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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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