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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병 반진의 치료법
1707년 5월 1일. 요사이 유행성 반진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시작되어 서울까지 번졌다. 이 반진은 두창이랑 비슷하지만, 치료법은 매우 달랐다. 어떤 사람은 ‘두창은 서늘하게 해주고, 반진은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올해 유행하는 반진은 이전과는 또 달라서, 의원들이 치료법을 몰라 헤매다가 대부분 치료 시기를 놓치고는 뒤늦게 약성이 강한 약으로 병을 다스리게 되곤 했다.
지난번 송화현감 홍정보 어르신을 만났는데 반진의 치료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르신의 말로는 은둔한 군자 김유항이란 사람이 있는데, 반진을 치료하는 방법은 사람 몸에 올라온 열기를 경락에 따라 흩어주어야 하는데, 지금 모두 차가운 약으로 오히려 올라온 열을 내려가게 하니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열이 나면 물을 찾게 마련인데, 반진에 걸린 사람은 물을 찾지 않고, 열이 나는 사람은 혀가 타들어 가 검은 빛깔이어야 하는데 심한 경우라도 약간 누렇기만 하다. 따라서 열을 다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열을 적절히 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가운 약으로 반진을 다스리는 의원들을 저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그러나 엄경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엄경수가 그 사람을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말에 신빙성이 있는 듯하였으나 역시나 믿기가 어려웠다. 엄경수는 그의 말을 경청한 후, 자신의 의학지식으로 그 말을 반박하였다. 김유항 역시 엄경수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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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부재일기(孚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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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엄경수(嚴慶遂)
주제 : 반진 치료법
시기 : 1707-05-0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엄경수, 홍정보, 김유항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엄경수
◆ 조선시대 전염병, 임진왜란 후 전염병과 정부의 대책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발생한 역병은 1396년(태조 5) 3월에 발생한 전염병의 유행이다. 특히 “경축성역부 역려유행(京築城役夫 疫癘流行)”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도성을 쌓기 위하여 소집한 인부들에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전염병은 계속해서 크게 유행하여 주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크게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전염병의 유행과정을 훑어볼 때 질병사적 차원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을 적어 보면 우선 개별적인 질병에 따라 전염병의 발생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1434년(세종 16) 5월에 이르자 “경상우도선군 상한온역다(慶尙右道船軍 傷寒瘟疫多).”라 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발진티푸스 내지 장티푸스의 유행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전염병 유행에 대응하기 위하여 1525년(중종 20)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지어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즉, 많은 사람들이 간단하게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들을 수록해서 알리도록 힘썼다.
이것은 오늘날의 전염병 예방을 위한 보건교육사업과 유사한 것으로 비록 그 내용이 과학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또한 1550년(명종 5)에 이르자 말라리아가 크게 돌고 황달이 심해서 정부는 ≪황달학질치료방(黃疸瘧疾治療方)≫을 만들어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계속 전염병이 돌자 광해군 때에 이르러 새로운 ≪벽온방(辟瘟方)≫과 ≪벽온신방(辟瘟新方)≫이 발행되었으며, 효종 때에 이르자 또다시 ≪벽온신방(辟瘟新方)≫이 나오게 되었다.
그 뒤 1821년(순조 21) 8월에 이르자 평안도로부터 괴질이 퍼지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10여 년 동안 해마다 여름이 되면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염병의 발생에 즈음해서 많은 사람들은 우선 역귀 때문에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불교에 의한 인과응보설이나 유교적 배경에서 나온 운기불화설(運氣不和說)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유행은 귀신의 조화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전염병이 많이 돌 때는 여제(癘祭)를 드렸다. 실제로 이와 같은 여제에 쓰였던 제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의서를 보면 계절이나 기후의 변화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향약집성방≫ 제5권에 보면 절기가 고르지 못해서 추위와 더위가 심하거나 좋지 않을 경우에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는 기운이 생겨나고 이와 같은 기운이 전염병의 유행을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운기불화설에도 불구하고 ≪벽온방≫ 같은 책을 보면, 좋지 않은 역귀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하기 쉽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기후가 불순하고 귀신의 노여움이 있거나 많은 사람들이 원망을 품었을 때 전염병의 발생은 쉽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이벽온방≫에도 귀려(鬼癘)의 기운이 있어서 역병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상의 이론을 요약해보면 역귀나 운기부조화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예방법을 ≪벽온신방(辟瘟新方)≫에 따라 보면, 첫째로 온역양법(瘟疫禳法)이 나온다. 네 글자로 된 부적을 대문에 붉은 글씨로 좌우에 써붙이면 전염병을 물리치고 걸리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와 같은 글씨를 써서 가지고 다니거나 태워서 먹으면 좋다고도 되어 있다. 두 번째로는, 온역벽법(瘟疫辟法)으로서 사향소합원 같은 환약을 술에 타서 마시면 역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세번째로는, 역귀가 집안에 들어오려면 대문을 통해서 들어와야 하므로 큰 솥에 물을 끓여서 마당에 놓고 향을 태워서 역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등의 경우가 나온다.
이와 같은 벽온방은 대개 전염병이 돌 때 정부가 편찬해서 발행해 왔다. 특히 1518년(중종 13)에 이르자 ≪언해벽온방(諺解辟瘟方)≫이 발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1876년에 고종이 일본에 보낸 수신사 김기수(金綺秀)는 그의 수행원으로서 박영선(朴永善)을 데리고 갔는데 그는 우두법을 배워서 지석영(池錫永)에게 전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두법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1885년에 지석영의 ≪우두신설(牛痘新說)≫이 나오고, 같은 해 5월에 광혜원(廣惠院)이 문을 열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서양의학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4월 발발한 임진왜란은 1598년(선조 31년) 말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하면서 만 7년여 만에 끝났다. 임진왜란이 진행되던 때 한반도에는 수많은 인종이 모여들어 살육을 벌였다. 조선군과 일본군, 그리고 명군에는 중국인은 물론 조선인·일본인·오키나와인·태국인·미얀마인·인도인, 그리고 유럽인도 있었다. 임진왜란은 당시 거의 전 세계인이 참전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후 한반도의 상황은 참혹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답은 황폐해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전국 방방곡곡에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참전 병사들의 국적이 다양했던 만큼 임진왜란 이후의 한반도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병원균이 들끓었다.
그뿐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는 기상이변이 빈발했다. 여름에 우박이나 서리 또는 눈이 내리는 일이 빈발했다. 단국대 김호 교수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1591년부터 1600년의 10년 동안 6번의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1년부터 1610년의 10년 동안 35번의 기상이변이 있었다. 이전 10년에 비해 거의 6배 이상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상이변은 점점 더 자주 생겼다. 1611년부터 1623년의 10여 년 동안에는 60번의 기상이변이 나타났다고 한다(김호, ‘16세기 말 17세기 초 역병 발생의 추이와 대책’). 이 기간 연평균 여섯 번의 기상이변이 발생한 셈이다.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한반도를 덮친 기상이변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 봄·여름의 한랭기후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굶주려 더더욱 허약해졌고 면역력도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역병(疫病)이 창궐했다. 역병 중에는 익숙한 역병도 있었지만 예전에 없던 새로운 역병도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서 새로운 역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때는 1613년(광해군 5년) 가을부터였다. 증상은 홍역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독했다. 처음 병을 앓게 되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시며 오한이 나 벌벌 떨었다. 하지만 곧 고열이 나며 머리, 얼굴, 몸뚱이가 붉게 부어올라 심하게 아프고 온몸에 부스럼이 번졌다. 열이 오른 병자들은 헛소리를 하고 미쳐 날뛰기도 했으며 인후가 부어올라 숨쉬기도 어려워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역병의 이름도 몰랐고 치료법도 몰랐다.
사람들은 이름 모를 그 역병에 ‘당독역(唐毒疫)’ 또는 ‘옥온(獄瘟)’이라는 이름을 붙였따. 당(唐)은 중국 또는 오랑캐를 뜻했으며, 독(毒)은 독하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당독역이란 중국이나 오랑캐 쪽에서 건너온 지독한 역병이라는 뜻이었고, 옥온은 말 그대로 감옥에서 생긴 역병이라는 의미였다. 두 가지 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외국과 접촉하면 그곳에서 새로운 역병이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예컨대 당옥역이 처음 발생한 다음해인 1614년(광해군 6년) 편찬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두창(痘瘡)은 후한 광무황제 때부터 유행했다. 즉 마원(馬援)이 남쪽으로 교지국(交趾國, 현재의 베트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그곳의 두창을 묻혀왔다. 또 우리나라의 의서에 따르면 천포창(天疱瘡)이 명나라 무종황제 이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염돼왔는데 실은 중국에도 애당초 이 병이 없었으며 서역(西域, 현재의 중앙아시아)에서 전염돼왔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두창이 현재의 베트남지역으로부터 유래하였고, 천포창이 현재의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래하였다고 알고 있었다.
이런 배경지식이 있었기에 1613년 가을 새로운 역병이 돌자 사람들은 이 역병이 중국 또는 만주나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고 믿어 ‘당독역’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였고 중국은 명나라, 만주의 여진족, 일본열도와 계속 접촉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병을 ‘당독역’이라 이름 붙였다고 해도 전혀 허황된 의심에서 나왔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옥온이라는 이름 역시 당시 상황에서 상당한 근거가 있다. 1613년 가을 새로운 역병이 창궐하기 직전 이른바 ‘계축역옥(癸丑逆獄)’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계축년에 생긴 역모사건이라는 뜻인데 계축년이 바로 1613년(광해군 5년)이었다. 계축년 4월 25일, 광해군은 포도청으로부터 “지난달 조령에서 행상을 살해하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한 범인 박응서를 체포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광해군은 이 보고를 빌미로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사형시키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였으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오뉴월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다 죽었다. 4월에 시작된 계축역옥은 가을에 접어들면서 대략 마무리되었는데 바로 그 시점에서 한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병이 발생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오뉴월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아 죽은 사람들 때문에 새로운 역병이 생겼다고 믿어 옥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역병에 당독역 또는 옥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치료법은 몰랐다. 그래서 새로운 역병에 걸리는 사람이 무수히 늘어났고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그때 조선정부에서는 이 새로운 역병에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예조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하늘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 염병이 재앙이 되었습니다. 천행반진(天行班疹)이라는 새로운 역병이 가을부터 크게 일어나 민간의 백성이 수없이 죽어갑니다. 이 역병은 예전에 없던 병입니다. 이 역병에 걸린 사람들은 혹 금기(禁忌)에 구애되고, 혹 치료법을 몰라 앉아 죽기만 쳐다볼 뿐 감히 손을 쓰지 못합니다. 백성들이 역병에 걸려 요절하니 진실로 측은합니다. 내의원의 명의로 하여금 치료법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본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 인쇄·반포하게 하소서’하였다. 주상이 답하기를 ‘어의 허준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하게 하고, 여단(癘壇)에서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하였다.” (「광해군일기」에서)
위의 기록은 조선시대 정부 차원의 방역대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하고’, ‘여단에서 기도하여 비는’ 게 바로 정부 차원의 방역대책이었다.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 인쇄·반포하는’ 방법은 의학적 방역대책이고, ‘여단에서 기도하여 비는’ 방법은 종교적 방역대책이다. 이 같은 방역대책은 물론 전통시대 역병의 인식에서 유래하였다.
전통시대 동양의 제왕은 하늘을 대신해 이 땅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그렇기에 제왕이 이 땅을 잘못 다스릴 때 하늘은 천재지변을 통해 경고한다고 간주하였다. 수많은 백성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역병은 천재지변 중에서도 심각한 천재지변이었다. 그러므로 역병은 제왕에게 내린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전통시대 동양에서는 역병이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정치·종교적으로도 인식되었고, 그 결과 방역대책 역시 의학적 방역대책과 정치·종교적 방역대책으로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의학적 방역을 담당한 곳은 활인서(活人署)와 지방 수령이었다. 활인서는 도성지역에서의 의학적 방역을 담당하였고, 지방 수령은 해당 지역의 의학적 방역을 담당하였다. 활인서와 지방 수령의 의학적 방역활동은 처방전을 주거나 약물이나 의원을 동원한 치료였다.
반면 정치·종교적 방역은 한양의 여단과 지방 군현의 여단에서 담당하였다. 여단은 역병을 몰고 다니는 귀신인 여귀에게 제사하려고 마련해둔 제단이다. 역병이 돌 때 한양의 여단에서는 국왕이, 지방 군현의 여단에서는 수령이 여귀에게 기도하며 빌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여단에서의 제사, 즉 ‘여제’를 공식적인 국가제사로 규정해놓기까지 했다.
1613년 창궐한 역병은 기왕에 알려진 역병이 아니기에 새로운 처방전과 약물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예조에서는 당시 최고 명의들이 모여 있던 내의원의 어의들로 하여금 새로운 처방전과 약물을 마련하게 하자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당시 어의 중에서도 최고 어의로 손꼽히던 허준으로 하여금 새로운 처방전과 약물을 마련하게 했다. 그 결과 1613년 12월 「벽역신방(辟疫新方)」이라는 불후의 의서가 탄생했다. 「벽역신방」은 말 그대로 ‘당독역을 물리치는 새로운 처방전’이라는 의미였다. 이 「벽역신방」은 1610년 편찬한 「동의보감」과 함께 허준의 대표적 저술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방역대책에는 분명 크나큰 문제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방역대책이 정치·종교적 방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의학적 방역에서 아무리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져도 그것이 정치·종교적 방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정치·종교적 방역은 제왕의 존재 근거와 관련되었기에 제왕이 부정되지 않는 한 정치·종교적 방역이 부정되기 힘들었다. 1613년의 경우에도 의학적 처방전으로 「벽역신방」이 나왔지만 그때도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국왕의 이름으로 여제가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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