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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고에서 은잔을 훔친 윤효빙은 어떻게 탈옥하였을까?
1519년 6월 14일, 황사우가 성주에 도착하니 겸직어사
남세준(南世準)
이 성주에 머물며 감사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세준은
강중진(康仲珍)
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개인 사정으로 사람을 죽인사건, 윤효빙(尹孝聘)이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 부정을 저지른 사건, 고령에 사는 최씨가 몰래 저지른 간악한 사건 등을 추고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6월 21일, 안음현에 도착하니 안음현감 안우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훈도(訓導)는 전 현감 윤효빙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윤효빙이 은잔을 훔쳤는데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떠벌리자 되 갖다 놓은 사실이 적발되어 수감되었던 것이다.
9월 6일, 의령현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기별을 듣게 된다.
9월 9일, 함안군에 머물고 있을 때 윤효빙이 탈옥했다는 첩정(牒呈)이 왔기에 즉시 찾아서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9월 16일, 철성. 황사우는 윤효빙이 전에 안음현감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떼거리를 이루어 50여 명이 진주 감옥을 습격해서 도주하였다는 윤효빙 탈옥사건의 대강을 알게 된다.
9월 21일, 진산에 머물고 있을 때 어사 남세준이 감사의 방의로 갔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이 윤효빙이 탈옥하여 도망간 사건 때문에 조정이 놀라고 동요하여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을 보내 잡아 오라 하였기 때문에 함께 들어와서 만나게 되었다.
9월 22일, 어사 남세준이 아침 일찍 출발해서 황사우는 미처 뵙지 못하였다. 윤효빙의 탈옥 사건이 놀라우니 감사가 찾아서 체포하라는 유지(有旨)가 왔다. 그래서 즉시 사근도 찰방과 단성현감에게 이 일을 맡겨서 의심 가는 곳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후 윤효빙이 체포되었는지에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효빙 탈옥 사건의 전말은 어사 남세준이 죽고 난후, 그의 죽음을 논하는 사신의 글에서 밝혀진다. 윤효빙이 갇혀있던 진주감옥의 진주목사는 신영홍이었는데, 그는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남세준과 동의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세준이 세상을 떠난 1533년 1월 16일 실록의 기록이다. “이조 참판
남세준(南世準)
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안음 현감(安陰縣監) 윤효빙(尹孝聘)이 금전을 훔쳐 쓴 일이 발각되어 진주(晉州)의 옥에 갇혔다. 세준이 경차관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추문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진주목사 신영홍(申永泓)은 효빙과 교분이 있어 은밀히 세준과 동의(同議)하여 일부러 효빙에게 옥을 넘어 도망하도록 하였다. 세준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영홍을 파출하자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효빙은 범장(犯贓,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는 것)의 처벌을 모면하였고, 영홍은 사사로이 하찮은 신의를 세웠으며, 세준은 조정을 속이고 봉명 사신의 체통을 크게 실추시켜서 왕법(王法)이 행하여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비난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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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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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황사우(黃士祐)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519-06-14 ~ 1519-09-2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성주군,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의령군, 강원도 철원군, 충청남도 금산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황사우, 남세준, 윤효빙, 안우, 신영흥, 남세준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윤효빙 탈옥 사건
실록에 따르면, 윤효빙은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돌아갈 때 겸관(兼官, 수령의 자리가 공석일 경우(境遇) 이웃 고을의 수령이 임시로 맡아서 일을 보는 것)의 봉서(封署, 봉합하고 서명하는 일)를 뜯고, 관고(官庫, 관가의 창고) 안에 있는 금잔과 은잔을 훔쳤다.
윤효빙 사건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1519년 4월 4일이었다. 이날의 기록이다. “전 안음 현감(安陰縣監) 윤효빙(尹孝聘)은 체직되어 돌아올 적에 바야흐로 상중(喪中)이었는데, 봉(封)하여 놓은 창고를 열고 관(官)에 저장하여 놓은 물품을 꺼내었으며, 또 조정(朝廷)이 모두 알고 있는바 금잔(金盞)·은잔(銀盞)을 가져갔습니다.
이 일을 추고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유보를 경차관(敬差官, 지방에서 파견하는 임시 벼슬)으로 보냈다. 하지만 일의 진척이 없었다. 4월 12일 실록의 기록이다. “경상도 추고경차관(推考敬差官) 유보(柳溥)는 직사(職事)를 삼가지 않고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여 이미 사명(使命)의 체통을 잃었으며, 맡은바 추국(推鞫)에 대하여는 전연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사간인(事干人, 사건이나 범행 등에 관련된 사람)을 먼 고을에 나누어 가둔지 10개월이 다 되었는데도 한 가지 일도 처결(處決)하지 못함으로써 원망하는 울부짖음이 잇달아 들리게 하니, 속히 파직하고 다시 어진 어사(御史)를 보내소서. 하물며 도내(道內)에 또 윤효빙(尹孝聘)의 옥사(獄事)가 있음에리까! 이는 풍화(風化)에 크게 관계되는 일인데 유보로 하여금 추국하게 한다면, 한 해가 다 가도 처결한 수 없을 것입니다. 흉년에 옥사마저 지체시키니 매우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유보를 대신해 어사로 파견된 인물이 남세준(南世準)이다.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명된 남세준은 윤효빙·강중진(康仲珍), 실행(失行)한 부녀(婦女) 등 세 가지 일을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도로 오게 된다.
남세준은 경상도에 도착해 감사를 만난다. 함께 윤효빙의 일을 추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6월 21일, 황사우는 안음훈도가 사건과 연루되어 수감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2달여가 지난 9월 6일, 윤효빙의 탈옥 소식을 접하게 되고, 3일 뒤인 9일, 이 소식을 공식적인 보고로 접한 후 감사는 체포를 명하게 된다. 그리고 황사우는 16일에 윤효빙 탈옥사건의 내용을 간단히 일기에 기록하였다.
윤효빙의 탈옥사건은 임금도 매우 놀라게 하였다. 9월 16일의 실록의 기록이다.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윤효빙(尹孝聘)이 탈옥하여 도주한 일을 입계(入啓)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하매, 세희가 아뢰기를, “진주(晉州)는 인물이 번성한 곳인데, 목사 신영홍(申永洪)이 앉아서 탈옥하는 일을 보기만 하고 잡지 못하였으니, 잡아다가 추문(推問)하기 바랍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다음해인 1520년 2월 9일. 헌부를 윤효빙을 수색하고 체포하는 일을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던 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감사문근을 추문하라고 탄핵한 것으로 보아 윤효빙의 탈옥 사건은 바로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탈옥사건이 있은 후 1년 뒤인 1520년 9월 9일. 진주(晉州)사는 유학(幼學) 윤영(尹寧)이 상소(上疏)하여 그 아버지 윤효빙(尹孝聘)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윤영의 소(疏)에는 “향리(鄕吏) 임종(林從)이 전부터 윤효빙을 미워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무함하였다.”하였으며, 윤효빙이 옥중에 있다가 달아났으므로 당시에 반옥(反獄)으로 논하였으나 윤영의 소에는 “윤효빙은 죄 없이 모함한 옥사(獄事)를 잠시 피하여 스스로 만의 하나라도 가려내려 하였다.”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19년 6월 14일. 종일 밤새 비가 내리다 개였다 함. 아침에 감사(監司)가 일찍 업무를 시작하였고, 안세호(安世豪)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였다. 비가 몹시 내려서 머물려고 하였으나, 억지로 출발하였다. 칠진(漆津) 나루에 이르자 비가 크게 쏟아 부었다. 배를 타고 건넘에, 사람과 말이 모두 비 때문에 곤욕을 당하였다. 배가 또한 작아서 건너기가 어려워 뱃사공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성산(星山) 오리정(五里亭)에 이르니, 성주목사(星州牧使) 김우(金佑)·판관(判官) 박유형(朴有亨)·교관(敎官) 조희(曺禧)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예(禮)를 마치자 겸직 어사(御使)인 남세준(南世準) 공께서 이때 강중진(姜仲珍)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개인 사정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 윤효빙(尹孝聘)이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을 때 부정을 저지른 사건, 고령(高靈)에 사는 최씨(崔氏)가 몰래 저지른 간악한 사건 등 때문에 성주(星州)에 와 머물며 감사(監司)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監司)가 처음에 동헌(東軒)에서 집무를 시작했다가, 누각(樓閣)으로 옮겨서 집무를 하였다. 집의(執義)도 또한 들어왔다. 술잔을 나누는 사이에 우병사(右兵使) 김극성(金克成)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함께 술자리를 하여 밤이 깊어서야 끝마쳤다. 그 뒤 나는 집의(執義)의 방으로 갔다. 성주(星州)에 사는 진보현감(眞寶縣監) 한성(韓晟)도 왔다. 한성(韓晟)은 그대로 머물다가 집의(執義)와 함께 잤고, 나는 남청루(南廳樓)의 방으로 돌아와서 잤다. 1519년 6월 21일. 날씨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안음현(安陰縣)에 도착하니, 안음현감(安陰縣監) 안우(安遇)가 왕명을 맞이하였다. 훈도(訓導)는 전 현감 윤효빙(尹孝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예(禮)를 마치고 광풍루(光風樓)에서 집무를 시작하였고, 나는 제월당(霽月堂)에 기거하였다. 모두 선현(先賢) 정여창(鄭汝昌)이 현감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이 한 고을의 제도가 정여창(鄭汝昌) 공 때부터 비로소 갖추어졌으니, 공이 은잔(銀盞)을 만들고 누대(樓臺)를 구비한 두 가지 일이 지금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윤효빙(尹孝聘)이 은잔(銀盞)을 훔쳤는데, 이웃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떠벌리자 되 갖다 놓은 사실이 적발되어 수감되었던 것이다. 여러 유생(儒生)들을 고강(考講)하였다. 도약정(都約正) 효자 생원(生員) 임득번(林得蕃)·옛 친구인 곽빈(郭賓)·변호(邊灝) 이광(夷曠)은 모두 나와 함께 성균관에 같이 있던 사람들인데, 만났으니, 위로됨을 알 수 있겠다. 처5촌○○·김구(金坵)·문계창(文繼昌)은 합천(陜川)에 사는데, 병을 요양하러 왔다. 이제 풍기가 좌도(左道)가 되었기 때문에 문서를 인수인계 하러 온 것이었다. 처명(處命)은 먼저 돌아갔다. 저녁에 현감이 들어와 뵙고 이야기하였다. 김천찰방(金泉察訪)은 돌아가고,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이경염(李敬恬)이 말을 몰고 왔다. 감사(監司)는 광풍루(光風樓)에서 자고, 나는 제월당(霽月堂)에서 잤다. 복인(卜人) 참봉(參奉) 정굉(鄭宏)이 와서 인사하였다. 1519년 9월 6일. 날씨가 맑고 날이 따뜻함. 일찍 출발하였다. 신번현(新番縣)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소촌도(召村道)의 말이 왔다.】 의령현(宜寧縣)에 도착하니, 의령현감(宜寧縣監) 박윤경(朴閏卿)이 왕명을 맞이하였다. 감사(監司)는 동헌(東軒)에서 집무를 시작하여, 여러 유생(儒生)들을 고강(考講)하였다. 서얼 출신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여침(余琛)이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렸다. 균전제(均田制)와 한전제(限田制)에 관한 것이었다. 금산(錦山)의 전 재상(宰相) 정광보(鄭光輔)가 이 곳이 본 고향이라 해서 왔다. 감사(監司)가 서헌(西軒)에서 아울려 앉았는데, 나와 의령현감(宜寧縣監)이 함께 들어가서 밤이 깊도록 술자리를 하였다. 배문보(裵文輔)가 내방하였다. 윤효빙(尹孝聘)이 옥에서 도망쳤다는 기별을 들었다. 1519년 9월 16일. 날씨 맑음. 철성(鐵城)에 머물렀다. ◎ 새벽에 일어나 사천(泗川)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감사(監司)의 종기(腫氣)에 독기가 풀리지 않아 그대로 머물렀다. 감사(監司)는 종일 거머리 침을 놓았다. 거머리 침을 놓은 방법은 이렇다. 짧고 둘레가 큰 대나무 통에 그 한 쪽을 막아서 물 거머리를 많이 담고, 또 물을 채운 다음, 그 대나무 통을 종기 부위에 맞춰 댄다. 그러면 통 안의 여러 거머리가 모두 종기에 붙는데, 먼저 배불리 먹은 것이 먼저 떨어진다. 그렇게 하면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나쁜 피를 많이 뽑아낼 수 있다. 통에 물을 채우는 것은, 물이 없으면 종기 부위에 열이 나서 거머리가 붙지 않고, 물과 거머리를 함께 종기 부위에 닿도록 해야 종기 부위가 물 때문에 열이 내려 거머리가 붙기 때문이다. 이 날은 내가 공무를 처리하였다. 멀리 변방에 있으면서 막막히 집안 소식을 듣지 못해서 마음이 불안하였다. 철성(鐵城)에 인편을 부탁해서 풍기로 보내 부모님의 안부를 물어보고 행차(行次)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어함안(魚咸安)은 감사(監司)의 방에 있었다. 허헌숙(許獻叔)은 종일 감사(監司)의 방에 있다가 혹 내 방으로 왔다가 하였다. 손도사(孫都事)가 내방하여 함께 잤다. 윤효빙(尹孝聘)이 도망쳤다. 【전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제물을 축적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한 밤중에 떼거리를 이루어 50여명이 진주(晉州) 감옥을 습격해서 도주하였다.】 1519년 9월 21일. 날씨가 맑고 날이 따뜻함. 진산(晉山)에 머물렀다. ◎ 아침에 감사(監司)에게 문안을 드렸다. 감사(監司)는 종기의 독기가 잠깐 풀렸다. 집의(執義)의 방으로 가니, 이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들어가 이야기하였다. 식사 후 어사(御史)가 집의(執義)의 방으로 왔다. 나도 가서 이야기하였다. 감사(監司)가 나에게 공무를 처리하라고 해서 일월당(日月堂)에 있었는데, 처리할 서류가 대단히 많아서 종일 한가할 때가 없었다. 저물 무렵 또 감사를 문안하였다. 집의(執義)의 방으로 가니, 어사(御史)도 또한 와서 이야기하였다. 어사(御史)는 감사(監司)의 방으로 갔다. 진주목사(晉州牧使) 신영홍(申永泓)이 윤효빙(尹孝聘)이 탈옥하여 도망간 사건 때문에 조정이 놀라고 동요하여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을 보내 잡아 오라 하였기 때문에 들어와서 뵈었다. 곤양군수(昆陽郡守)도 또한 왔다. 집의(執義)의 방에서 술자리를 하였다. 단성현감(丹城縣監)이 진주목사(晉州牧使)가 잡혀가고 난 뒤 겸임(兼任)할 사람으로 와서 인사하였다. 진해현감(鎭海縣監)이 돌아갔다. 허헌숙(許獻叔)이 먹을 보내왔다. 밤이 깊어 돌아와서 일월당(日月堂)에서 잤다. 1519년 9월 22일. 날씨가 맑고 날이 따뜻함. 진산(晉山)에 머물렀다. ◎ 아침에 어사(御史)가 일찍 출발해서, 나는 미처 뵙지도 못하였다. 감사(監司)를 문안하였다. 감사(監司)는 작은 누각(樓閣)에서 집무를 시작하였다. 집의(執義)가 또한 들어와 마주앉아 이야기하였다. 윤효빙(尹孝聘)의 탈옥 사건이 놀라우니 감사(監司)가 찾아서 체포하라는 유지(有旨)가 왔다. 그래서 즉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과 단성현감(丹城縣監)에게 이 일을 맡겨서 의심 가는 곳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였다. 식사 후 집의(執義)가 나갔다. 곤양군수(昆陽郡守)도 또한 나갔다. 촉석루(矗石樓)에서 공무를 처리하였으니, 감사(監司)의 명령이었다. 날이 저물 무렵 청심당(淸心堂)으로 내려갔다. 허헌숙(許獻叔)이 철성(鐵城)으로부터 와서 감사(監司)의 방에서 잤다. 상중(喪中)에 있던 하영(河瀛)이 내방하여 함께 잤다. 정자(正字) 이여익(李汝翼)이 늦게 내방하였다.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밤늦게 내방하였다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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