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통과 기록
유교문화관
조선의 교육
조선의 가례
옛문서 생활사 박물관
사행록 역사여행
안동 하회마을
조선의 전통건축
스토리 테마파크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공모전
콘퍼런스
테마스토리
가정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개인의 일생과 통과의례
그리운 가족
노비들의 삶
경제
가계경영과 노동
고달픈 세금과 부역
시장과 거래
자연재해와 흉년의 기록
공동체
공동 목표를 위한 조직과 협동
관리와 공조 및 대립
사람 사이 갈등과 범죄
이웃과 어울리는 삶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구국에 나선 의인들
나라를 위한 무장투쟁
신문물의 물결과 변화하는 조선
이역만리에서의 독립운동
혼란한 정국
나라의 정치
관직생활
국가의 경조사
국왕의 명령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
조정의 갈등과 대립
조정의 사건과 사고
외교와 사행
사행길의 사건사고들
사행길의 여정
외교정책의 수행
외국 사람들과의 만남
외국의 자연과 문물의 경험
전쟁, 혼란의 기록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전쟁의 진행과 양상
피난과 궁핍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유람과 감상
유람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유흥의 기록
자연과 고적에 얽힌 이야기
하층민의 놀이와 즐거움
학문과 과거
과거 급제의 영예
과거의 부정부패
끝없는 학문의 세계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
인물스토리
관리
가족, 동료와 교류하는 관리
나라의 변란을 맞이한 관리
무인의 길을 걷는 관리
바른말을 하는 관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
선정을 베푸는 청렴한 관리
외교를 수행하는 관리
인사발령을 받은 관리
정치적 갈등에 직면한 관리
죄를 지은 관리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
양반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양반
고을일에 참여하는 양반
과거시험을 치르는 양반
나랏일을 걱정하는 양반
난리를 만난 양반
대립과 갈등에 놓인 양반
사람들과 교유하는 양반
일상을 고찰하는 양반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양반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풍문과 소식을 듣는 양반
학문하는 양반
여성
기생
양반가의 여성
왕실의 여인들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하층민 여성
왕실
국난을 만난 국왕
국정을 돌보는 국왕
왕실의 사람들
왕을 보필하는 세자
한 집안의 가장인 국왕
외국인
군대를 이끌고 온 외국장수
외국의 외교관
조선인을 만난 외국인
중인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관)
향리
하층민
고된 삶을 사는 노비
기술자의 삶, 장인
무속인
부역과 노동에 지친 백성
장사로 삶을 영위하는 상인
천대받는 승려
배경이야기
경제
군제와 군역
농업과 가계경영
산업과 시장
세금과 부역
환경과 재해
교육과 과거
과거
교육기관
학문과 출판
인물
문화
고사, 고적
관습, 풍속
군제와 군역
놀이
예술
의례
의식주
종교
사회
가족과 일상의례
신분
지역공동체
질병과 의료
전쟁과 외교
국제정세
민간인 교류
외교
전쟁
정치와 행정
사건
사법
왕실
정쟁
정치행정제도
지방제도
일기정보
서명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저자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멀티미디어
내용유형
공간자료
사건자료
소품자료
인물자료
절차자료
참고자료
미디어유형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이미지
공지사항
활용사례
로그인
소개
웹진담담신청하기
활용가이드
용어사전
전통과기록
페이스북
블로그
▲ top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일기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전체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이야기
검색어
시기
-
검색
다시입력
테마스토리
가정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개인의 일생과 통과의례
그리운 가족
노비들의 삶
경제
공동체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나라의 정치
외교와 사행
전쟁, 혼란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학문과 과거
Home
>
테마스토리
>
가정
>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페이스북
스크랩
소머리 굽고 노래하며 질펀하게 보낸 새해
천연두 때문에 온 동네에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슬픈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해맞이의 힘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함께 모여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즐기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울한 얼굴로 다니던
김성탁(金聖鐸)
역시 운곡의 이호 형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왁자한 분위기 덕에 조금씩 웃음을 찾아 갔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호 형 집의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수십 명의 손님들이 들어찬 사랑방에는 등잔불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종들이 바삐 내어오는 상들 위에는 쇠머리를 구운 고기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준비했는지, 어느 손님이 가져왔는지 촌 막걸리도 있었는데 그 시큼한 맛이 고기와 잘 어우러졌다. 술이 들어가자 다들 불콰한 얼굴로 서로 노래를 시켰다. 서로 주고받는 노래의 흥이 모두의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려 주었다. 하지만 김성탁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술에 취해 종종 광대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설한 말을 섞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제산일기(霽山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성탁(金聖鐸)
주제 : 명절, 풍습
시기 : 1732-01-0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성탁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성탁
◆ 설의 연원과 조선시대 설 풍속
먼 옛날 사람들은 해의 길이에 따라, 달이 차고 기우는 정도에 따라 시간을 나누었다. 시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확히 알면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제철에 씨를 뿌리고 길러서 거두어들일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될 때,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해를 계획하는 뜻으로 특별한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새해의 첫날을 뜻하는 ‘설날’이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 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민족이라는 일체 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Ⅰ. 설의 어원과 유래
설은 새해의 첫 시작이다. 설은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 출발을 하는 첫날이다. 元旦은 아주 옛날부터 重視되어 기렸는데 원일(元日)·원정(元正)·원진(元辰)·원춘(元春)이라고도 불렀다. 元旦이 ‘정월 초하룻날의 아침’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陰曆 1월 1일의 아침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王朝마다 正月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하(夏)는 지금처럼 陰曆 1월을, 은(殷)은 12월, 주(周)는 11월, 진(秦)은 10월을 각각 正月로 삼았으므로 秦始皇 때는 陰曆 10월 1일의 아침이 元旦인 셈이다. 현재처럼 1월을 正月로 삼은 것은 漢武帝 때부터다. 하력(夏曆)을 복원시킨 셈이다.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 『삼국지』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 태음력이나 간지 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 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공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 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설'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한 해석은 구구절절하다.
그중 하나가 '서럽다'는 '설'이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이 '여지승람'이란 문헌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달'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이요, '도'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모르겠다.
다음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 설(說)이다. 각종 세시기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까닭이다. 옛날 문헌들에 정초에 처음 드는 용(辰)띠 날, 말(牛)띠 날, 쥐(子)띠 날, 돼지(亥)띠 날, 그리고 2월 초하룻날이 신일(愼日)로 적혀 있음을 근거로 하여 육당 최남선이 풀이한 기원설이다. 새해부터 처음 맞이하는 십이일을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이라 하여 여러 가지를 삼가며 조심할 것을 가르친 풍속이 있는 걸 볼 때, 매우 타당한 설이다.
'설'의 어원에 대해 또 다른 견해는 나이를 댈 때 몇 살 하는 '살'에서 비롯된 연세설이다. 한국말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우랄 알타이어계에서 해가 바뀌는 연세를 '살(산스크리트語) ·잘(퉁구스語) · 질(몽고語)'이라 한다. 산스크리트 말에서 '살'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해가 돋아나듯 '새로 돋고 새로 솟는다'는 뜻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다는 구분이나 경계를 뜻하고 있다. 이 모두 정초와 직접 연관되고 있다. 중국의 어원사전인 '청문엽서'에 보면 연세를 나타내는 '살'· '잘'은 세(世)· 대(代)· 세(歲)· 수(壽)를 뜻하고, 또 대나무나 풀이나 뼈마디를 뜻하는 절(節)의 어원이라고도 했다. '몇 살, 몇 살' 하는 '살'이 그 연세의 매듭(節)을 짓는 정초를 나타내는 '설'로 전화됐음 직하다.
또한, 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다는 견해는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설(說)이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라는 정신·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서 '설다'의 의미로, 낯 '설은 날'로 생각되었고, '설은 날'이 '설날'로 정착되었다. 곧 묵은해에서부터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에 있는 다소 익숙지 못하고 낯선 단계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설은 동지로부터 시작하는 마무리 시기에서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새 시작의 설날을 정점으로 하여, 그리고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과 정월 대보름의 대단원까지를 한 선상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Ⅱ. 설날 풍속
설날 아침 일찍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세찬과 세주를 마련하여 사당에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다례(茶禮)라고 하는데 보통 차례라고 말한다. 차례는 4대조까지만 지낸다. 사당에는 4대까지만 신주(神主)를 모시고 그 윗대 조상은 10월 시제(時祭) 때 산소에서 제사를 지낸다. 조선 시대에 의정대신(議政大臣)들은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 새해 문안을 드리고, 전문(箋文)과 표리(表裏:거친 무명 또는 흰 명주)를 바치고 정전(正殿)의 뜰로 나가 조하(朝賀)를 올렸으며, 8도에서도 관찰사 병사(兵使) 수사(水使) 목사(牧使)는 전문과 방물(方物)을 바쳤다.
차례가 끝나면 웃어른께 새해 첫인사로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세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아이들이 입는 새 옷을 세장(歲粧)이라한다.
이날 대접하는 시절 음식을 세찬(歲饌)이라고 하며, 또한 이에 곁들인 술을 세주(歲酒)라 한다. 세찬으로는 떡국[餠湯]을 세주로는 초백주(椒栢酒) 도소주(屠蘇酒)가 나오는데, 떡국은 손님 대접에도 쓰고 제사에도 쓰므로, 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다. 이 도소주를 마시면 일 년 동안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도소주를 마실 때는 나이 적은 사람부터 마셨다고 한다. 또 시루떡[甑餠]을 쪄서 올려놓고 신에게 빌기도 하고, 삭망전(朔望奠)에 올리기도 한다.
한편 사돈집 사이에는 부인들이 근친하는 뜻으로 하녀를 서로 보내어 새해 문안을 드리는데, 이 하녀를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또한, 각 관아의 서예(胥隷:衙前과 종)와 각 영문(營門)의 교졸(校卒:장교,나졸) 등은 종이를 접어 이름을 쓴 명함을 상관이나 선생의 집에 들인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한 쟁반을 놓고 이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세함(歲銜)이라고 한다. 이날은 대문에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하여 문배를 많이 붙였다. 궁중에서는 한 길이 넘는 강포오모상(絳袍烏帽象)을 그려 중합문에 붙이고 종규가 귀신을 잡는 화상이나 귀두상을 그려 문에 붙였다. 일반 여염집에서는 삼재면법(三災免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남녀의 나이가 삼재(三災)를 당한 자는 3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였다.
또한, 벽에 닭과 호랑이 그림을 붙이고, 대문에는 용과 호랑이를, 닭은 칙간에 붙였는데 닭이 울면 귀신이 달아나기 때문에 귀신이 가장 많이 있다고 믿는 칙간, 즉 화장실에 붙인 것이다. 이런 문배를 붙이는 것은 질병을 물리치고 역신을 몰아내는 벽사(僻邪)의 의미가 있다. 설날 꼭두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로 1년간의 길흉을 점치는데, 이를 청참(聽讖)이라 한다.
또한, 나무에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던져서 자빠지고 엎어진 것을 보아 점괘를 얻어 새해의 신수를 점치는데, 이를 오행점(五行占)이라고 한다.
설날 저녁에는 원단소발(元旦燒髮)이라고 하여 남녀가 1년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 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저녁을 기다려 문밖에서 태움으로써 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속담에 나오는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 보고 발에 맞으면 곧 신고 가버린다. 그러면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하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모두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잔다. 그리고 체를 마루 벽이나 뜰에 걸어 둔다. 그러면 이 야광신이 와서 이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
정월의 첫 토끼날은 상묘일(上卯日)이라 한다. 이날은 남자가 먼저 일어나 대문을 열어야 한다. 남자가 특히 가장이 대문을 열어야 일 년 동안 대문으로 융성한 기운이 많이 들어와 집안이 번성한다고 믿었다. 이날은 남자가 대문을 열고 난 뒤 여자들이 방문을 열고 나와 일을 하였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명사라고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이렇게 하면 명이 길어진다고 믿었다. 또 이날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믿어 반드시 베틀에 올라 한 올의 실이라고 짜본다.
또 정월의 첫 원숭이날을 상신일(上辛日)이라 하여 왕은 친히 사직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리고 첫 쥐 날인 상자일(上子日)은 농부들이 쥐를 없애기 위하여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놀이라고 한다. 또 쥐 날 밤 자시에 방아를 찧으면 쥐가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이 밤중에 방아를 찧었다. 이날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정월의 첫째 돼지 날은 상해일(上亥日)이라고 하여 얼굴이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문지르면 살결이 희고 고와진다고 믿었다. 이날은 바느질도 하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는다. 바느질하면 손가락이 아리고 빗질을 하면 풍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궁중에서는 횃불을 들고 “돼지주둥이 지진다.”하며 돌아다녔으며 주머니를 해낭(亥囊), 자낭(子囊)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비단으로 만들며 해낭은 둥글게 자낭은 길게 만들었다 한다.
마지막으로 설날에서부터 열이튿날까지 12일 동안 일진에 의해서 유모일(有毛日:털 있는 날)과 무모일(無毛日:털 없는 날)로 나뉜다. 즉 12동물 중 털 있는 동물인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날은 털 있는 날 그리고 용, 뱀 날은 털 없는 날이 된다. 유모일은 길일이고 무모일은 불길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설날이 유모일에 해당하면 그해 풍년이 들고 무모일에 해당하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또 연휴를 끝내고 상점의 개점이나 새로 개업할 때도 유모일을 택하는데 특히 호랑이 날이 좋다고 한다.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서 유숙하지 않는다. 특히 7일은 인일(人日)이라 하여 이날은 더욱 금기시하였는데 이날 객이 집에 와서 자고 가면 그해 한 해는 불운하다고 믿어 손님 재우기를 굉장히 꺼렸다. 하지만 피치 못하게 자고 가야 할 사정이 생기면 주인과 객이 머리를 반대에 두고 거꾸로 자야만 그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설날부터 3일 동안은 길거리에 많은 남녀가 떠들썩하게 왕래하는데,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빛나며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에 안녕하시오'하고, '올해는 꼭 과거에 급제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등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또 『동국세시기』 원일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이렇게 남이 바라는 바를 말하는 일을 덕담(德談)이라고 한다.
설날의 놀이로서는 남녀가 방 안에서 다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한다. 이러한 풍속은 정월 달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은연자중하면서 일 년 계획을 잘 세우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달 초삼일까지 절이나 무당집에 들러 불공을 드리거나 기원을 한다. 이렇게 초삼일까지로 묵시적으로 정해진 것은 ㅂ자로 달과 관련된 풍속으로 초삼일까지는 달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음기의 상징인 달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간은 여자도 달과 같이 그 기간만큼은 바깥출입을 중지하고 몸을 단정히 하여 천신께 기원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봄철의 세시풍속은 정월에 집중되어 있지만 달마다 크건 작건 명절이 있어 계절의 마디로서 하나의 리듬을 준다. 정월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달이 계절의 첫 달일 뿐 아니라 한 해의 첫 시작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는 우주의 시작과도 같아 모든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특별 기간(신성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신성력(神聖力)으로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온갖 민속 행사가 행해진다. 섣달그믐에 수세·폭죽 등 불과 관련된 행사가 있듯이 대보름에도 쥐불놀이·횃불 놀이 등 불과 관련되고 소란스러운 놀이가 많다. 이는 과거의 시간을 소거시키기 위한 행사이다. 섣달 그믐날 묵은해를 소거시켜 새해를 맞이하는 한편, 대보름에는 이제까지의 특별한 기간에서 벗어나 일상의 상황을 찾기 위한 소거이다. 그래야만 일상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로 치면 봄철은 파종기이다. 정월에는 농사일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풍작을 비는 온갖 예축적인 행사가 벌어진다. 특히 대보름을 전후하여 보다 많은 행사가 있는 것은 보름의 만월과 풍요와의 관계 때문이다. 이렇게 풍농과 풍어를 예축하는 세시 행사를 치르고 나면, 2월에는 초경(初耕)을 하는 등 파종 준비를 하고 3월에 본격적인 파종이 시작되는 것이다.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수천 년 동안 민간에서 지켜 내려와서 관습화된 음력설을 말살하고자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예를 들면 떡방앗간을 섣달그믐 전 1주일 동안은 못 돌리게 하였고, 설날 아침 새벽 세배 다니는 사람이 특히 흰옷을 입었을 때는 양력설에 세배 안 가고, 또 무색옷을 안 입는다 해서 검은 물이 든 물총을 쏘아 흰옷에 검은 물이 얼룩지게 하는 등 갖가지 박해를 가하였다.
Ⅲ. 설빔과 세찬
(1) 설빔
설에 입는 옷을 ‘설빔’ 또는 ‘세장(歲粧)’이라고 한다. 한 해를 맞이하는 새날 아침에 고운 설빔을 입고 조상과 이웃에게 새해 인사를 한다. 묵은해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일들은 떨쳐버리고 새해에는 일 년 동안 무사하고 길운(吉運)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새로운 각오와 새 마음을 함께 담고 있다. 설빔은 나이와 처신에 맞게 마련하였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이들은 가문의 희망이요, 미래의 자산(資産)이다. 부귀 권세를 가진 집안의 남아(男兒)는 머리에 검정색 복건에, 옷은 바지와 저고리에 두루마기나 전복을 입히고, 버선에 신까지 곁들이기도 하였다. 두루마기도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색을 넣은 오방장(五方丈) 두루마기나 색동을 넣은 색동두루마기를 입으면 최상의 치레였다. 여아(女兒) 치레로는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가 상징이었다. 여아들은 종종머리에 뱃씨를 넣어 땋고, 머리에 굴레를 씌워 방한과 예절을 갖추기도 하였다. 이것은 대개 돌 때 마련되는 ‘돌치레’와 같다. 아이들은 가장 고운 색과 옷감으로 머리에서 발에 신는 것까지 이 세상 모든 아름답고 고운 것들, 또 좋은 것[祥瑞]들을 담은 색들로 곱게 꾸며 주려고 하였다.
특히 아이들 설빔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고운 색을 낼 수 있는 것 중에서도 곱고 밝고 맑은 것들로 하였다.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소매는 색색이 고운 색을 넣어 만들었다. 저고리 색은 백·옥·분홍·연두·갈·두록 등 여러 가지가 쓰였으며, 바지는 흰색이나 두록 등이 많았다. 색은 특히 그들이 그렇게 곱고 밝게 앞길이 트이고 출세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옷감은 반가(班家)에서는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하고, 일반 가정에서는 명주로 하였다. 고운 색이 없고 비단이나 명주를 마련할 수 없는 집에서는 무명에 긴 홍색 옷고름을 달아 가슴 한 바퀴를 돌려 매었다. 고름을 길게 한 것을 ‘돌띠’라고 하였다. 돌띠는 반드시 붉은색으로 하였다. 붉은색으로 하는 것은 “관(官)발 잘 받으라는 이치”라 한다. 자라서 당상관(堂上官) 같은 높은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함에서였다. 돌띠는 홍색 대신 청색을 달기도 하였다. 이는 “혼인발 잘 받으라는 이치였다.” 한다.
버선은 도톰하게 솜을 넣은 솜버선을 신겼다. 버선도 여유 있고 재간 있는 집에서는 누비고 수(繡)를 놓은 타래버선을 마련하였다. 타래버선 코에는 반드시 붉은색실로 상모는 달았다. 이도 부귀영화를 염원하고, 한편 사악한 것의 접근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버선목에는 청색이나 홍색으로 끈을 달았다. 이것도 ‘관발’과 ‘혼인발’의 염원을 담고 있다. 아이들 옷에 붉은색은 특히 미래를 예비하는 소망의 색이었다. 그래서 특히, 두루마기나 저고리에는 고운 색이나 붉은색을 썼다. 붉은색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벼슬에 오르기를 염원한 사람들의 멋과 소담한 소망을 담은 표현 수단이었다. 또한, 희망과 번창과 건강 및 벽사를 상징하는 색이다.
특히, 임금이나 왕비 등 나라의 가장 웃어른들의 옷에는 매일 입는 상복(常服)에도 쓰였으며, 관리들에게는 관복이나 특별한 행사에만 허용되었다. 남자 어른들 중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가진 자들도 관복(官服)을 벗었을 때는 통상예복인 도포(道袍)를 입을 때에나 홍색 띠[細條帶]를 맬 때 한하였다. 처녀들도 주로 홍색 치마에 노랑저고리가 상징이었다. 땋은 머리에 붉은 비단에 금박(金箔)을 박은 제비부리댕기를 드리면 더 이상의 치레는 없었다. 총각들도 반가(班家)에서는 복건을 쓰고 바지저고리에 시대에 따른 포(袍)를 입었다. 머리에는 1895년 단발령(斷髮令) 이전에는 처녀들처럼 댕기를 드렸는데 끝이 네모난 검정색 댕기를 드렸다.
일반 가정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어른들에게 묵은세배를 올렸다. 이때 제수(祭需)로 쓸 음식을 마련하고 남은 음식과 함께 설빔을 마련하여 드렸다. 설빔 거리로 형편이 좋으면 옷 일습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버선이라도 마련했다. 이 설빔은 받은 자리에서 입어 보시도록 하여 잘 맞는지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어르신들의 체중을 가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버선을 신을 때 발에 쑥 쉽게 들어가면 자식들은 미안해 했다. 그만큼 살이 빠졌기 때문이다.
설빔을 입고 음식을 들면서 한 해를 무사히 잘 지냈음을 감사히 여기고, 새해에 더 좋은 길운이 있기를 바라는 덕담(德談)을 곁들여 주었다. 돌아가신 분의 상청(喪廳)이 마련된 경우도 설빔을 지어 올렸다. 새 옷을 만들어 올리고 음식을 올려 묵은세배를 올렸다. 어른들은 여유가 있으면 남자들은 바지저고리에 명주로 만든 포를 입었다. 특히 아이들을 거느리고 첩첩이 어른을 공경하는 효(孝)를 삶의 바탕으로 했던 여자들은 자기 자신을 치장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평소에 입던 옷을 깨끗이 하여 입는 정도였다. 겨울이기 때문에 웃어른 것으로 명주(明紬) 옷감에 솜을 넣은 솜바지나 솜저고리를 마련하고 거기다 도포나 창의에 토시[吐手]와 방한모를, 1890년대 의제개혁(衣制改革) 이후에는 두루마기를 마련하면 최상이었다. 나라의 웃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서도 전날 올리면 입어 본 후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칭송하고, 한 해 동안 무사함을 자축하면서 왕실과 온 나라 백성의 무사태평을 기원했다. 왕실에서도 설빔 마련은 민간과 다르지 않았다. 특수한 대례(大禮) 때와는 다르지만 역시 평상시와는 달리 각기 신분에 맞게 갖추었다. 일 년 중 성장은 탄일(誕日)과 정조(正朝), 즉 정월 초하룻날 의복이다. 조선 말기 헌종의 후궁 첩초(帖草)에 의하면 비빈(妃嬪)들이 정초 문안례(問安禮)를 올릴 때는 소례복 차림을 했다. 이때 머리는 칠보로 장식한 큰머리를 하고, 옷은 비단의 초록 직금(織錦) 당(唐)저고리에 다홍색 스란치마를 입었다. 속에는 남색 스란 웃치마를 받쳐 입었다. 당의 고름에는 삼작(三作)노리개를 차고, 머리는 큰머리 칠보(七寶)를 하고, 허리춤에는 주머니로 ‘진주낭자’를 차고, 금반지를 끼었다.
궁(宮)에서는 위아래 법도가 엄격하여 아무리 한서(寒暑)를 느끼는 개인차가 있더라도 마음대로 먼저 계절복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 절기가 바뀌는 날에 웃전에서 시작해 아랫사람들도 갈아입었다. 또한, 색도 금기하는 것과 금하는 것이 있었다. 금했던 색 중에서 황(黃)이나 자(紫)는 고종(高宗)황제 등극 이전에는 황제의 색이라 금했다. 금기했던 색은 흰색과 검은 것으로 이는 상복(喪服)에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녀들의 옷은 보통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이다. 색은 같지만, 품계에 따라서 달리하였는데, 저고리는 반회장이나 삼회장으로 하였다. 다만 비빈이나 왕녀(王女)들의 옷 색깔이 백색이나 흑색 그리고 회장을 달지 않은 옥색 저고리는 금물이었다. 이 색은 궁에서 금기 색이었기 때문이다. 치마폭이나 길이도 민간보다는 넓고 길었다. 궁녀 중에서도 어린 생각시들은 노랑저고리에 다홍이나 분홍치마를 입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입는 옷으로 40세 미만의 상궁내인(尙宮內人)들은 연두 삼회장저고리에 남색 치마였으며, 60세 이상은 평상시와 다름없는데 반회장에 끝동은 남색으로 했다.
(2) 설날의 음식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 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 덩어리씩 떼서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 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춧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 때에 제물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떡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의 둥근 것을 상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술을 마시는데. 『경도잡지』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원문 번역
임자년(1732) 영조 8 1월 2일(경신) 맑고 바람 없음. 아침에 사당에 배알하였다. 여수 형이 와서 자기가 운약雲若【김익명金翼溟의 자】의 시에 차운한 시를 외었다. 나도 차운하였다. 선성께서 후생을 두려워하라 하셨으니 先聖猶言畏後生 자네 같은 젊은이를 감히 어찌 경시하랴 似君年少敢相輕 앞날의 뜻과 사업 널찍하게 열어젖혀 前頭志業須恢拓 종문을 부지하고 명성을 크게 하리니 扶得宗門大厥聲 또 지었다. 새해 들어 흰 머리가 몇 가닥이 난 것인가 新年白髮幾莖生 늙어가니 날아오를 뜻이 점점 가벼워지네 暮景飛騰意漸輕 하지만 자네들과 한가한 날 틈을 내어 但共諸君偸暇日 귓가엔 오래오래 노랫소리 들을 걸세 耳邊長聽詠歌聲 류위로柳渭老 형이 지나다가 방문했다. 여자리 형님[如自里兄侍]이 임당林塘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셨다. 밤에 또 운곡으로 이호 형을 방문했다. 모인 사람이 수십 인이었다. 쇠머리를 굽고 촌 막걸리를 주고받았는데 김윤중과 류이창柳以昌이 주관했고 김여집金汝楫이 보조했다. 또 선여善餘와 좌중에 노래 잘하는 사람을 시켜 서로 화답하면서 노래하게 했는데 족히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릴 만했다. 다만 이틀 밤 모임이 외잡함을 면치 못하고 종종 광대짓이나 음설한 말을 섞었으면서 우아한 논의나 고상한 흥치가 없었으니 이는 흠결이다.
관련 멀티미디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날짜
장소
멀티미디어
1
사족의 필수교양, 활
1592-11-20
경상북도 안동시
2
변방에도 추석 보름달은 뜬다
1787-07-28
양강도 갑산군
3
서리들의 새해 선물 달력
1802-12-27
경상북도 구미시
4
호계서원의 간사한 간사(間使)
1825-11-28
경상북도 구미시
5
정과 예를 나누는 세밑선물
1825-12-15
경상북도 구미시
6
선물 받은 소고기를 먹고 탈나다
1826-08-08
경상북도 구미시
7
손님에게 돈 요구하는 회연서원의 풍속
1827-02-27
경상북도 성주군
8
설날에 나이 듦을 노래하다
1732-01-01
경상북도 안동시
9
선물 받는 예의, 안 받는 예의
1740-11-07
전라남도 광양시
10
소수서원에서 명현들을 알현하며 서원의 폐단을 생각하다
1739-08-07
경상북도 영주시
11
도산서원 원장이 다른 서원의 원장을 겸임하는 문제가 논의되...
1739-12-22
경상북도 영주시
12
설날 과음하다
1615-01-01
경상북도 안동시
13
퇴계의 제자를 배식하다
1620-11-02
경상북도 안동시
14
선비의 선물 - 붓과 먹을 보내다
1603-07-21
경상북도 안동시
15
산 속의 연포회 - 따끈한 두부탕과 술, 그리고 벗이 읊조...
1603-09-28
경상북도 안동시
16
대보름달을 보며 흉년과 풍년을 점치다
1625-01-15
경상북도 예천군
17
병중에 마음 달래려 두 시인의 시를 읊다
1625-11-20
경상북도 예천군
18
제마수의 예에 참석하다
1626-06-12
경상북도 예천군
19
벗들과 뱃놀이하며 시를 읊다
1626-08-07
경상북도 예천군
20
다섯자 시를 노래하며 해질녘 길을 가노라
1622-03-09
경상북도 안동시
21
45세의 김령, 세밑에 한 발짝만큼의 발전을 다짐하다
1622-12-30
경상북도 안동시
22
취기에 오른 언덕, 바위의 푸른 이끼 사이로 아버지가 새긴...
1619-09-05
경상북도 안동시
23
여행길 추위와 배고픔을 한줄 시로 달래다
1605-11-22
강원도 회양군, 함경북도 ...
닫기
출전정보
출전정보가 없습니다.
저자정보
저자미상
저자정보가 없습니다.
원문보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