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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의 길흉을 점치다
1764년 2월 14일. 맑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환후가 심해지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부쩍 음식 드시기를 싫어하시니, 애가 타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찾아왔는데, 이 사람은 평소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위하여 집터의 길흉을 점쳤는데, 관괘에서 비괘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다. 이 점괘는 대단히 불길한 것으로, 그간 집안에 많았던 좋지 않은 일이 집터로 인해 일어난 것 같았다. 최흥원은 집터가 매우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처를 옮겨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구에 있는 새 집터에 대한 점도 쳐 보았는데, 이 터에는 복괘가 진괘로 바뀌는 점괘였다. 꽤 길한 점괘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이곳에는 항진이가 새로 집을 지어 거처할 계획이었는데, 집터가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항진이는 얼마 전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는데, 아마 집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면 대과에도 급제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의 묘도 불길하다고 하여 이장을 하였는데, 이제 집터마저 기운이 좋지 않다고 하니 최흥원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내, 형제, 아들……. 귀중한 혈육들이 이 집에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큰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최흥원은 송도원의 점괘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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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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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역중일기(曆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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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흥원(崔興遠)
주제 : 점괘
시기 : 1764-02-1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대구광역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최흥원, 송도관, 최항진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최흥원
◆ 조선시대 점과 점쟁이
예로부터 무당을 궐 안에 두고 나라의 길흉을 예언케 하였으나 점쟁이는 예언자로 전문적 직업인으로 민간에 생겼다. 점을 치는 종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사의 존망을 점치는 사주점과 앞으로 닥칠 일을 점치는 운수점, 한 해의 운이 좋고 나쁨을 점치는 신수점, 단시점(斷時占), 멸액점(滅厄占), 절초점(折草占)따위가 있다. 또한 점을 치는 것으로는 태주가 하는 신점(神占)과 주로 여자 점쟁이가 쌀을 뿌려 점치는 쌀점, 동전을 던져서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산통점(算筒占), 역점(易占), 오행점(五行占), 육효점(六爻占), 팔괘(八卦占), 구궁점(九宮)따위가 있다.
옛날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 점쟁이에게 길흉을 물음)이요!” 하면서 점을 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다녔고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 쓴 깃발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들은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이름 짓기와 관상, 이름, 감정 따위를 보았으며 때때로 액운을 막기 위한 부적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中期) 때 민간에 보급된 대표적인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 저술)은 생년월일시를 숫자로 풀이해서 그 해의 운수를 달마다 보는 정초의 풍습이 되었다.
◆ 조선시대 맹인의 교육과 활동
고려시대부터 맹인들의 점을 치는 기술이나 방법이나 불경을 암송하는 등의 일을 전문적으로 국가에서 교육시켰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고 맹인들이 복술(卜術)과 독경(讀經)으로 양재기복(禳災祈福, 신에게 빌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하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이들의 복술은 당나라 때 원천강(袁天綱)의 육임과(六壬課, 골패 등을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방법)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점술법에 의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이후의 명경수(明鏡數)를 최고로 일컬어 왔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산통(산가지를 넣는 통)을 차고 다니며 청하는 집에 들어가 산가지(옛날에 수효를 셈할 때 쓰던 물건. 가는 대나 뼈 따위로 젓가락처럼 만듦.)로 괘를 만들어 길흉을 말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래로 맹인의 독경·주축을 관할하는 국가 관서로서 명통시(明通寺) 두고 이곳에 맹인을 불러 모아 기우(비 오기를 빔)행사를 집행시키고, 자주 사미(賜米, 나라에서 내리는 쌀)의 은전이 베풀어졌다. 명통시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5부(部)의 맹인들이 모여 한 차례씩 독경축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데,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지위가 높은 자는 채청에 올라가고 낮은 자는 문을 지키며, 여러 겹의 문에 창을 든 수위자를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명통시는 지금의 남산기슭 신당동 근처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뒤 맹청(盲廳)으로 이름을 바꿨다.
명통시의 맹인은 처음에는 삭발을 해서 맹승(盲僧) 또는 선사(禪師)로 불리었으나 불승과는 다르고 불교·도교·민간 신앙을 혼유한 존재였으므로 가뭄이 들면 기우하고 질병이 들면 기양(祈禳)하게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가 없는 대신 맹인들이 잡술 행사의 집행을 담당해 내려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맹인에게 점복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는 점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천명사상을 믿었고, 맹인에게 독경, 예언, 치병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2월 14일 맑음. 어머니는 특별히 더해진 증상이 비록 더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꽉 막히고 갈증이 나며 진지를 싫어하심은 한결같이 더 심해졌으니 애가 타고 두려운 마음 그지없다. 아침에 송도관이 나를 위하여 집터에 대하여 점을 쳤는데, 관괘觀卦가 비괘比卦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으니 아주 불길하였다. 이전의 일이 많이 증험된 것이다. 또 항진 이름으로 동구의 새 집터에 대하여 점을 쳤는데 복괘復卦가 진괘震卦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으니, 꽤나 길하여 거처할 만하였다. 그길로 사촌 통숙을 시켜 도장동道藏洞에 함께 가게 하였다. 몽선夢先이 석전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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