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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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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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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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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조정의 동향
시기 : 1627-01-20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김광적, 김호, 이완, 최몽량, 한명련, 박난영, 강홍립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청나라의 흥기와 정묘호란 발발 배경
이 이야기는 김령이 정묘호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내용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오랑캐는 이후 청나라가 되는 만주족을 지칭한다. 이들은 본래 만주일대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으로,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과 명나라가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건주위여진의 추장이었던 누르하치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기민한 정치력으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 1616년에는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후 남만주 일대의 비옥한 통토를 두고 명나라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히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조선의 조정이 급격히 명나라로 다시 기울어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공공연히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자 후금은 조선이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고, 또한 조선과의 경제 교류가 차단되면서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의 발발이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묘년(1627, 인조 5) 1월 20일 흐리고 음산했다. 잠시 비가 왔다. 여희 숙질이 안동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감사가 산송山訟의 정문呈文에 있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사 김득연金得硏을 잡아들여 갓을 벗기고 칼[枷]을 씌었는데, 김 진사가 이에 말하기를, ‘알지 못하는 일이오.’라고 하자, 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듣던 대로다.’라고 했다. 이때 선전관宣傳官이 갑자기 말을 달려 당도하여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또 선천宣川에 들어왔다면서 감사에게 군마를 불러 모으게 하고, 호패어사 또한 머무르지 말고 급히 돌아가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듣고 나니 놀랍고 우려되는 마음 그지없다. 그 뒤에 들으니, 오랑캐가 13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를 포위했는데, 의주성이 매우 견고하였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의주 부윤 이완李莞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崔夢亮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 및 박난영朴蘭英 등은 모두 돌아왔고,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 중에 저들에게 투항한 자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姜弘立은 오랑캐 군중에 있었다고 하며,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처럼 침입했고, 또 안주安州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의 사항을 들어 우리나라에 죄를 물으면서 스스로 대금大金이라 칭했다고 한다. 들으니, 오랑캐의 이왕자二王子가 보낸 사자가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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