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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례 준비 - 장지 선택
망자가 묻힐 산소를 정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무덤자리를 어디에 결정하느냐에 따라 집안과 후손들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관(地官)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지관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라 묏자리나 집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지사(地師) 또는 풍수라고도 하였다.
김택룡과 가족들은 매우 신중하게 죽은 김적의 무덤자리를 고른다. 김택룡쪽에서도 또 산양에 거주하는 죽은 김적의 집에서도 지관의 도움을 받아 이리저리 여러 곳을 물색하여 살펴보기를 거듭하고 있다. 산양 김적의 집에서는 이우경이라는 지관의 도움을 받아 산양 북면 20리 쯤을 무덤자리로 골랐는데, 그 산 앞이 다른 사람의 소유라서 결국 포기하였다고 하였다. 마지막 장면은 이 소식을 들은 김택룡이 집안의 선조 무덤이 있는 가동으로 가서 몇 군데를 살핀 후 괜찮은 곳을 점찍어 쇠를 놓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후에 김택룡은 지관 이자정을 불러 이곳을 함께 살폈는데 이자정이 매우 칭찬하여 김택룡은 흡족해하였다.

관련이야기 소재

지관이 아내 묘소의 이장을 권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61년 2월 12일. 흐리고 가랑비가 가끔 내린 날이었다. 어머니께선 가슴이 막히고 등에 찬기운을 느끼는 증상을 앓고 계셨는데, 본인께선 본래 있던 증상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씀은 그리하시지만, 자식 된 도리에서 애가 타고 걱정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오늘은 백안 마을에 사는 지관 류사달을 불러왔다. 집안의 여러 산소의 풍수가 어떠한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최흥원뿐만 아니라 지촌 마을에 사는 일족 할아버지도 함께 오셔서 여러 묘소를 함께 둘러보았다. 우선 할머니 산소에 올라갔는데, 지관은 터를 한참 둘러보더니, 크게 길한 자리라고 평가하였다. 땅의 모양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길한 자리임을 설명해 주는데, 할머니 묘소가 길지란 소리를 들으니 최흥원의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에 아내의 산소도 지관에게 보이고 싶어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아내 산소 자리를 살펴보던 지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아내가 죽은 이후 집안의 여러 우환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빨리 무덤 터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집안의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고, 어머니 건강도 날로 나빠지셔서 걱정이었던 최흥원은 지관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내의 묘소 터를 고를 때 최흥원이 직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정하였는데, 그때 터를 잘못 잡은 것인가……. 최흥원은 마치 집안의 여러 좋지 않은 일이 자신의 안목 부족 때문이듯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수씨의 묫자리를 고르다 테마스토리 이동

1758년 3월 18일. 최흥원은 오늘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고 아버지의 묘소로 올라갔다. 그간 선친의 묘소를 참배하지 못하여 일부러 찾은 것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나서 최흥원은 아버지 묘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오늘의 참배는 아버지 묘소를 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막내 제수씨의 묫자리를 고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아버지 묘소 인근의 용맥에 올라가 묫자리를 쓸만한 곳을 살펴보았으나, 끝내 쓸만한 자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자리를 옮겨 안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감룡 언덕의 주변 지형이 아주 기묘하여 묫자리를 쓸 수 있게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산자락이 묫자리와 만나는 곳이 왼쪽으로 떨어져 있고, 방향도 축방이어서 별로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물길이 들어가는 파구도 좋지 못한 방향으로 나 있어 좋은 자리라 볼 수 없었다.
결국, 최흥원은 아버지 묘소에서 내려와 도장동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 도착하여 좌청룡이 되는 곳의 머리 부분에 올라가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장지로 쓰기에 충분한 터가 나왔다. 다만 이곳 역시 산자락과 묫자리가 만나는 곳이 다소 왼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모신 막내 제수씨의 묫자리인 만큼, 최흥원은 최대한 좋은 자리에 묻어주고 싶었다. 도장동 터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좋은 자리를 찾을 때까지 보다 시간을 들이기로 하였다. 좋은 자리에 막내며느리를 묻어야, 어머니의 슬픔도 다소간 가라앉을 것이다. 최흥원은 오늘 본 자리들을 머릿속에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이제 어디로 터를 보러 가야 할지 떠올려보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묏자리를 고르고 또 고르다 테마스토리 이동

1617년 2월 3일, 김택룡의 첫째아들 김숙이 지관(地官) 주경순(朱景荀)을 초청하여 영주 집 뒤의 장지(葬地)를 살펴보기 위해서 영주[영천(榮川)]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김택룡이 문득 아들을 보니 얼굴이 매우 상해 있었다. 김숙이 제 죽은 동생 김적의 초상에 분주히 돌아다니느라 건강이 상한데다가 또 계속해서 먼 길을 다녔으므로 무척 피곤했기때문이었다. 김택룡은 아들 김숙이 몸에 병이 생길까 걱정이 되어 중지시키고 보내지 않았다.

얼마 후 2월 13일, 김택룡의 큰 아들 김숙과 조카 김형이 결국 영주로 갔다. 죽은 아들 김적을 안장할 산을 살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0일 전에 가려다 중지했던 것을 이 날 실행에 옮긴 것이다.

2월 24일, 김택룡의 셋째아들 김각이 제 형 김적을 안장(安葬)할 산을 살피는 일로 회곡(檜谷)에 갔다. 이자정은 말을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편지를 써서 김각에게 주어 보냈다.

2월 25일, 금복(琴福)이 산양(山陽, 죽은 아들 김적이 살던 곳)에서 와서 김택룡은 별감 김달가(金達可)가 보낸 편지를 전해 받았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다.
“김적을 안장(安葬)할 산은 용궁(龍宮) 사람 이우경(李禹卿)을 통해 산양의 북면(北面) 20여 리 쯤에 정하였으며, 3월 20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산 앞을 채득해(蔡得海)가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아서 결국 포기하였습니다. 김적의 아내도 가동(檟洞)에 안장하고 싶다고 합니다.”
김택룡은 일단 이자정이 오기를 기다려 결정하기로 하였다. 아들 김각이 저녁에 돌아와 이자정의 말을 전하길, “그가 한식(寒食)절제(節祭)가 다가와서 오지 못하겠다고 다음 달 초하루에 와서 결정하겠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산양에서 온 금복이 이 일 때문에 계속 머물렀다. 김택룡은 속으로 ‘결정하지 못했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2월 26일, 금복이가 산양으로 돌아가서 김택룡은 그 편에 둘째 며느리[김적의 아내]에게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는 장례치를 산은 이자정이 오기를 기다려 결정할 것이며, 그리도 다음 달 3,4일 경에 큰 아들 김숙을 산양으로 보내 그 곳에서 택할 수 있도록 한 다음 결정하겠다고 썼다. 이날 김택룡은 큰아들 김숙과 가동으로 갔다. 그리고 사현(砂峴)을 경유하여 사동(砂洞) 뒷산이 장례를 치를만한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김택룡은 쇠를 놓아 산의 두 세 곳을 점찍어 두었다.

왕실 묏자리를 빼앗은 부원군 김조순 테마스토리 이동

하회의 류씨(柳氏) 집안에 시집간 누이를 보러 갔다가 서울 소식을 들었다. 국장을 치를 때 쓰기 위해 여주(驪州)에 점지해 둔 장지가 있는데, 그곳의 금혈(禁穴)에 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며느리를 매장하였다. 길지의 맥을 훼손한 죄도 죄지만 김조순이 왕실을 능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보게 된 것이다. 이에 좌의정 이상황(李相璜)과 우의정 심상규(沈象奎)가 김조순의 죄를 아뢰고 도성 밖으로 나가버렸으며, 대간들이 벌뗴 처럼 일어나 김조순을 탄핵하는 계사를 올렸다고 한다.
노상추는 과거 도성에서 김조순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는 김조순이 36세의 연소한 나이로 병조판서 자리에 앉았을 때다. 늘 도목정사에서 얻을 관직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노상추는 자연히 도목정사를 앞두고 김조순을 찾아갔다. 다들 사정은 노상추와 비슷했다. 김조순의 집에는 노상추와 같이 벼슬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하지만 도목정사를 앞둔 시점에 김조순은 손님을 아무도 만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노상추의 동생 노상근을 만나 주었는데 김조순은 노상추나 노상근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음에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형제관계에 대해 알고 있음을 내비치는 노련한 태도를 보였다. 노상추는 직후의 도목정사에서 김조순이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모습을 보고 김조순의 총명함과 공정함에 대해 감탄했었다. 그런 김조순이 권력의 정점에서 이렇게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상추는 김조순이 패망할 것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절터에 묘를 쓰려고 부도(浮屠)를 부수다 테마스토리 이동

성묘하러 다녀오는 길에 말이 발을 헛디뎌 노상추는 낙마하여 골짜기로 굴렀다. 다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노상추는 흙투성이가 되어서는 낙동진(洛東津)을 건너 간신히 집인 서산와(西山窩)로 돌아왔다. 하지만 쑤시는 몸을 쉴 새도 없이 손님들이 밀어닥쳤다. 서산와를 오래 비운 탓이다. 책을 빌려 달라는 사람, 그냥 인사를 올리러 온 사람 등 다양한 손님들이 다녀갔다. 월동(月洞)의 김희운(金希運) 인척도 오랜만에 찾아왔다.
김희운은 괴이한 소식을 전했다. 김필환(金必煥)이란 사람은 그의 아비를 장사지내려고 주륵사(朱勒寺)의 옛터에 묏자리를 잡았다. 터에는 부도석(浮屠石)이 남아 있었으나 김필환은 부도석을 부수고 금정(金井)을 열어 구덩이를 팠다. 그런데 2자[尺] 깊이를 채 파기도 전에 석함(石函)이 나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 물속에 인골(人骨)이 있었다. 김필환은 오싹해져서 부도석을 동쪽으로 옮기고 석함은 서쪽의 여러 돌 속으로 옮겨 두었으며, 묘를 쓸 자리도 옮겨서 다시 구덩이를 팠다고 한다. 아무리 승려의 부도라고 해도 엄연히 묘인데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노상추는 쑤시는 몸을 연신 주무르며 혀를 찼다.

사위의 묏자리를 장인이 직접 살피다 테마스토리 이동

노상추의 셋째 손자 명숙(明琡)이 스물넷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평소 건강했고, 이번에 앓고 있던 병도 금세 나을 것처럼 증상이 가벼웠으므로 모두들 명숙이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명숙의 부친인 익엽도 서울에 가 있었고, 처도 친정인 소천(韶川)에 가 있었다. 노상추는 슬픈 마음을 가다듬으며 사돈 정필달(鄭必達)에게 부고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정필달은 딸을 떼어놓고 혼자 왔는데, 젊은 사위의 죽음에 노상추와 마찬가지로 애통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명숙의 처가 곡을 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숙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왔는데 그가 하는 말이, “저 아이가 남편의 부음을 듣고서는 자기도 곡을 하러 가겠다고 소란을 피우면서 죽기를 각오하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가마를 빌려서 40리를 갔고, 오늘은 160리를 갔는데 말 한 마리로 달릴 수 없어서 말을 세 번이나 세내어 바꾸어 탔습니다.” 삼복더위에도 200리 길을 한 번을 쉬지 않고 이틀 만에 오다니,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청상과부는 남편의 시신을 앞에 두고 통곡했다.
젊은이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장지가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노상추는 지관인 김낙호(金樂浩)를 데리고 가족의 묘소가 있는 법화동(法華洞)으로 갔다. 정필달도 동행하여 장사지낼 곳을 둘러보고 점지하였다. 정필달은 김낙호와 함께 법화동에서 땅을 정돈하고 금정(金井)을 여는 일을 직접 살폈다. 그동안 노상추는 수철점(水鐵店)과 다항(多項)의 군정(軍丁)을 차출하여 상여를 메도록 분부하였다.
6월 21일에 명숙의 발인이 이루어졌다. 사시(오전 9~11시)에 하관하고 구덩이를 흙으로 채운 뒤 다지고 주변에 계체석을 쌓았다. 비가 올 기미가 있자 조문하러 온 사람들 중에서는 먼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 우레소리가 서북쪽에서 울렸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렸다. 장막을 세워두었기에 양반들은 완전히 젖는 일은 면했지만 역군들은 완전히 젖었다. 일하는 데는 더위보다 차라리 비가 나았다. 빗속에서 묘소가 완성되었다. 노상추는 역군들에게 제사음식을 나누어주고 돌려보냈다.
반혼(返魂)까지 하여 명숙의 위패가 집으로 돌아온 뒤,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생각한 정필달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노상추에게 말하였다. 평소 손님이 떠나겠다고 하면 늘 만류하여 더 머무르게 하는 노상추였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머무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위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과 청상과부가 된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필달의 얼굴에는 먹구름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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