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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매번 같지만 매번 새로운

1. 우리는 가치를 원한다. 가치 있는 물건, 가치 있는 시간과 가치 있는 사람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한다. 가치는 어떤 지향 혹은 방향을 의미하고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모든 시간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가치와 지향, 그리고 의미는 결국 같은 말이다. 물론 그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는 사람마다 매우 다른 법일 터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같이 하는 유쾌하고 따뜻한 시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계좌 입금을 알리는 휴대전화의 알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은 우리가 삶에 거는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모두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가 자신의 삶에서 온전히 확보되길 기대하고 또 그것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2.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가치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가치는 우리 주변에 단순히 널려 있는 형태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일상적으로 발견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가치는 희소성을 전제한다. 드문 것들이 가치 있다. 흔한 것들은 높은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의 여정을 꾸려나가지 않는다.

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낙엽들과 작은 돌덩이들이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니겠는가? 여름날 해변의 모래사장에 다이아몬드가 수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이 무슨 다이아몬드일 것인가? 만일에 클로버가 본래 네 잎으로 되어 있다면, 내가 주운 네잎클로버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세 잎으로 되어 있는 클로버가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리라.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 것, 그것은 가치의 필요조건이다.

3. 결국 가치있는 삶, 의미있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가치 혹은 의미가 고정된 형태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사리 자기 자신의 고독한 힘으로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 인간은 가치와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그것이 쉽게 길가의 평범한 나무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종교와 문학과 예술과 철학이 오랫동안 이 일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들이란 매우 허약해서 쉽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어렵사리 만들어낸 우리 사유의 구조물로서의 가치는 삶의 몇 가지의 경험, 타인의 매몰찬 비판 등에 의해서 쉽게 와해된다. 책 몇 권 읽고 형성한 가치가 죽기 전 마지막 호흡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인생이란 얼마나 간단한 연극일 것인가. 가치는 소멸하고 의미는 사라져간다. 결국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없다. 그래서 가치를 만드는 과정은 삶의 온 과정을 필요로 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대로 우리는 온 삶을 거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Adriaen van Utrecht, 1599~1652)가 그린 바니타스화〉


4.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소위 “바니타스화(Vanitas, 畵)”가 유행했다. ‘바니타스’는 허무, 헛됨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바니타스’는 구약성서 “전도서”의 유명한 구절로 잘 알려져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이 시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화는 헛된 삶의 여정을 엄숙한 정물화의 형태로 표현했다. 여기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삶은 헛되다. 삶은 결국 죽음에로 이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바니타스화는 매우 전형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사람의 해골이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그리고 그 회색빛 해골 주변으로 꽃과 열매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들은 성장과 결실의 표현이 아니다. 오로지 생의 순간성, 혹은 생의 덧없음을 드러낸다. 그 색은 빨강과 노랑이지만 화가의 눈은 그것이 저물었을 때의 회색으로 향해 있다. 바니타스화에는 학문적 노력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두툼한 책들 그리고 권력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화려한 왕관도 자주 등장한다. 또한, 삶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운명적 시간의 절대 권력을 표현하는 모래시계도 이 시기 바니타스화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바니타스화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윤리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소위 세속적인 도덕에의 권유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예술이다. 그것은 성서의 메시지에 직접적으로 기대지 않으면서도 삶의 윤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귀도 카냐치의 바니타스화〉


5. 이 시기에 그려진 수많은 바니타스 그림 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것은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카냐치(Guido Cagnacci, 1601∼1663)”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일반적인 바니타스화의 규범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아름답고 젊은 여인은 인간 육체의 덧없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시계,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꽃은 이제 곧 하염없이 저물고 말 인생을 은유하고 있다. 그의 왼팔 아래에는 바니타스화의 핵심 상징인 인간의 해골이 어두운 조명 아래 놓여 있다.

그런데 그림의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면 기존의 바니타스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상징을 만나게 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위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곳에는 어두운색의 원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자세히 보면 뱀 한 마리가 입을 벌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이는 “우로보로스(ouroboros)”라고 불리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오래된 상징물이다. 이 단어는 “꼬리”를 뜻하는 oura 그리고 “먹는”을 의미하는 boros 그 두 고대 그리스어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그것이 우로보로스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이지만, 이 상징이 처음으로 형상화된 것은 오래전 고대 이집트에서였다. 이를테면 우리는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이 우로보로스를 만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는 세상의 비밀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였다. 고대 이집트의 우로보로스는 2천 년 뒤 17세기 이탈리아에 왜 다시 나타났을까?

6.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사용하는 우리의 번잡스러운 삶의 환경을 벗어나서 끝없는 평지로 이루어진 이집트인들의 땅으로 들어가 보자. 거기에는 드넓은 황색의 대지와 그 사이를 흐르는 신비한 나일강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의 고대 이집트인들은 순환적 시간관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순환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돌고 돌아서 반복된다는 뜻이다. 시간이 반복되다니!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 아닌가? 한번 지나간 시간이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와서 반복될 수 있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의외로 간단한 이치이다. 태양은 어제도 떴고 오늘도 뜨고 내일도 뜰 것이다. 늘 같은 태양이다. 매일 새롭고 더 놀라운 태양이 우리 위로 뜨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을 위해서 뜨는 것도 아니다. 항상 동일한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오르며 하루를 연다. 봄이 지나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고 또다시 봄이 찾아오지만, 새로 오는 봄은 작년의 봄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뜨고 지고 다시 뜬다.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가다듬었던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잦은 범람을 겪으면서 이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강은 흘러넘친다. 신비의 강이 범람하여 모든 것을 삼키고 그래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세상은 이제 큰 어둠 속으로 영원히 잠기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저 잔인하게 세상을 삼켰던 광폭한 물은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하고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된다. 세상은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물론 어느 날 다시 강은 흘러넘치고 또 세상은 종말을 향해 달려나갈 듯하지만 대지는 굳건히 자신의 모습을 회복한다. 고대의 이집트인들은 이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은 반복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들의 문화 속에 깊게 새겨나갔다. 만물은 순환한다. 그에 따라 시간도 순환한다.

7. 이 순환성에 대한 상징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을 창조했다. 뱀의 몸이 머리에서 시작해서 꼬리로 이르지만, 그 꼬리는 다시 머리로 연결된다. 뱀의 몸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래서 이 우로보로스는 영원성에 대한 상징이다. 우로보로스는 자신을 먹음으로써 그러니까 자신의 몸이 자신 안에서 다시 살아남음으로써 부활을 상징한다. 처음과 끝, 끝과 처음이 연결되면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새로운 시간관을 보여준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카냐치”는 삶의 허무를 노래하는 바니타스화를 그리면서 무엇인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아름답지만 허무한 육체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의 시선은 영원성을 향해 있다.

8.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그래서 자신의 꼬리를 먹는 영원과 불멸의 뱀, 우로보로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올해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는 작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번 같은 시간, 같은 365일을 받는다.

시간은 매번 성취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을 위해서 존재하고 오늘이 내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때로 시간의 의미를 희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사실은 우리가 미래의 기준으로 현재를 비추어보면서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자면 그때조차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 그 희생의 현재적 의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두툼한 털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랫동안 스웨터를 짜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미래를 위해서 희생하는 현재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에게서는 그 긴 과정의 매 순간이 모두 하나하나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일 터이다.

의미는 매 순간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매 순간 존재하는 의미는 독립적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이다. 가치는 드문 것, 발견하기 어려운 것, 만들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반복되는 것, 그래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는 가치이다. 2025년 한 해에 의미와 가치들로 여러분들의 매 순간이 빛나길 기원한다.




집필자 소개

김수영
김수영
《웹진 담談》 초기 기획의 자문을 시작으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양여자대학교 웹툰과에 재직 중이며,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철학이 내 손을 잡을 때』가 있다.
“괴이한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다”

머리가 세 개 달린 개구리와 꼬리가 세 개달린 뱀이 싸우는 모습 박한광 외, 저상일월, 1921년

1921년, 박면진은 올해에만 세 가지 이상한 일을 들었다. 얼마 전 전주에서는 두 마리의 용마가 나왔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 신문에서는 이들을 홍옥마라고 하였다. 이들은 바람과 구름이 거세게 일어나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박면진이 사는 예천 고을의 수려비 앞에서 머리가 세 개나 달린 개구리와 꼬리가 세 개가 달린 뱀이 서로 싸워 결국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은 사건이 있었다. 머리가 셋 달린 것이 두 개나 나온 것도 신기하지만,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었다 하니 이 또한 괴이한 일이었다.

또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은현 마을의 들메나무 밑에 있는 논에서는 두꺼비 같기도 하고 개구리 같기도 한 것들이 몇 천, 몇 만 마리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몰려 있다고 한다. 이놈들이 서로 껴안은 듯이 거의 3두락 정도의 논을 꽉 메우고 있다가 10여 일 후에나 사라졌는데, 개구리 알 같은 것을 토해 놓고 떠났다 한다.

나라가 망한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또 이런 기분 나쁜 징조들이 나타나니 박면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 큰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런 징조들이 일본인들의 나라가 망할 징조는 아닐까? 박면진은 슬며시 이런 기대도 해 보았다.

“뱀에게 물려 죽은 종삼이”

뱀에 물린 노비 최흥원, 역중일기, 1763-07-11~

1763년 7월 11일. 맑고 간혹 구름이 끼는 더운 날이었다. 아들 주진이의 묫자리를 보기 위하여 오늘은 지관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지관을 부르러 가는 길에 타고 갈 요량으로 미리 말을 빌려 두었는데, 이 말을 잠시 보리를 옮기는 데 쓰다가 갑자기 넘어져 버렸다. 일어나긴 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니, 아마 이 말로 지관을 데려오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최흥원은 이런 소소한 일에도 한없이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최흥원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종들 중 종삼이란 녀석이 있었는데, 엊그제 뱀에게 물렸었다. 그런데 뱀독에 중독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살아날 가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종삼이란 녀석은 죽은 아들 주진이를 잘 따르던 녀석이었기에, 최흥원은 더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다.

아! 집주인이 덕이 없어 자꾸 이런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것일까. 최흥원 본인에게 무언가 액운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꾸만 집에서 가족과 종들이 죽어가는 일이 발생하자 최흥원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마저 데려가더니 이제는 아들이 가장 아끼던 종놈마저 데려가려 하다니. 최흥원은 하늘을 향해 원망마저 들기 시작하였다.

“뱀이 얼굴을 스치고 가다”

방에 들어온 뱀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양반 최흥원, 역중일기, 1763-06-01~

1763년 6월 1일. 아침이 되자 최흥원은 깜짝 놀랐다. 어젯밤에 방에 도둑이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도둑이 들었던 그 시각, 최흥원은 생전 처음 느끼는 아찔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제 최흥원은 아픈 아들 주진의 거처를 계정으로 옮겼다. 그리곤 셋째 아우를 만나보고는 다시 계정으로 돌아와 아픈 아이를 돌보았다. 설사가 그치지 않은 아들 주진은 피골이 상접하여 흡사 해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픈 아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괴롭고 아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렇게 고단하고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 삼경쯤 되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바로 그 순간, 엄청나게 큰 뱀 한 마리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리곤 불을 찾아 밝히고 가까스로 뱀을 때려 잡았다. 태어난 이래 그렇게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겨우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일어나 보니 뱀이 얼굴 옆을 스치던 그 시간, 최흥원의 방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를 알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최흥원 얼굴을 스친 뱀은 누군가가 일부러 풀어 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최흥원은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헤아려보다가, 결국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냥 한 번의 놀랄 만한 일로 여기고 지나가자. 최흥원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몇 자 되는 뱀을 때려죽이다”

종을 시켜 뱀을 잡는 모습 오희문, 쇄미록, 1596-06-16~

1596년 6월 16일, 오늘은 종일 음산하게 비가 내렸다. 말더듬이 계집종과 개금이, 그리고 품삭일꾼 두 명으로 하여금 어제 끝내지 못한 김매기를 시켰는데, 역시 오늘도 끝내지 못하였다. 밤에 창 앞에 누워 있는데, 처마 끝에서 잠자던 새들이 놀라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상한 생각에 올려다보니 뱀이 새집을 찾으며 처마에 걸려 있었다. 깜짝 놀란 오희문은 종 덕노를 시켜서 갈고리로 뱀을 걸어 내려서 때려죽였다.

뱀이 오희문 집에 나타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0일경 그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처마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올려다보니 처마 끝에 뱀이 걸려 있었다. 그 뱀은 길이가 무려 몇 자나 되고 검붉은 반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사가 분명하였다. 새집을 찾아서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갔던 것이다. 만일 잡아 죽이지 않으면 필경 사람을 해칠 뻔했으므로, 뱀을 잡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잡은 뱀을 보니 얼룩진 무늬가 먼젓번 죽였던 뱀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이 있는 뱀이 이와 같이 자주 출몰하니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큰 뱀을 두 마리나 잡아 죽였으니, 혹 집안에 이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오희문은 마음에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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