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고려의 마지막 충의지사 정몽주
이 이야기는 이덕홍이 돌아오는 길에 정몽주의 출신지인 연일현을 지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몽주(1337~1392)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출생지는 영천(永川)이다.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이라고 하였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1360년 24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예문관의 검열과 수찬을 역임하였다. 1363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이 되어 이성계 등과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였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사행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배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또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지자, 그는 규슈지방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료들은 이 사행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겼으나,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왜구 단속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우산기상시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1380년에는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와 명나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 일각에서는 원나라와 다시 화친하기를 청하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끝까지 주장하였고, 직접 명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건너가 양국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재삼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는 조공물의 삭감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윤소종, 정도전, 이숭인, 조준 등 당시 젊고 개혁에 뜻을 둔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었는데, 한쪽은 정도전과 조준 등 대대적인 개혁을 표방한 무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정몽주와 이숭인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을 추진한 세력이 있었다. 초반에는 이 둘의 차이가 입장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이 둘의 입장 차이도 선명해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몽주는 그 기회를 살려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정도전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타살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대학자인 이색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동방 이학의 시조'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포은집』 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충의의 절사로 평가되어 전국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다.

관련이야기 소재

정몽주의 본관을 방문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이덕홍은 장기현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며칠간 경주 유람을 마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장기현의 태수가 잔치를 열어 동행한 이들과 취하도록 마셨다. 다음날 길을 나서는데 태수가 노자까지 넉넉히 챙겨주었는데, 노자는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 날이 저물 무렵에는 영일현에 이르렀다. 이곳의 수령 역시 재물이 넉넉하였는데, 손님인 이덕홍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덕홍은 이곳 영일현이 옛날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의 고향임을 떠올렸다. 이덕홍은 연일 수령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곳은 문충공 정선생의 고향입니다. 아직 그 유풍과 여운이 남아있는 합니다. 경내에 들어가면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서고, 마음이 서늘해지는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곤 그 느낌을 시로 지어 읊었다.

다음날 마침내 고향 마을에 도착하였다. 총 일정은 5-6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동해의 빼어난 형상과 경치를 모두 둘러보고 올 수 있었다. 평소 바라왔던 소망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관람하는 일만 일삼고, 평생토록 지킬 바를 돌아보는 것에는 소홀하였으니, 이번 여행은 말단을 일삼고 근본을 버린 것에 가깝게 되어 버렸다. 이덕홍은 여행의 여운과 아쉬움을 달래며 기행문을 적으려 붓을 들었다.

오현암의 전설을 의심하다 테마스토리 이동

1716년 윤 3월 12일. 어제까지 엄경수는 일행들과 함께 용문산을 유람하였다. 오늘은 용문산 인근에 있는 회현암에 들러 고기잡이를 구경하였다. 회현암은 지평 고을의 신은천 옆에 있었는데, 모일 회(會) 어질 현(賢)자를 쓰는 암자였다. 고려 말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둔촌 이집이 이곳에서 모여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다섯 현인을 기려서 다섯 오(五)자를 써서 오현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엄경수가 생각해 보니, 당시 고려의 서울은 개경이었다. 이곳 지평 고을은 오늘날에도 궁벽한 강가의 외떨어진 산골짜기였다. 그렇다면 서울이 더욱 멀었던 고려시대에는 더더욱 궁벽한 시골이어서 서울의 벼슬살이 하는 사람이 올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의 현인이 동시에 이곳에 모인다는 것은 더욱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앞뒤로 들른 일을 가지고 이곳 사람들이 꾸며서 전하며 그곳 이름을 ‘오현암’이라고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 목은 이색이 여주 땅으로 귀양을 간 일이 있었다. 이곳은 여주와 멀지 않기에 이색이 나막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이곳에 놀러 오고, 나머지 네 현인은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곳에 모여 놀다가 함께 만났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이 오현암이란 곳이 다섯 현인이 모여 놀던 곳인지, 아니면 이곳 사람들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쟁쟁한 다섯 현인이 정자에 올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