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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1604년 3월 8일, 김령은 아침에 도솔원으로 가는데 2리 쯤 못 미쳐서 의정(義精)을 만나 잠시 냇가에서 대화했다.
오시에 5대조(五代祖) 전직공(殿直公)의 묘소에 배소했다. 그런데 들불이 확산되어 신령(神靈)을 놀라게 해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고조(高祖) 음성공(陰城公)의 묘소는 겨우 불길을 면했는데, 불길과 묘역은 단 몇 자 간격일 뿐이었다.
묘소가 먼 곳에 있어서 지킬 수도 없고, 벌초도 하지 못해 잡초에 덮여 있는 것이 자못 심하니 자손 된 자로서 마음이 아프다.
저녁에 주촌(周村)에 당도하여 다시 의정(義精)을 만나보고 밤에 집에 오니 거의 삼경(三更)이 다 되었다.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정보·용보와 함께 길을 떠나 참(墋)의 집에 들러서 술잔을 나누었다. 참과 권축도 모두 따라왔다. 탑대(塔臺)를 지나니 봄빛이 좋은데 솔숲은 우거지고 들판에 시냇물은 흐르며 꽃이 피고 버들은 늘어지고 배꽃과 살구꽃이 피었다. 양장촌(羊塲村)에서 시를 한 수 지어 읊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아름다운 곳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곳곳에 산꽃은 계곡을 끼고 피어 있고 송담(松潭)도 좋고 반석(盤石)도 좋은데 시냇물은 돌을 울리며 흐른다. 시냇가에 이르러 낮잠[攤飯]을 조금 잤다. 중대(中臺)에 이르니 유곡(酉谷)과는 이십 리 거리이고 두 산이 계곡을 끼고 솟아 쉴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0년 윤 3월 9일, 새벽에 일어나 시 두 수를 지어 읊었다. 산불이 조금 수그러들었는지 연기가 걷힌 것 같다.
1617년 3월 19일, 아침에 류청지(柳淸之) 군이 술을 가지고 왔다. 계화는 숙취로 괴로워하여 마시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자첨·이지와 회정(回程)에 나섰다. 계화와 여러분들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 백사장까지 나와 전송했다.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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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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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풍속, 화제
시기 : 1604-03-08 ~ 1617-03-1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의정, 정보, 용보, 참, 권축, 류청지, 계화, 자첨, 이지, 서고모, 묘연, 평보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산불과 소방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소방기관은 조선시대 세종대왕(1426년) 재위 당시 설치한 금화도감(禁火都監)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한성(서울)에 큰 화재가 두 번이나 발생해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타고 남자 9명과 여자 23명(어린아이와 병자 등을 제외)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에 세종이 내놓은 종합 화재방지 대책이 바로 금화도감이다. 금화도감에 소속돼 불을 끄는 일을 하던 이들을 ‘금화군’이라 불렀으며, 금화군은 군인이나 공노비로 구성됐고 우물에서 물을 긷고 나르던 노비가 이들을 도왔다. 세조 때 ‘멸화군’(滅火軍)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소방법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그 골격을 갖추었으며, 1417년 태종 17년에는 명나라의 법률을 사용해 실화자와 방화자에 대한 형벌을 정하고 시행하였다. 실화로 자기 집을 태운 자는 곤장 50대, 방화로 자기 집을 태운 자는 곤장 100대를 때렸다. 또 인명에 해를 입힌 자는 곤장 100대를, 관·민가를 태운 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추방하도록 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갑진년(1604, 선조37) 3월 8일 맑음. 아침에 도솔원으로 가는데 2리 쯤 못 미쳐서 의정(義精)을 만나 잠시 냇가에서 대화했다. 오시에 5대조(五代祖) 전직공(殿直公)의 묘소에 배소했는데, 들불이 확산되어 신령(神靈)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고조(高祖) 음성공(陰城公)의 묘소는 겨우 불길을 면했는데, 불길이 미치지 못한 것이 묘역과 몇 자 거리였다. 묘소가 먼 곳에 있어서 지킬 수도 없고, 벌초도 하지 못하여 잡초에 덮여 있는 것이 자못 심하니 자손 된 자로서 마음이 어떻겠는가? 저녁에 주촌(周村)에 당도하여 다시 의정(義精)을 만나보고 밤에 집에 오니 거의 삼경(三更)이 다 되었다. 1608년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고 듣고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오후에 개울 중간에 있는 다리로 판사 형과 생원 형을 보러 갔다. 이지 형제와 이사안李士安이 다 모였다. 이지가 박중식朴仲植의 편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서울에서 김계도金繼道와 김시헌金時獻이 한림翰林 형(재종형 김해金垓)의 묘역이 상락공上洛公의 묘를 끼고 장사지냈기 때문에 모여 논의했는데, 날짜를 정하여 이장하도록 관아에 정장呈狀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또한 중간에서 제기한 자가 있었는데, 박중식의 의견으로는 김경건金景建을 지목했다. 나의 증조부曾祖父(김효로金孝盧)의 분묘는 상락공과 같은 언덕이지만 상락공의 분묘가 앞에 있으며, 상락공은 나의 증조부에게 7대 외조外祖가 된다. 이러한 사적은 퇴도 선생이 지은 묘갈문에 갖추어져 있다. 증조부를 장례 지낸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지만 해마다 절일節日에는 제물을 갖추어 상락공에게 먼저 제사를 지냈다. 상락공의 비석은 세월이 오래되어 쓰러져 허물어졌다. 지난 임인년(1602)에 감사 이시발李時發에게 말했더니, 이시발도 상락공의 외손 갈래이기에 협력하여 비석을 고쳐 세웠다. 상락공의 후손이 비록 많지만 각각 다른 곳에 거주하고, 아득히 멀어 서로 소식을 듣지 못하고, 묘소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세간에 현달한 자가 많아도 묘소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돌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지난 신묘년(1591) 가을에 경차관敬差官 김방金昉 공이 선친을 방문했을 때, 김공이 상락공의 후손이기 때문에 선친께서 분묘가 있는 장소를 말해 주었더니, 김공이 매우 기뻐하며 묘소에 성묘하고 탄식하면서 간 적이 있었다. 한림 형의 장례는 난리 뒤였고, 묘가 상락공의 묘 앞에 있어도 함부로 따지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지금 이와 같이 하니, 염려된다. 1610년 윤3월 8일 맑음. 정보·용보와 함께 길을 떠나 김참의 집에 들러서 술잔을 나누었는데, 김참과 권축도 모두 따라왔다. 탑대塔臺를 지나니 봄빛이 좋은데 솔숲은 우거지고 들판에 시냇물은 흐르며 꽃이 피고 버들은 늘어지고 배꽃과 살구꽃이 피었다. 양장촌羊塲村에서 시를 한 수 지어 읊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아름다운 곳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곳곳에 산꽃은 계곡을 끼고 피어 있고 송담松潭도 좋고 반석盤石도 좋은데 시냇물은 돌을 울리며 흐른다. 시냇가에 이르러 낮잠을 조금 잤다. 중대中臺에 이르니 유곡酉谷과는 20리 거리이고 두 산이 계곡을 끼고 솟아 쉴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하였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하였다. 1610년 윤3월 9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시 두 수를 지어 읊었다. 산불이 조금 수그러들었는지 연기가 걷힌 것 같다. 남쪽이 멀리 바라다 보였다. 죽을 끓여서 먹고 드디어 몇 리쯤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니 매우 장쾌하였다. 다만 산불이 또 일어나서 연기가 남쪽을 막아서 조망하기에 그리 좋지 않았다. 한참동안 산을 한 바퀴 돌고는 걸어 내려왔다. 산의 모습이 육중하고 돌이 많으며, 초목으로는 당귀와 황백이 자란다. 산길이 위험하고 가팔라서 겨우 앉은걸음으로 내려왔다. 축서사鷲栖寺에 이르니 금당金堂과 석불이 있는데 절은 낡고 중은 우둔하였다. 오후에 내려오는데 버드나무가 늘어진 시냇가와 소나무가 우거진 계곡이 그림과 같았다. 저녁때 호골산虎骨山을 넘어 시냇가에 이르러 술을 한 잔 마셨다. 용보의 집에 갔다가 달빛을 타고 취하여 돌아왔다. 1617년 3월 19일 맑음. 아침에 류청지柳淸之 군이 술을 가지고 왔다. 계화는 숙취로 괴로워하여 마시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자첨·이지와 회정回程에 나섰다. 계화와 여러분들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 백사장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마감麻甘의 5대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하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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