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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니 엄경수는 더럭 겁이 났다. 그리하여 뱃사공들에게 빨리 노를 저어 가라고 재촉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나루에 닿아 위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엄경수는 아까 뱃사공에게 들었던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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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부재일기(孚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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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엄경수(嚴慶遂)
주제 : 강 건너기
시기 : 1715-12-06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엄경수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엄경수
◆ 조선시대 한강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500여 년 동안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은 그 하류에 굴지의 곡창지대가 있는 것뿐 아니라, 풍부한 수량과 지류 때문에 조운(漕運)이나 기타 수상교통이 크게 발달하여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커다란 기능을 발휘하였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에는 자연 수상교통에 의지하게 되었고, 이 점에서 한강은 천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운이란 조세로 징수한 미곡·포목 등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제도로, 조선 왕조는 각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인근의 강가나 해안의 조창(漕倉)·수참(水站)에 쌓아두었다가 이를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이때 한강 상류로부터는 경상도·강원도·충청도와 경기도의 조운이 모여서 용산 강안에 있는 강창(江倉)에 집결되었다.
또한 하류로부터는 북으로 황해도, 남으로 충청도·전라도의 조운이 모여 서강(西江) 연안의 강창에 수합되었다. 한편, 한강은 세곡 이외에도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지방 농장에서 거둔 소작료가 운반되어 오는 교통로였으며,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 용품, 즉 미곡·땔나무·어염·수공업 제품·광물 등도 또한 이곳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이처럼 수운교통에 절대적 존재였던 한강은 반면에 육상교통에 있어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한성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있는 간선도로는 9개였는데, 그 중 6개 도로가 한강을 건너야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강변 곳곳에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하여 강을 건널 수 있게 하였으며, 국왕이 도강할 때에는 부교(浮橋)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이들 진에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세곡·소작료·생필품 등이 쌓이게 되었다. 한편 물화의 집산이 활발해지자 일찍부터 한강변에는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운수업과 상업 등에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경강부상(京江富商)이라는 사상층(私商層)이 크게 대두하여 용산·마포·서강·동작·서빙고·송파·뚝섬 등지를 중심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는 시전의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소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는 시전상인을 누르고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상품을 매점하고 가격을 조장하였으므로, 한양에서는 수시로 쌀값이 폭등하여 소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들은 미곡 이외에도 한강 상류로부터 운반된 시목(柴木)과 재목(材木) 등을 공급하였고, 30여 개의 빙고(氷庫)를 가지고 있으면서 얼음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강변의 상업이 번성함에 따라 강변 곳곳에 상업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용산·서강·마포항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동빙고·서빙고는 매빙업이 성행하였으며, 두모포(豆毛浦)·뚝섬은 목재와 시탄(柴炭)의 집산지였다. 강남 쪽에서는 송파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미곡·목재·토산품 등의 집산지로서 유명하였다.
한편, 한강은 국난시에 수도 한양을 보호하는 자연적 요새의 기능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파천하였다.
물론, 수도 방비책이 세워져 한강변을 사수하고 있었으나, 왜군 일부는 남한강을 건너 서울의 동쪽으로 진격해 왔고, 한강변에 도착한 다른 왜군 부대도 별 저항 없이 강을 건넜다.
이 천혜의 저항선을 포기한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압록강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강변의 천혜의 방어 조건도 일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남한강전투 등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그 전세를 흐트러뜨리는 전과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끝내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 말기에 한강은 서양열강과 부딪치는 첫 접촉점이었다.
고종 초의 천주교 박해가 문제가 되어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에는 미국에 의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그 뒤 운요호사건으로 마침내 1876년 개항을 한 조선에는 개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 1890년경부터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용산·마포 일대에 거주하면서 양곡상·목재상 등을 운영하였고, 1888년 에는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다.
1900년에는 한양에 전차와 철도가 놓였으며, 한강에 철교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강변에 몰려든 이러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끝내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한강은 다시금 비운의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강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간의 분쟁 대상이 되었던 요지였고, 고려·조선시대에는 근기지역(近畿地域)으로서, 그리고 국토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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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양화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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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깨며 강을 건너는...
유빙 사이에 갇혀버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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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강을 걸어서 건너다
173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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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서울로 가다
1599-11-20
강원도 평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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