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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
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
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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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연행일기계본(燕行日記啓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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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기헌(李基憲)
주제 : 굶주린 백성을 보다
시기 : 1802-02-08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하북성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기헌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어양의 역사와 오늘날 북경의 탄생
이 이야기는 계주란 곳을 지나며 이기헌이 과거 이 지역의 영광을 되새기다가, 배고픈 백성들을 만나는 장면이다. 이 계주란 곳은 현재 북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 중 하나로, 과거부터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였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었는데, 본래 연나라였던 곳은 모두 6개 군으로 재편되었다. 오늘날의 북경 지역에는 이들 중 어양군, 우북평군, 상곡군, 광양군이 속한다. 이후 중국 역사상 수 차례 북방 민족이 중국대륙을 차지할 때마다 이 지역이 수도로 부상하였다. 한편 한나라 시기 팽총의 난이나, 당나라 시기 안록산의 난 역시 이곳을 대도로 삼았는데, 특히 안녹산은 낙양에서 황제를 칭한 이후 이곳으로 옮겨 수도를 정하기도 하였다. 안녹산과 더불어 난을 일으킨 사사명은 안녹산 사후 황제를 칭하고 이 지역의 명칭을 연경(燕京)이라 하였다. 이후 북경을 연경이라 칭하는 관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요나라 때에는 이곳이 남경이 되었고, 금나라 역시 요나라를 멸망 시킨 이후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았다. 이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중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원나라의 수도를 세웠다. 이후 명나라 때에는 처음 남경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이후 영락제때 다시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명나라가 원나라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도성이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다소 위치를 옮겨 새로운 대도성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 북경시의 중심지역이다. 청나라는 명나라가 만든 북경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현재 고고학 성과를 참조해보면 금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북경성은 모두 성벽을 인접하거나 혹은 서로 물리고 있을 정도로 인근에 세워졌다. 이처럼 어양 지역은 중국 역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곳이었다.
◆ 원문 번역
1802년 2월 8일 맑고 따뜻함. 새벽에 출발하여 40리 떨어져 있는 방균(邦均)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길을 가다 반산(盤山)을 지났는데, 강희(康熙)와 건륭(乾隆) 두 황제의 능이 여기에 있었고,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 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별궁이었다. 석양녘에 40리 떨어진 계주(薊州)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주는 지주(知州)와 주부(主簿)와 역승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 안에는 관부의 청사가 크고 화려하였으며, 인가가 조밀하여 통주(通州)와 백중세를 이룰 만하였다. 이곳은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는 어양군(漁陽郡)에 속했으며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에 유주(幽州)에 속했으며, 수나라 초기에 이곳에 현주(玄州)를 옮겨왔고 뒤에 다시 어양(漁陽)을 두었다가 당나라 때 옛날 계문관(薊門關)의 이름을 따서 계주를 두었다. 그러다 천보 연간에 어양군으로 고치고, 송나라 때 광주군(廣州郡)으로 고쳤으며 금나라 때는 중도로(中都路)에 소속시켰다가 계주가 되어 명나라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팽총(彭寵)과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모두 여기에서 일어난 것은 천하무적인 어양의 돌기병(突騎兵)에 기댄 것이었다. 성 북쪽에는 공동산(崆峒山)이 있는데, 바로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에게 도를 물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올 때 성 밖에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관부에서 매일 백성을 구휼하기 위하여 식량을 주는데 그 숫자가 500~600 전후로 소비하는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이날 80리를 갔다.
이미지
호병도(胡兵圖)
그래픽
귀국길의 사신단과 굶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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