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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서원과 권호문
이 이야기는 처사(處士) 남치리(南致利)를 서원에 모시는 일로 인근 고을 사림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서 남처사를 청성서원에 모시자는 내용이 있는데, 청성서원은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을 모신 서원이다. 권호문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이다. 교수를 역임한 권규의 아들이다.
1561년 30살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3년 후인 156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지내고는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청성안 아래에 무민재란 집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이 공부한 유성룡, 김성일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같은 동문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는 덕망이 높아져 학문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문인이 많았다. 조정에도 그의 학행이 알려져 집경전 참봉, 내시교관 등의 직이 내려졌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56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안동의 마감산에 묘지를 썼다. 사후 안동의 송암서원과 청성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평생을 자연 속에서 살았는데, 이 때문에 벗 유성룡은 그를 ‘강호고사(江湖高士)’로 칭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집(松巖集)』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 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등이 있다.
한편 청성서원은 1612년 권호문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였던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9년 도내 유림의 공의로 옛 터에 복원되었다. 강당인 중정당과 3칸의 동서재가 있으며, 사당에는 권호문의 위패가 단독으로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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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남치리를 배향하는 문제로 다투다 테마스토리 이동

1634년 8월 21일, 최근 처사(處士) 남치리(南致利)를 어느 서원에 모실 것인가를 두고 고을이 시끄러웠다. 김점(金點)을 위시한 무리들은 반드시 도산서원에 종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여강의 김시추(金是樞) 무리들은 청성서원에 합향하려고 서로 크게 다투는 데 이르렀다. 이 문제로 양측의 사람들이 서로 원망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김시추는 김점을 “젖내 나는 어린아이”라고 비방하였다 한다. 그러자 김점은 서원의 재임을 사직하면서 “앞으로 서원의 재임은 모름지기 누런 머리털의 노성한 늙은이로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한다. 김시추가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부른 데 대해 비꼰 말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이가 어린 김점이 김시추를 향해 이런 언사를 한 것은 경거망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시추 또한 거칠고 사나운 것이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듯 다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 명의 선학을 서원에 모시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니, 인근 고을 사람들이 충분히 논의하고 또 뜻을 모아야 할 터인데, 서로 자신의 이권이 있는 곳에 모시겠다고 헐뜯는다면, 차라리 모시지 않는 편이 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었다.

김시추가 남처사를 모시기를 주장하는 청성서원은 진사 권호문(權好文)을 모신 서원이었다. 남처사를 권호문의 배향으로 모시는 것에 사람들이 못마땅해하는 여론이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김점군이 크게 책잡아 배척하는 것은 후배로서 할 일은 아닌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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