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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광서원의 전신인 경광서당
이 이야기에서 김광계가 찾아간 김시추는 경광서당에 머물고 있었다. 경광서당은 금계리 인근에 살던 유림들이 마을 동편 사천(沙川) 위에 오래전부터 있던 유정사(有定寺)라는 절을 정비하여 선조 1년(1568)에 건립한 서당이다. 이 경광서당을 건립하는데 가장 앞장 선 이는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으로 권호문의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안주교수(安州敎授) 권규(權稑)의 아들이다. 권호문은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고, 경광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이황은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하였고, 벗 유성룡도 강호고사(江湖高士)라 하였다.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송암집』이 전해진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퇴계의 학맥이 흐르는 이 경광서당은 인조27년(1649) 춘파이사(春坡里社)를 창건하여 용재 이종준, 경당 장흥효를 모셨다. 그리고 현종3년(1662) 경광정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백죽당 배상지, 용재 이종준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숙종12년(1687) 서원으로 승격되어 장흥효 선생의 위패를 옮겨서 배상지, 이종준과 함께 제향했다. 대원군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73년 단소를 설립하여 향사해 왔다.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되어 매년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김시추가 머물던 시기는 경광서당이었던 때이다. 현재 서원 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존현사(尊賢祠),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의 강당인 숭교당(崇敎堂), 신문(神門)·주소(廚所) 등으로 되어 있다. 존현사에는 배상지·이종준·장흥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숭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며 양쪽 협실은 향사 때에 헌관들과 집사들이 사용하는 방으로서 동쪽은 헌관들이 사용하며 서쪽은 집례, 축관, 집사 등이 사용한다. 신문은 향사 때에만 열어 제원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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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추를 만나기 위해 경광서당에 가다 테마스토리 이동

1615년 9월 28일, 향시를 보기 위해 아우 광보와 함께 예천 용궁에 왔던 김광계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전날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아 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결국 길을 나선 날짜는 이틀 후인 9월 30일이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전날 저녁부터는 그칠 기세 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김광계는 아우 광실과 함께 새벽에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났다. 바로 예안으로 가지 않고 금계로 길을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금계에는 김시추가 살고 있는데, 얼마 전 예천 향시에 오는 길에 일부러 금계까지 갔지만 김시추를 만나지 못했었다. 이번엔 반드시 만나고 갈 작정으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이다.

금계(金溪)에 당도하여 다시 김시추를 찾아가니 이번에도 김시추는 집에 없고, 며칠 후에나 돌아온다고 하였다. 도대체 어디에 간 것인지 물어보니 김시추는 경광서당(鏡光書堂)에 가서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김광계 형제는 곧장 경광서당으로 찾아갔다.

서당에 가보니 다른 사람은 없고, 김시추와 그의 아우들인 김시강(金是杠)과 김시탈(金是梲) 이렇게 셋만이 책을 읽고 있었다. 김광계와 광보를 본 김시추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일어서려고 했으나 김시추가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서당에서 하루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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