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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옷가지를 요청하는 불청객
1754년 5월 26일. 맑은 날씨였다. 어머니 환후는 다행히 어제보다 심해지지 않았다. 오늘 최흥원은 다소 황당한 손님을 만났다. 식전부터 종이 와서 한 과객이 최흥원을 뵙길 청한다는 것이었다. 인근 고을에서 최흥원과 교유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며 이름은 종들도 미리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처음 최흥원의 집에 들른 손님인 듯하였다. 이름을 알아 와라 종을 다시 보냈더니, 돌아온 종이 하는 말이 횡설수설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괴이하게 여긴 최흥원은 손님을 불러 맞이하였는데, 이 손님이란 자는 갓도 쓰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파주 고을에 사는 이가라고 소개하였는데, 어떤 연유로 최흥원을 찾아왔는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는 대뜸 옷가지를 좀 얻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최흥원은 불청객의 행사가 몹시 괴이쩍었지만, 혹 자신과 잘 아는 사람의 지인일지 몰라 천천히 이야기를 좀 들어보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기색을 보니, 참으로 드세고 패악한 부류였다. 최흥원이 최근 듣기에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부류들이 있다고 하던데, 이 자가 바로 그런 사람인 듯하였다. 사람으로서 자식 된 도리도 저버리고 떠돌아다니면서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한단 말인가. 그럴 것이면 차라리 머리를 깎고 산으로 가서 수행할 것이지, 행색은 거지같이 하면서 사람의 도리는 내팽개치는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이라 할 만했다.
최흥원은 이 파주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차마 그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정중한 말로 요청을 거절하고 손님을 돌려보냈다. 손님은 돌아가면서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불편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최흥원은 속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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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역중일기(曆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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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흥원(崔興遠)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54-05-26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최흥원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최흥원
◆ 조선시대 양반의 복장
조선시대의 복식은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으로 4분되는 조선왕조의 엄격한 신분제도의 영향을 받아 계층의 분화가 활발하였다. 복식제도는 엄격하게 제도화되어, 조선왕조 전기(성종 5년, 1474년)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복식의 규제에 대한 도전은 사치금지령으로 제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란과 실학사상(實學思想)의 대두, 유교윤리의 약화 등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 때는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해 전래된 목화의 재배와 더불어 사용된 목면(木綿)으로 그 이전보다 의생활이 다양해졌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품계에 따라 복잡한 복식제도를 이룬다. 남자는 다양한 형태의 포가 주류를 이뤘으며, 여자는 삼국시대의 긴 저고리를 거쳐 점점 짧아졌으며 손목을 덮으며 통수에 직 배래로 끝동이 있던 것이 둥근 배래로 변하고 있다. 직령에 목판깃이 좁아지면서 둥글어졌고 띠를 매던 것이 고름으로 변하여 가늘고 짧던 것이 넓이가 넓어지고 길어졌다. 이에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동이 없었다.
조선 중기, 후기의 임진, 병자 양란 후에 실학사상으로 말미암아 복식에도 실용성을 부여하게 되고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복식은 고유복식과 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그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1) 조선시대 복식의 특징
1. 조선시대 복식은 관복이건 사복이건 간에 전 시기에 걸쳐 그 구조에 있어 거의 변함이 없었다.
2. 조선시대 복식은 관복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전형적인 복식제도가 확립되었다. 관복의 경우는 전체 국민 중 극소수에 해당하는 관료계급에서 입었으나 복식자료와 유물이 비교적 풍부히 남아 있으며, 관료는 거의 모두가 남자였기 때문에 남성복이 발달하였고, 여성복은 단조로웠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순수 국산품이라 할 수 있는 두루마기 형태와 바지, 저고리를 입었다.
3. 이와 같이 상고시대부터 변함없이 우리의 기본 복식구조를 고집하여 온 것은 세계 복식사 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농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4. 병자호란 뒤에 중국에는 청나라가 들어서서 복식 제도를 청나라 제도로 개편하였으나 우리는 이와 상관없이 명나라 제도를 고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독립성을 나타내는 유력한 증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관제도를 통하여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자부심과 의관문물을 생명처럼 아끼는 하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5. 19세기 말 개화기에 이제까지 1천년 이상 우리 복식의 한 골격을 이루었던 중국에서 유래된 복식의 형태가 서양복식으로 대체되었다.
6. 조선왕조의 의복 중 특색 있는 것
1) 쓰개
▣너울 - 고려시대의 몽수(蒙首)에서 연유한 것. 조선시대 여성의 관모 중 국초부터 국말까지 궁중양식 또는 양반가양식으로 주로 상류계급에서 존속하여 왔다. 외출용으로 주로 많이 쓰였다.
▣장옷 - 장옷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던 것으로,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부녀자들도 착용하였다.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사회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없어졌다.
남성들이 쓰던 두루마기와 형태가 비슷하며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 동정 대신 넓은 흰 헝겊을 대어 이마 위 정수리에 닿도록 하였다. 앞에는 여미는 단추를 달았고 이중 고름을 양쪽에 달았다.
▣쓰개치마 - 쓰개치마는 양반계층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30cm정도 짧고 폭도 좁다. 개성지방에서는 '쓸치마'라고 하여, 특별히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고, 계절에 따라 겹이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천의·삿갓 - 하류층에서 주로 착용한 것으로 장옷을 자방에 따라서는 천의(薦衣)라고도 하였다. 주로 서북지방에서 방한용으로 쓰였으며 장옷보다 길이는 짧고 소매가 없다. 겉은 다홍색에 안을 연두색으로 넣어 솜을 두어 네모지게 만들었으며 '포대기' 또는 '두깽이'라고도 하였다.
삿갓은 쓰는 사람의 얼굴을 가릴 정도의 길이로 대오리를 끊어 8mm정도로 쪼개고 다듬은 꼭지부터 엮기 시작해서 끝으로 갈수록 점점 넓게 원추형으로 길게 엮으며 가장자리가 육각형이 되도록 곱게 도련을 만들고 안에는 미사리(둥근 테두리)를 넣어 머리에 고정시키도록 되어있다.
▣차액 - 일명 가리마라고도 하며 기녀(妓女), 의녀(醫女), 창녀(唱女)들 사이에서 유행되었던 쓰개의 일종이다. 형태는 사각 판을 머리에 얹은 듯한 수식으로 검은 비단이나 자색 비단을 반으로 접어 두 겹으로 한 후 다시 그 속을 두꺼운 종이로 붙여 빳빳하게 만들었다.
▣전모 - 하류층에서 쓰던 입의 형상을 가진 관모로 기름종이로 만들며 크기가 컸다. 형태는 갓과 비슷하며 대 테두리에 14 ~ 16개의 살을 대고 한지를 두 겹으로 바른 뒤에 풀을 발라 말리고, 표면에 예쁜 모양이나 수(壽), 복(福), 부(富)와 같은 길상을 상징하는 글자를 넣기도 하였다. 내외보다는 장식이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2) 장신구
▣노리개는 대금(띠돈), 다회(多會),주체(삼작 또는 단작), 매듭, 유소(술) 등 다섯 가지로 되어 있다. 띠돈은 가장 위에 위치한 고리로서 노리개를 고름에 걸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재료는 주로 금, 은, 백옥, 비취옥, 금패, 산호 등을 사용하였고, 형태는 정사각형,구형,원형,화형,나비형,사엽형 등이 있으며, 화문, 쌍희자문, 용문, 불로초문 등의 길상문양을 장식한 것들이 있었다.
여기서 삼작노리개라 함은 노리개 3개에다 청, 홍, 황 3색의 술을 달아 한 끈에 패용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다시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구분한다. 대삼작노리개는 가장 호화롭고 큰 것으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상류계급에서 패용하였으며, 소삼작, 노리개는 젊은 부녀자나 어린이들이 패용하였다.
▣향갑 - 여인들은 사향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어 은근한 향기가 풍기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이것을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향갑은 향을 담은 갑이며, 속에는 홍갑사를 한 겹 곱게 바르고 그 속에 향을 끼우게 되어 있으며, 갑의 겉은 금은, 비취, 산호, 옥, 마노, 밀화, 도금 등으로 각종 길상문을 투각하여 만들었다.
발향은 향과 약 가루를 섞어 만든 충향을 낭에 넣지 않고 그대로 패용한 것이며, 향의 모양에는 편복형, 사각형, 팔각형, 원형 등이 있어 편복형으로 된 것을 실에 꿴 것을 '박쥐향'이라 하였고, 그 향의 모양이 어떻든 금사에 꿴 것을 '금사향'이라 하였는데, 향을 홍, 백, 녹, 황 등 사색으로 하여 실에 꿰어 염주모양으로 만든 것을 '줄향'이라고 하며, 이것은 상궁이 궁중에서 치마 속에 찬 것이라고 한다.
▣검무복(劍舞服) - 검무는 민간에서 행해지다가 영조이후에 궁중에 들어왔다. 궁중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가면이 없어지고 여령에 의해 전승되었다. 전립을 쓰고 금향협수(金香挾袖) 위에 괘자를 입고 남색 전대를 띠었으며 양손에 무검을 들었다.
▣처용무의 복식 - 국말 처용무의 복식을 보면 사모를 쓰고 청·황·홍·백·흑색등 오방(五方)의 색으로 된 비단옷을 입고 천의, 길경, 상, 말군, 한삼, 대 , 화로 구성된 옷을 입었다.
▣학무의 복식 - 학무는 학이 연통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童女)가 나오는 춤으로, 학무의 발생연대는 고려대이고 조선조 성종때 크게 발전하여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성장하여 전해져 왔다.
(2) 남자복식
1. 왕의 예복
왕복(王服)은 대례(大禮),제복(祭服)에 속하는 것이 면류관, 곤복이고,조복에 속하는 것이 원유관, 강사포이고, 상복에 속하는 것이 익선관, 곤룡포이다.
이 밖에 국난을 당했을 때 전립에 융복을 착용하였고, 연거시에는 편복을 입었다. 그 제식은 성종 대에 완성을 본 「경국대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조복(朝服) - 왕의 '수배신조견지복(受陪臣朝見之服)'이라 하여 삭망(朔望 : 초하루와 보름)·조강(朝降)·진표(進表)·조견(朝見 : 신하가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배알함.)때에 착용하였다.
⊙원유관(遠旒冠) - 《국조오례의》서열 관복도설 원유관복에 나타난 원유관은 검정색 비단으로 만들고 9량(梁)이며 18개의 오색구슬이 앞 뒤에 9개가 부착되어 있다. 또한 금비녀를 꽂았으며, 황·창·백·주·흑의 오색구슬을 앞뒤 각 9옥씩 18개 장식하였고, 양쪽 가장자리에 두 줄의 붉은색 줄로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강사포(絳紗袍) - 강사포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것은 면복과 같은 시기인 공민왕 19년(1370년)이다. <국조오례의>에 보면 포는 붉은색 비단으로 만들고, 상도 붉은색 비단으로 만들며, 전3폭·후4폭으로 모양은 9장복의 상과 동일하다. 중단(中單)은 흰색 비단으로 만들며, 붉은색 깃에는 불문 11개를 그렸고, 도련과 수구에 붉은색 선이 있었다. 폐슬· 패옥 ·수· 말·석은 왕의 9장복과 동일하며, 차이점은 곤복에는 장문이 있으나 강사포에는 없다는 것이었고, 색에 있어서도 면복은 검정색이나 조복은 붉은색이라는 것이 달랐다.
▣상복(常服) - 왕이 평상시 집무 때 입는 의복(시무복)이다.
▣익선관(翼善冠), 곤룡포 - 익선관은 왕의 상복으로 평상 집무 때 입는 옷이다. 세종 26년 3월에 사은사 유수강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왕의 상복을 보면 익선관, 곤룡포로 기록되어 있다. 익선관은 복두에서 연유한 관모로, 관의 모양이 2단으로 턱이 지고 앞은 낮고 뒤는 높았으며, 뒤에는 매미 날개 모양의 작은 뿔 2개가 위쪽을 향해 달려 있다. 사모의 각은 땅을 가리키지만 익선관의 각은 하늘을 향하고 있어 왕과 신하를 구별하고 있다. 익선관은 복두를 모방하여 만든 관모로 탕건위에 썼다. 그리고 명사 <여복지>에 기록된 곤룡포를 보면 황제는 황색 포에 앞뒤와 양어깨에 용문을 직금 하였고 황태자는 색만 다른 홍색포였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친왕례에 따라 세종 조에서 조선말까지 홍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나 고종의 황제가 된 후에는 황색포를 입었다.
▣면복: 왕의 제복 및 대례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으로 구성된다 면류관은 위모관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관모로 주나라에서 유래된 것이다. 면류는 황제가 12류 12옥이고 황태자, 친왕은 9류 9옥이며 옥의 색채도 5채옥과 3채옥 등을 엮었다.
2. 양반 복장
▣사인복 : 사인복은 유관자 아닌, 반인 계급의 복식을 말한다.
▣남삼, 심의 : ‘남삼’은 단령에 선을 두른 형태로 상사의 복식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울러 생원, 진사, 찰방이 입었으며 앵삼과 같은 것으로 옥색 깃에 검은 선을 둘렀다. ‘심의’는 고대 중국 의 천자 ,제후의 평복이었고 사대부에게는 상복, 서인에게는 길복이었으며 유자의 법복이었다. 그 형태는 백포로 만들어 의 4폭상 12폭을 서로 연하여 둥근 소매, 모난 깃, 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 도련, 부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여기서는 치마폭의 12폭인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의의 재료는 세포(세마포), 명주를 썼으나 특수층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 옷에 매는 띠로 흰색에 검은 선을 2줄 둘렀으며 매는 방법은 동심결로 맨다.
▣양반 평상복(도포): 양반의 평상복 중에서 도포는 임진왜란 이후 문관들의 웃옷이었으며,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의 예복이었다. 도포라는 말은 1564년(명종 19)에 처음 등장했는데, 도복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다. 1884년(고종 21) 갑신의복개혁 때 폐지되었다가 1900년 다시 무관자(無官者)의 예복이 되었다. 의복은 깃이 곧고, 무가 달려 있으며 소매가 넓은 형태다. 옷의 뒷길은 무와 연결된 허리부터 뒷중심이 터져 있고, 그 위에 도포의 특징인 뒷자락이 하나 더 있어 말을 타거나 앉을 때 용이하다. 색상은 백색·옥색·자적색·녹색 등으로 다양하며, 그 중 백색 도포는 집에서 지내는 제사 때 제복으로 많이 입었다. 도포에는 가는 띠를 두르고 태사혜를 신었으며, 집에 있을 경우에는 관(冠)을, 나들이할 경우에는 갓을 착용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5월 26일 맑음. 어머니의 환후는 어제와 마찬가지다. 어떤 갓도 쓰지 않은 자가 자신이 파주坡州에 사는 이가라고 하면서 찾아와서 옷가지를 요청하였다. 그가 말하는 기색을 보니, 근래의 드세고 패악한 부류인 것 같았다. 시험 삼아 말하자면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부류인데, 사람의 자식이 된 자의 도리가 아니어서 나를 비워 요구를 들어주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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