수용하게 된다. 즉 농업력이 있는 자들은 하삼도(경상/전라/충청)에 거주케 하고, 무예가 있는 자들은 군영에 소속시켰다.
한족은 고려왕조 초기 문물 정비와 관련하여 귀화한 경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참여했다가 정착한 경우,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 때 전란을 피해 들어온 경우와 같이 전체 중국 귀화인 중에서 일부에 불과하다. 조선왕조는 중국 선진 문물 유입의 필요성과 한족이 이룬 중국 역대 왕조에 대한 오랫동안의 호의적인 인식에서, 한족 귀화인에 대해서는 귀화정책에서 여타 민족과는 달리 여러모로 우대를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향화인'이라 불리지 않았고, 상국인(上國人) 내지 황조인(皇朝人) 등으로 불렸다. 또한 조선왕조는 귀화 중국인과 그 후손에 대해서는 별도로 명부를 만들어, 여타 민족 출신의 귀화인과 구별하여 관리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명부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17세기 이후 새롭게 작성·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여러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영조 30년(1754) 6월에 향화인과 화인(華人)을 구별하여 전국에 그 명부를 작성토록 하고, 예조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진위를 가려서 정초(精抄)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별도의 중국인 거주자 명부를 성안하여 『화인록(華人錄)』이라 이름하고 예조와 본도에 각각 한 건씩을 비치·관리하고 세금도 영구히 면제하는 등의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어 영조 34년(1758)에는 황조인 후손을 조사하여 그 명부를 비변사와 각 도에 비치하도록 하고 이들에 대한 군역을 면제토록 했으며, 정조 22년(1798)에는 한족 귀화인의 후손에 대해 향화인 대신 '황조인(皇朝人)'으로, 이들이 사는 마을은 '황조인촌(皇朝人村)'으로 부르게 하였다. 특히, 영조 34년에 중국인 후손들에 대한 공식적인 면역(免役) 전교(傳敎)가 내려지자 예조에 있는 '황조인장적(皇朝人帳籍)'을 고증해서 자신들의 신역을 면제 받기를 청하는 중국인 후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수환, 이병훈,「조선 후기 귀화 중국인에 대한 정책과 강릉유씨 가경 2년 첩문」 민족문화논총 제43집 (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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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갑인일기 1794년(정조18) 11월 초3일(정해) 볕이 나고 바람이 없음. 늦을 무렵에 희천熙川 수령 서택성徐宅聖이 유구국琉球國의 표해인漂海人을 데리고 가는 차사원으로 왔기에 그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표해인은 아직 이곳에 내려오지 않았다. 유구국은 서남쪽에 있는 해도海島인데, 그 무리가 연경燕京을 경유해서 본국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므로 이번 동지사가 들어가는 편에 붙여서 연경으로 보내려는 것이다. 저물녘에 장흥고長興庫 봉사奉事 최규정崔奎晶이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을 지나며 알현을 요청하였다. 이 사람은 삭주朔州 사람으로서 지난달 26일에 청나라에 보낼 방물을 포장하는 일에 참여하고 그날 출발했다고 하는데, 방물이 온다는 소식이 없으니 답답하다. 저녁에 수배隨陪가 순찰사의 관문關文을 보고했는데, 방물차사원方物差使員은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옮겨서 차정하고, 삭주 부사朔州府使는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차정한다고 하였다. 머물러 대기하는 것이 지체되고 날은 점점 더 미루어지고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다. 11월 초8일(임진) 새벽부터 바람이 불어 저녁이 되자 바람이 거세게 붊. 추위가 매우 매섭다. 열흘 동안 바람이 없고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았으나 본래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뜻함과 추위가 변덕스러운 것도 어찌 천도天道가 아니겠는가. 저녁 무렵에 함종咸從 수령 이경희李敬熙가 유구국琉球國의 표해인漂海人 3명을 데리고 가산嘉山에 도착하여 그들을 희천熙川 수령에게 맡겼다. 희천 수령 및 함종 수령과 함께 관館에 들어가서 표해인을 보았는데, 머리털을 올려 묶어서 상투를 튼 방식은 우리나라와 같았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제주濟州의 역통사譯通事가 따라와서 통역하여 주었다. 수령 3원員이 그들이 머무는 곳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비록 말은 통할 수 없었으나 삼엽방석三葉方席을 가져와서 수령들 앞에 펴 놓았다. 방석은 그들을 대접하려고 깔아놓은 자리인데도 그들이 앉지 않고 수령들 앞에 펴놓은 것은 존자尊者를 대접하는 뜻으로 한 것인데,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러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예의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과연 여기에서 알 수 있다. 함종 수령이 통사通事를 통해서 말하기를, “나는 내일 돌아갈 것이니, 그대들은 무사히 잘 가게.”라고 하였다. 통사가 이 말을 전하자 그들은 일어나서 합장한 채로 두 번 인사하고 말하기를,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가산 군수가 다담상으로 대접하니,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서 통사를 통해서 말하여 그 음식을 역졸驛卒에게도 내주도록 했다. 그리고 “함종 수령의 하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보면 인정人情은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다. 저녁에 희천 수령 및 함종 수령과 함께 가산군의 관아로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었다. 고을 수령이 밤참을 차렸는데 기생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서 하처에서 함종 수령과 함께 잤다. 11월 초9일(계사) 볕이 나고 바람 붊. 희천熙川 수령이 표해인漂海人을 데리고 의주義州로 향했는데, 표해인을 동지사의 사행에 딸려서 보내기 때문이다. 함종咸從 수령은 이곳에서 돌아갔다. 들으니, 사행이 초7일에 평양平壤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에 사행이 오는 길목에 나아가서 알현하기 위해 함종 수령과 동행하여 안주安州로 갔다. 함종 수령은 바로 돌아갔다. 나는 상영上營과 중영中營에 치진馳進하고 고을 수령을 만나고 돌아와서 영주인營主人의 집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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