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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길을 잃고, 바다를 표류하던 사신의 행방
1621년 4월 7일, 김령은 여진족의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건주위(建州衛)
에 있던 여진(女眞)의 군대는 그해 3월 14일에
심양(瀋陽)
을 함락시키고, 요동(遼東)도 함락시켰다. 명나라 총병(摠兵) 하세현(賀世賢)이 내통하여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원경략(元經略)은 겨우 도망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화를 냈다. 조선의 사신 이필영(李必榮)·류간(柳澗) 등은 모두 포로로 잡혔으며, 박이서(朴彛叙)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요양이 함락되어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육로가 끊어졌으므로, 바닷길로 나오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안동 부사 박로는 그의 아버지 박이서를 찾아보기 위해 서울로 갈 계획을 세웠다.
천사(天使 : 명나라 사신)가 닷새 후(1621년 4월 12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오랑캐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조선에서 고의로 지연시켜서 일찍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면서 성을 내었다. 그는 통사(通事 : 통역)를 매질하고는 바닷길로 가서 반명(反命)할 것이라고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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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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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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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외교 분쟁
시기 : 1621-04-07 ~ 1621-04-1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허난성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박이서, 박로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17세기 초 청나라(여진족)의 흥기 현황
16~17세기는 동아시아 질서변동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동아시아 국제전쟁에 해당하는 壬辰倭亂 이외에 後金의 건국이라는 변화가 있었다. 후금의 건국은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해 나가면서 진행되었는데 그 부족 연합 특징 중의 하나는 누루하치 등이 두만강 변의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키워나갔음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明代 두만강 유역은 미개한 지역이 아니라 엄청난 수의 여진이 부락이 형성되어 농업 생산성을 높여 인구수와 부락수가 증가하고 생산력을 기초로 군사력을 키워가던 여진의 또 다른 중심 지역이었다. 두만강 변경 지역은 누르하치가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 진출해야할 그리고 그 지역의 여진을 통합해야 후금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여진을 통제하기 위하여 변시를 개설하고 여진과의 공식적인 교역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의도와는 달리 명과의 교역권을 따내기 위한 여진부족들 간의 경쟁을 치열해 졌고, 강대한 여진부족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여진족의 힘을 강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막강하게 성장한 것이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명과의 변시교역을 기회로 더욱 세력을 확대하여 건주여진 부족을 복속시켜 나가는 한편 명과의 정치 경제적 유대관계를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명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한 1608년까지 누르하치는 명의 관직을 그대로 보유하였다. 1589년 그는 납치된 한인을 구출하여 명에게 돌려주었고 그에 대한 댓가로 도지휘(都指揮)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이듬해에는 건주여진을 대표하여 북경에 입조했다. 명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누르하치의 노력은 일본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원병 파견을 제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593년 누르하치는 북경에 보낸 건주여진의 조공단을 통해 “우리 [건주]의 땅은 조선과 서로 연접해 있다.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에게 이미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라고 하며 정예병을 파견하여 “왜군을 정벌하여 황조(皇朝)에 공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제안은 “교활한 오랑캐의 흉악한 속임수”라는 조선의 반발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명은 누르하치의 조선 파병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함을 하사하는 것으로 그의 충성심에 답례했다. 누르하치가 정말로 왜군의 침입이 건주여진에까지 미칠 것으로 예상했는지, 당시 건주여진이 조선에 원병을 파견할만한 실질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그의 원병파견 제안은 무엇보다 조선이 아닌 명을 겨냥한 외교적 제스처였다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비록 내부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는 하였으나 명의 권위에 도전할 만큼 성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파병제안을 조선이 아닌 명에게 먼저 타진했다는 것은 “당시 명의 질서 아래서 조공국 사이의 직접 교통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누르하치가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질서를 준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593년, 요동에서는 아직 명의 지배와 권위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명의 보호와 후원 하에 누르하치는 요동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해갔다. 1589년 건주여진의 통일을 완성한 그는 1603년 퍼알라에서 허투알라(赫圖阿拉 Hetu Ala, 후에 興京)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인근 부족에 대한 정복과 세력 확장에 나섰다. 누르하치 세력의 팽창은 인근의 여진 및 몽고부족들의 경계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593년 후룬 4부, 코르친 몽골, 그리고 장백산 일대의 소수부족이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여진-몽골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오히려 요동에서의 패권을 장악해갔다. 무력을 이용한 복속과 혼인관계를 통한 연합으로 세력을 강화한 누르하치는 후룬 4부를 하나씩 정복해갔다. 하다는 1599년~1601년, 호이파는 1607년, 우라는 1613년, 마지막으로 여허는 1619년에 누르하치에게 정복되었다. 누르하치는 요동에 있는 몽골 세력과도 연합해갔다. 1593년 코르친부(科爾沁 Korchin)와 일련의 혼인을 통해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차하르 몽골과의 대립에 대비했다. 또한 칼카부(喀爾喀 Khalkha)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명으로부터의 위협에 준비했다. 1607년 칼카의 일부 소부족들이 누르하치에게 위대한 칸(sure kündelen khan)이라는 칭호를 바치기에 이르렀다. 명과의 변시 무역은 건주여진을 통합시키고 누르하치를 요동의 패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계속된 팽창은 결국 건주여진의 대명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단계로 몰고 갔다. 요동 변경지역에서 반유목사회와 정주사회와의 정치적 예속관계가 상당히 느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팽창한 경제적 교류를 유지하는데 예속관계가 장애가 되기 시작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이 여진을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팽창하는 여진의 지도자로서 건주위를 총괄하는 명의 관리라는 지위가 그의 목표로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명의 요동질서에 반기를 들고 이 과정에서 조선과도 충돌하게 된 것은 단순히 명에 예속된 야인지도자라는 불명예를 벗어버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명이라는 정주사회와의 오랜 접촉으로 건주여진이라는 반유목사회는 더 이상 명의 지방권력으로 남아있을 수 없을 만큼 팽창했고 이제 건주여진은 경제적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명에 대한 예속이라는 정치적 외피를 벗어버려야 했다.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요동에서의 위치를 확보해가기 시작한 누르하치는 이제 본격적으로 건주여진의 독립적 지위를 대외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건주여진의 높아진 위상을 확인하는데 가장 적절한 대상은 바로 조선이었다. 1595년 그는 명을 통하지 않고 조선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가 만포첨사를 통해 조선조정에 보낸 글의 내용은 두 국경의 백성들로 하여금 침범하여 서로 피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조선-건주여진간의 직접 접촉은 명이 엄금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여진인의 월경문제를 논하기 위해 조선인 역관 河世國이 퍼알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누르하치는 상호간의 문서 교통[通書]를 제안하는 등, 명을 거치지 않은 직접 왕래를 시도했다. 이후 신충일(申忠一)이 방문했을 때에도 누르하치의 주요 관심사는 조선의 직첩을 제수받고 국교를 체결하는 문제였다. 신충일은 누르하치가 조선의 관직을 얻고자 하는 것은 “상국(上國-明)이나 우리와 우호를 맺고 있다는 것을 호인(胡人)에게 과시하여 모든 부락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는 그 이상의 의도가 있었다. 비록 명의 질서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조선과의 관계에서부터 건주여진의 독립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의 독립적 지위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 역시 조선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1596년 누르하치는 조선에 ‘여직국건주위관속이인지주(女直國建州衛管束夷人之主)’로 자칭하는 문서를 보내었다. 조선에 보내는 글에서 스스로를 건주위의 주인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당시 누르하치가 공식적으로 명의 권위에 복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1605년, 누르하치는 조선에 ‘건주등처지방국왕동(建州等處地方國王佟)’으로 시작하는 국서를 보내었다. 여기에서 누르하치는 왕으로 자칭했을 뿐 아니라 건주위라는 명에 대한 예속을 드러내는 표현 대신 ‘건주등처(建州等處)‘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이제 그는 적어도 조선에 대해서는 당당한 지위를 주장할 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물론 누르하치가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1609년 조선변경에 거주하는 와르카(瓦爾客) 부의 사람들을 건주여진으로 송환하라는 누르하치의 요구는 조선이 아닌 명에게 전달되었고 조선 또한 명의 칙서를 받고 천 여戶의 와르카 부족을 누르하치에게 보내주었다. 아직까지도 누르하치는 명의 권위에 근거하여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건주여진의 계속된 성장과 압박으로 명은 요동 방어선을 서쪽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만력 초에 이성량은 병부시랑(兵部侍郞) 왕도곤(汪道昆)을 통해 요동 변장의 방어선을 동쪽으로 확장하여 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새로이 여섯 개의 보(堡)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이는 군사의 둔전지를 확보하고 건주여진을 방어할 목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다. 명 조정의 허락에 따라 이성량은 조선의 의주(義州)와 삭주(朔州)에서 20여리 떨어진 지역에 관전(寬甸) 일대에 고산보(孤山堡), 신전보(新甸堡), 관전보(寬甸堡), 대전보(大甸堡), 영전보(永甸堡), 장전보(長甸堡) 등 여섯 개의 보(堡)를 세우고 64,000여 호(戶)를 이주시켰다. 건주여진의 중요한 수렵지이자 채삼지를 개간하는 댓가로 이성량은 개간민에게 징수한 세금의 일부를 무상은(撫賞銀)의 명목으로 누르하치에게 지급하였고 관전과 영전에 마시를 열어 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05년에 이르러 이성량은 여섯 개 성보와 주변 개간지를 모두 포기하고 농민들도 모두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지역은 팽창하는 건주여진의 중심 세력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의 근거지에서 거리가 멀고 고립되어 방어가 어려웠기 때문에 병사들의 기피대상이기도 했다. 1605년에 이르러, 명은 이미 요동의 방어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성량이 관전 일대를 포기한 얼마 후 누르하치는 명의 요동관리들과 경계를 협상하기에 이르렀다. 1608년 누르하치는 광녕(廣寧)의 순무(巡撫)·총병(總兵), 요동(遼東)의 도원(道員)·부장(部將) 및 개원(開元)의 도원(道員)·참장(參將) 등과 만나 “두 나라(兩國)는 각자 변경을 지키며, 감히 불법으로 월경하는 자가 있으면 만주인, 한인을 막론하고 보는 즉시 사살하여 용서치 않는다. [관리가] 만약 보고도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죽이지 않은 자에게도 미칠 것이다.” 라고 약속하고 그 맹세를 석비에 새겼다. 석비의 건립은 백마를 죽여 하늘에 제를 올리는 예와 함께 이루어졌다. 청실록의 기사는 건주여진과 명의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 밝히지는 않았으나 석비를 연변(沿邊)의 여러 지역에 세웠다는 것으로 석비가 양자의 경계에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순안어사(巡按御史)로 요동에 파견된 웅정필(熊廷弼)의 보고서에 따르면 누르하치와 명의 요동관리들이 세운 석비에는 “너희는 중국(中國)이고 우리는 외국(外國)이다. 양가(兩家)가 일가(一家)와 마찬가지이니 두 대국(大國)이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누르하치는 또한 비문을 이문(夷文)으로 작성하고 반드시 요동의 부참장(副參將)이 와서 회맹에 참석해야 하며 이 석비를 개원(開原)에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석비의 건립과 비문의 내용은 17세기 초 요동 변경 일대가 누구의 땅으로 여겨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문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건주여진을 중국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나라로 명시함으로써 건주여진이 명과 대등한 관계이며 나아가 명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임을 암시했다. 황지영의 분석대로 “건주여진이 명과 대등한 입장에서 요동을 분점하고 있다는 것을 석비를 통해 대외에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1608년은 아직 후금이 건국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의 독립적 지위를 명조에게 공표하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석비를 한문이 아닌 여진문자로 새김으로써 누르하치는 “요동의 제세력에게 자신의 입지를 확인시키고자 했던 목적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아직 명조와 직접 경계를 협의하거나 석비를 한문으로 새겨서 건주여진의 요동 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 조정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요동의 방어와 통치를 담당하였던 요동아문에서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요동의 관리와 요동 변경지역의 거주민은 이미 이 곳을 누르하치와 건주여진의 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금(金)을 건국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하여 스스로 제위에 오름으로써 건주여진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누르하치는 요동변경의 실질적인 지배자에서 공식적인 지배자로 자신의 위치를 선언한 것이었다. 후금의 지도자로서 누르하치는 여진의 경작지와 교역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명의 권위에 도전하는 야인에게는 더 이상의 교역 기회란 주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명의 변시 폐쇄에 맞서 1618년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일곱가지 원한을 천명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1619년에는 철령(鐵嶺)과 개원(開原), 1620년에는 무순(撫順), 1621년에는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함락시키면서 후금은 명의 요동 요새를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후금의 선전포고에 대응하여 명은 대규모 토벌군을 준비하는 한편 조선에게도 원병 파견을 요구했다. ‘순이(順夷)’인 조선을 이용하여 ‘역이(逆夷)’인 후금을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1619년 조선이 파견한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은 조선 포수 5천명과 명과의 합동 공격에 나섰으나 대패하고 후금에 항복했다. 이 때 명군 역시 대패하였으니, 이것이 명청교체의 분수령이라 일컬어지는 사르후 전투였다. 사르후에서 명과의 일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누르하치는 명에 협조한 조선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원의 명을 패퇴시킨 후금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여전히 북방의 야인으로 여기고 있는 조선에 대해서 분명한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투항한 조선군의 부원수(副元帥) 정응정(鄭應井)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면서 누르하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너희 조선은 병사를 일으켜 明을 도왔으나 나는 그것이 너의 본심이 아니라 세에 몰려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명이 일찌기 왜란으로부터 너를 구한 적이 있으니 은혜를 갚으러 온 것뿐이었다. 〈중략〉 내가 듣건데 명의 황제는 그 아들들을 우리 만주와 너희 조선의 주인으로 삼아 우리 두 나라를 심히 욕보이려 한다. 지금 조선 왕의 뜻은, 우리 두 나라가 본래 원한맺은 것이 없으니 장차 나와 함께 명에게 복수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명을 도왔으니 앞으로도 명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그 뜻을 상세히 나에게 고하라.” 인조에게 보내는 국서 속의 누르하치는 더 이상 조선의 멸시를 감내하면서 휘하의 여진인들이 가죽이 벗겨지는 모욕을 당하는 것을 묵인해야하는 야인(野人) 부족장(部族長)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조선을 압박하며 노골적으로 자신과 명 가운데 한쪽을 선택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요동의 패권을 쥔 후금(後金)의 칸이었다. 누르하치의 압박에 몰린 조선은 수세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이 제안한 것은 각자의 영토를 지키고 이전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더 이상 우호적일 수 없었다. 후금과의 관계에서 명의 권위를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조선과 명에 대한 도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군사행동을 시작한 후금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란 더이상 불가능했다. 누르하치가 시작한 명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명청교체로 완결될 때까지 후금-명-조선의 삼각관계는 앞으로 더욱 착종될 운명이었다. 각자의 영토를 지키고 이전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자는 조선의 제안은 비록 불가능하기는 했으나 누르하치 역시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르후 전투를 전후로, 내부적으로는 요동의 여진 부족 통합을 완비하고 외부적으로는 중원의 명과 북방의 몽고와 대립하고 있던 누르하치에게 팽창하는 여진의 강역을 설정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1619년 당시 후금의 영토는 “동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로는 명과의 요동 경계에 이르며, 북으로는 몽고 코르친부족이 사는 난강(嫩江)에 미치고 남으로는 조선과의 국경과 만나는 곳”에 이르렀다. 그 범위 내의 거주민 가운데 “여진과 말이 통하는 무리는 모두 복속하여 통일시켰다.” 후금이 정복한 땅은 다름 아닌 명, 몽고, 조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고, 따라서 후금의 존립은 명, 몽고,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린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요동의 패권을 원하는 한, 중원의 명과 충돌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또한 명과 대립하는 한, 천조(天朝)에 대한 사대를 외교관계의 근간으로 여기는 조선과 대립하는 것 역시 불가피했다. 명-조선-여진의 중층적 복속관계에 기반한 요동의 평화는 후금의 등장으로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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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신유년(1621, 광해군13) 4월 7일 맑음. 밥을 먹은 뒤 두 손님은 돌아가고 덕여가 서원으로 가다가 잠시 들렀다. 들으니, 영월 어른이 고을의 도타운 요청 때문에 비로소 길을 나설 마음을 먹고 내일 풍기(豊基)에서 서원으로 온다고 한다. 영천(榮川)의 전간(全僴)이 내성에서 왔다. 들으니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군대가 지난달 14일에 심양(瀋陽)을 함락시키고 또 요동(遼東)도 함락시켰다고 한다. 대개 총병(摠兵) 하세현(賀世賢)이 내통하여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원 경략(元經略)은 겨우 도망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우리 사신 이필영(李必榮)·류간(柳澗) 등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고 하며, 박이서(朴彛叙)는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안동 부사 박로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보기 위해 서울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천사(天使 : 명나라 사신)가 이달 12일에 장차 서울에 다다를 예정인데 오는 길에 오랑캐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우리 나라에서 고의로 지연시켜서 일찍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면서 성을 내어 통사(通事 : 통역)를 매질하고는 바닷길로 가서 반명(反命)할 것이라고 한다. 七日 晴. 食後二客歸, 德輿徃院暫過. 聞寧越丈以鄕中敦請, 始有行意, 明日自豊基來院. 榮川全僴至自奈. 城聞建奴兵前月十四日, 陷瀋陽又陷遼東. 盖由摠兵賀世賢通謀引入也. 元經略僅得逃出, 天朝大震. 我國使臣李必榮柳澗皆云被虜, 朴彛叙不知消息. 安東府使朴竹魯爲其父爲西赴計. 天使今月旬二將抵王京, 道中聞奴音涕泣, 怒我國故爲遲延, 使不早返, 杖通事, 欲由海路反命. 4월 12일 비가 내렸다. 증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자개·이지·덕우·서숙·김참 등이 참석했다. 밥을 먹은 뒤에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얼마 있다가 비가 오던 날씨가 시원하게 개였다. 이지의 집에 새로 돋은 대나무가 간들간들 고와서 사랑스러웠다. 저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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