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명을 국제체계 내에 정치권위에 변동에 관한 결재권자로 인정함으로써 그로부터 군주권을 확정 받는 절차를 취하였다. 그렇게 책봉된 군주는 질서화 된 세계를 지향하는 천(天)의 의지의 대행자이며 의인화된 천(天)으로서의 중책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반정이라는 정치변혁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으로서는 명에게 책봉(冊封) 받는 일이 더욱 민감한 외교 사안이었다. 세자도 명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주청사를 연경에 보낸 것이었다.
한편, 세자 책봉이 조정에서 처음 논의 된 것은 1518년이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장자였던 이호(李岵)는 1515년 2월 25일 생이었다. 그의 나이 4살 때부터 세자 책봉이 거론 되었던 것이다. 세자 책봉을 아뢴 것은 당시 동지사였던 남곤이었다. 남곤은 세자가 어린 나이지만 능히 세자의 자격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자가 되면 시선(視膳, 왕세자가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수라상을 몸소 돌보는 것)·문안(問安)·입학(入學)의 예(禮)를 다해야 했다. 인종은 3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시선과 문안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남곤이 주장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책봉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이고 정해진 법에 따라야 한다고 답한다.
1518년 3월 12일의 중종실록 기록이다. “동지사 남곤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원자(元子)의 나이 7∼8세만 되면 반드시 세자(世子)로 책봉하는데, 옛일로 보면 대신이 늘 태자를 일찍 정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하면 시선(視膳)·문안(問安) 등의 일을 하므로 약질로서는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원자는 심상한 기질이 아니므로 비록 7∼8세에 이르지 않더라도 책봉할 만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를 책봉하는 나이는 조종 때부터 정해진 법이 있으므로, 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자연 여염으로 나가지 못한다.”하였다.”
이후 1520년 1월 17일, 세자 책봉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당시 6살이던 이호를 세자로 책봉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종은 선대왕들의 예처럼 8살, 적어도 7살에 책봉하는 것이 좋으며, 흉년이 들어 중국에 공을 바칠 수 없다는 이유까지 들면서 책봉을 꺼린다. 하지만 계속 된 대신들이 강경하게 세자 책봉을 간하여 중종은 결국 4월에 세자 책봉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1520년 1월 25일의 중종실록 기록이다. 상이 비현합(丕顯閤)으로 나아가니, 남곤 등이 입대(入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 책봉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 같다.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상고하건대, 예수(禮數, 사람의 명예와 지위에 상당한 예의)가 매우 번다하니 어린아이가 어떻게 행할 수 있겠는가? 대사(大事)를 당하여 실례(失禮)하는 것은 불가하다. 『오례의(五禮儀)』를 살펴보건대, 책봉할 때에 요속(僚屬) 으로 집사(執事)를 삼는다고 하였으니, 요속을 미리 설치하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책봉하지는 않더라도 먼저 요속을 설치하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
하매, 남곤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만 내년을 기다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중국의 일로 보건대, 홍치황제(弘治皇帝)는 2∼3세 때에 책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례(儀禮)는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라 만든 것이니, 만일 반드시 예문(禮文)을 따라야 한다면 2∼3세 때 어떻게 그 예를 다 거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원자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시니 행하지 못할 예가 없겠으나, 행하기 어려운 예는 권의(權宜)로 줄이는 것이 가합니다. 명위가 중한 것이지 요속을 두는 것이 뭐 그리 급합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奏王)으로 있을 적에도 부(府)를 설치한 뒤에야 요속을 두었으니, 만약 명위를 정하지 않는 다면 어느 곳에서 요속을 접견하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일찍 정하여 놓고 중국에 주청(奏請)하여야 합니다.”하고, 이유청(李惟淸)은 아뢰기를, “2월이나 3월에 책봉하는 것이 가하고 내년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중략) 신상이 아뢰기를, “명위(名位)를 일찍 정하는 것은 곧 종묘(宗廟)·사직(社稷)의 복입니다. 중한 것은 책봉하는 데 있는 것이니, 소소한 예문(禮文)이야 뭐 관계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2∼3세에 책봉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반드시 예수(禮數)를 계교하지 않은 것일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대간이 모두 일찍 정하자고 하는데도 내가 어렵게 여긴 것은 조종(祖宗)의 예(例)가 아니기 때문이었으나, 그 사이래야 단지 1∼2년이니, 금년 4월 안으로 날짜를 정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이렇게 해서 1520년 4월 22일 중종과 장경왕후의 장자 이호(李岵)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교명문(敎命文)은 이러하였다. “세자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큰 근본을 위함이며, 조종(祖宗)을 봉사(奉祀)하며, 제기(祭器)를 맡는 것은 원량(元良, 세자) 에게 맡겨야 마땅하므로, 이제 너 이호(李峼)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도(道)를 즐거워하고 스승을 높이며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삼선(三善,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아들로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린 사람으로서 어른을 섬기는 일)의 가르침에 잘 따라서 일국(一國)의 평안을 길게 하라.”
5월 4일은 세자 책봉 사실을 명나라에 추인받기 위하여 주청사를 보낸 날이었다. 조선시대 중국(명나라)과의 사이에 이루어진 주청의 내용을 보면, 중국 측의 항의에 의한 해명, 정치적 중대사건에 대한 보고, 고명(誥命)·인신(印信)의 수령 등과 같이 요청할 일이 주가 되고, 이 밖에 연호 사용, 내정간섭에 대한 항의, 왜정(倭情) 등의 보고, 인질(人質)·숙위(宿衛) 등의 파송, 혹은 궁정 간의 통혼문제 등에도 주청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청병·원병·파병 등에 관하여 양국 사이에 논의의 여지가 있을 때 주청사·진주사 등이 파견되었다. 사신의 구성원은 대개 정사·부사·서장관(書狀官, 종사관)·통사(通事)·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 서자관)·화원(畵員) 등을 중심으로 노자(奴子)까지 합쳐 40명이었으나, 후기 대청 사절로는 30명 내외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 사신이 중국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40일 정도였으며 뒤에는 약 60일이었다. 사행로는 초기에는 수로(水路)로 간 때도 있었으나 대개 육로로 서울-평양-의주-압록강-구련성(九連城, 진강성)-봉황성(鳳凰城)-성경(盛京, 심양)-산해관(山海關)-북경(北京)의 2,049리의 길을 택했다. 갔다가 돌아오는 데는 대개 28일이 소요되었다. 수로로는 육로 1,900리, 수로 3,760리로 총 5,660리였다.
1520년 5월 4일, 정사에서 지평 임권(任權)을 이조정랑에 임명하고, 병조정랑 남효의를 지평으로 삼는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주청사(奏請使) 신상(申詳), 한효원(韓效元), 겸임 장령(掌令) 김인손, 질정(質正) 최세진(崔世珍)이 연경(燕京)에 갔다. 세자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