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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뱀의 해가 오다


〈십이지신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섣달그믐. 이제 하룻밤만 자면 해가 바뀐다.

“내년은 뱀의 해라고 하던데?”

백이가 뭐든 잘 아는 목금에게 물었다.

“해마다 그 해를 대표하는 동물이 있어. 쥐부터 시작해.”

“뭐? 하필 징그러운 쥐가 제일 먼저야?”

“쥐는 몸집은 작지만 아주 똑똑하잖아. 신령님이 각 해를 정할 동물 열두 마리를 뽑았는데 제일 먼저 오는 동물 순서로 정하기로 했대.”

“쥐는 조그만데? 그런데도 제일 먼저 온 거야?”

“들어봐. 쥐는 소머리 위에 올라타서 편하게 왔다는 거야. 결승선에 도착하자 폴짝 뛰어내려서 일등이 되었다지.”

백이가 그 말에 깔깔 웃었다.

“정말 꾀돌이구나. 그럼 두 번째는 소?”

“아주 장거리였던 모양이야. 꾸준히 걸어온 소가 두 번째. 그리고 소를 잡아먹고 싶어 따라온 호랑이가 세 번째, 호랑이 뒤에는 유유히 날아온 용이 있었고 그 뒤가 뱀이야.”

“뱀이 꽤 빠르네?”

“그치? 그 뒤로는 말, 양, 개, 돼지 순이야.”

백이가 깔깔 웃었다.

“역시 뚱뚱하고 게으른 돼지가 꼴찌구나.”

목금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돼지 팔자가 상팔자지, 뭐. 돼지 이야기하니까 배고프다. 아직 저녁 시간 안 됐냐?”

얼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두 소녀는 모두 배가 고팠다. 백이가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 음식 많이 해놨을 텐데, 가서 좀 집어먹자.”

“그래도 될까?”

“안 될 게 뭐 있어. 오늘 너 좋아하는 명태보푸리도 만든다고 했어.”

북어를 두들겨서 실처럼 만들어내는 명태보푸리는 아침부터 죽어라 북어를 두들겨야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다. 말만 들어도 군침이 넘어갔다.

“산적에, 호박전에 나물 반찬도 다 만든다고 했어. 가보자!”

아기씨가 부엌에 간식거리 찾아 나왔다고 하자 찬모가 펄쩍 뛰었다.

“뭘 그런 걸로 여기까지 걸음을 하세요. 삼월이한테 간식 상 차려서 올려보낼게요. 유밀과와 약과, 깨강정, 호박엿, 단술까지 골고루 보내드리겠습니다.”

“헤헤, 알았어요. 그럼, 찬모만 믿을게요.”


〈섣달그믐 저녁에는 남은 음식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골동반(骨董飯, 비빔밥)을 먹었다.〉
(출처: 궁중음식연구원)


간식을 그렇게 거하게 먹어 치운 탓에 저녁밥은 잘 들어가지를 않았다. 백이가 깨작거리며 밥을 먹자, 어머니가 타박을 해주었다.

“밥을 그렇게 먹어서야 밤을 새울 수 있겠니?”

“밥 많이 먹으면 졸려서 밤 못 새워요.”

“작년에도 그러다가 나중에 배고프다고 간식 더 먹고는 엎어져 잤잖아?”

“으…맞아요. 아침에 눈썹이 하얘졌을까 봐 엄청 걱정했다고요.”

백이가 목금을 쳐다보고 물었다.

“그런데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눈썹은 왜 하얘지는 거야?”

목금이 뭐든 척척 알긴 하지만 이런 것도 알고 있겠다고 생각하여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목금은 얼른 대답해 주었다.

“삼시충 때문이야.”

“삼시충?”

“응. 사람 몸에는 시충이라고 부르는 벌레 세 마리가 있대.”

백이가 펄쩍 뛰었다.

“으익! 어디에 벌레가 있어?”

목금이 히죽 웃었다.

“눈에 보이는 그런 거 아냐. 우리 몸속에 있는 거야.”

“몸속 어디?”

“한 마리는 이마 가운데, 한 마리는 심장에, 한 마리는 배꼽 아래 단전에 있대.”

백이가 놀라서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나 가끔 머리 아픈 게 이 벌레 때문인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와, 그럼 이거 어떻게 없애?”

“불러낼 수 있어. 딱 오늘만 가능하거든.”


〈액귀를 쫓는 《용호문배도(龍虎門排圖)》. 그믐 이른 새벽에는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았다. 이러한 그림을 문배(門排) 또는 세화(歲畵)라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무당집에 잘 다니는 백이 어머니도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사람 몸에 있는 삼시충은 평소에 잘잘못을 기록해 놓았다가 섣달그믐,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그걸 바친다고 해. 그래서 잘못에 따라 수명을 줄인다고 해.”

백이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뭐라고? 그거 큰일 아냐?”

“그래서 잠이 들면 안 되는 거야. 잠을 자지 않으면 삼시충이 몸에서 빠져나가질 못하거든.”

“아하, 그런 거야? 그럼, 삼시충이 빠져나가면 눈썹이 하얘지는 거야?”

“옥황상제가 잘못에 따라 내리는 벌이라 그렇다고 해.”

“와, 나 오늘 진짜 안 잔다.”

백이가 씩씩대며 말했다. 그러다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잘못을 안 저지르면 되는 거 아냐? 왜 똑바로 살지 않고 벌레가 고자질한다고 그거만 막으려고 하는 거지?”

“맞아, 맞아. 사실 이 이야기는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해서 만든 이야기라고도 해. 영조 대왕이 그래서 이런 일은 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어.”

“그것 봐. 어쩌면 말야. 그냥 섣달그믐에 신나게 놀려고 만든 이야기일지도 몰라.”


〈경북 고령군에서는 매해 ‘경신수야, 고령향교 콘서트’를 진행한다.〉 (출처: 고령뉴스)


백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목금이도 빙그레 웃었다. 사실 삼시충은 섣달그믐에만 하늘에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원래는 경신일마다 즉 60일마다 몸에서 빠져나간다. 그래서 경신일에는 잠을 안 자는 경우도 있었다. 동지가 지난 뒤에 오는 경신일에 밤을 새우는 일을 일곱 번 하면 삼시충을 죽일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경신수야(庚申守夜)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늘에 죄를 고하는 것은 삼시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짓달 24일에는 부엌신이 하늘에 올라가 인간의 죄를 고한다고 하는데, 이날도 불을 환히 켜고 잠을 안 자며 노는 날로 교년일(交年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목금은 오늘 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걸 위해 우선 백이가 잠이 들어줘야 했다.

“오늘 안 자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많이 먹어.”

“좋아! 기운 나게 많이 먹고 안 잘 테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먹은 건 결국 손해였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꾸벅꾸벅 졸던 백이는 급기야 잠이 들었다.

목금은 백이가 잠에 빠져든 것을 보자 불을 껐다. 섣달그믐에는 사방에 불을 켜두는데 그렇게 해서 삼시충이 낮인 줄 알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어두워지자 백이의 귀와 입에서 세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목금은 이미 준비해 둔 대나무를 백이 얼굴 위에 들고 있었다. 삼시충이 좋아하는 오곡이 들어있는 대나무 통이었다. 삼시충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갈 듯하다가 대나무 통의 유혹을 버티지 못하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목금이 얼른 대나무 통의 입구를 닫았다. 통이 가볍게 흔들렸다.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태상의 영부(靈符)와 오악신부(五岳神符)를 받나이다. 왼손에는 인장을 들고, 오른손에는 창을 들며, 해와 달이 가슴에 들어오고, 탁한 기운은 나가고 맑은 기운이 들어오나이다. 삼시충 팽거는 나가고, 팽질은 나가고, 팽교는 나가나이다. 급급여율령!”

백금이 주문을 외웠다. 팽거, 팽질, 팽교는 삼시충의 이름이다. 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깜짝 놀란 백금은 그만 대나무 통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통이 갑자기 구불텅하고 ㄹ자로 구부러졌다. 부러진 건가 싶어 집으려 하는데 대나무 통이 재빨리 달아났다. 그것은 더 이상 대나무 통이 아니었다. 뱀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자정이 넘어갔구나.”

목금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새해는 뱀의 해, 그 기운을 받아서 영험한 신의 사자 삼시충이 깃든 대나무가 뱀의 모습을 갖춘 것이었다.


〈뱀 모양이 그려진 《화조도》〉 (출처: 경기대학교 박물관)


대나무 색을 따라 초록색 작은 뱀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목금을 바라보았다. 목금도 초록색 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뱀은 두 갈래 진 혀를 내밀어 목금의 손을 핥았다. 목금이 조심스럽게 뱀을 쓰다듬었다. 자그만 뱀은 목금의 손목을 따라 한 바퀴 휘감으며 자기 꼬리를 입에 물더니 그대로 굳어졌다. 대나무 통은 이번에는 뱀 모양의 초록색 팔찌가 되어버렸다.

“으응, 나 잠든 거야?”

그때야 백이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잠들려고 해서 내가 깨운 거야.”

목금이 웃으며 말했다.

“새해가 됐어?”

“됐어. 이제 자도 괜찮아.”

백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기분이 너무 맑고 상쾌해. 새해가 되어서 그런가?”

목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 네 몸에서 삼시충을 뽑아내서 그럴 거야.”

“삼시충을 뽑아냈다고?”

“이거 봐.”

목금이 왼쪽 손목에 걸린 뱀 모양의 초록색 팔찌를 내보였다.

“이게 뭔데?”

“이게 네 삼시충으로 만든 팔찌야. 네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잡았더니 이렇게 팔찌가 되어버렸어.”

백이가 깜짝 놀랐다.

“올해가 뱀해라서 뱀이 된 거야?”

“그런가 봐.”

“아깝다. 올해가 개해였으면 예쁜 강아지가 됐을 텐데. 뱀은 좀 징그럽잖아.”

“뱀이 뭐 어때서. 나는 뱀 좋아. 뱀은 똑똑하거든.”


〈조선후기의 명필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산광수색(山光水色)》. 4마리의 뱀이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이삼만은 아버지가 뱀에 물려 죽은 후, 뱀을 보는대로 잡아죽였다고 하는데, 이 영향으로 호남지역에서는 아직도 뱀을 쫓기 위해 ‘이삼만’이라는 글씨를 거꾸로 붙이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뱀이 똑똑해?”

“〈주역〉에 용사지칩(龍蛇之蟄)이라는 말이 있어. 자벌레가 몸을 움츠리는 것은 펴고자 하는 것이요, 용과 뱀이 칩거하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함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상황이 불리할 때면 몸을 감추는 것이 유리하다는 거지. 뱀은 그런 걸 할 줄 아는 똑똑이라는 말이고. 또 사함초(蛇含草)라는 풀에서도 알 수 있어. 사함초는 뱀을 품고 있는 풀이라는 뜻인데, 뱀에게 물렸을 때 이 풀의 즙을 바르면 나을 수 있는데, 이 풀의 사용법을 알려준 것도 뱀이라고 해. 상처 입은 뱀이 이 풀에 몸을 비비고 있어서 알게 된 거라지.”

“사함초라는 말은 처음 들어봐. 어떤 풀이야?”

백이의 질문에 목금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잘 아는 풀이야. 우리 초여름에 놀러 갔을 때 이걸로 가락지 만들어서 끼고 놀았거든.”

“아, 그 가락지나물!”

“맞아, 맞아 그거야. 뱀이 뱀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해독제도 알려준 셈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백이가 다시 도리질을 쳤다.

“그래도 나는 뱀이 징그러워.”

목금이 말했다.

“이 팔찌는 원래 네 삼시충인 셈이니까 네가 가져갈래?”

백이는 심할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절대 싫어!”

“뱀은 재물을 지키는 신이기도 한데? 창고에 살면서 그 집의 재산을 지켜준다고. 우리가 흔히 업신이라고 부르는 게 대체로 구렁이야.”

“그, 그만. 뱀 이야기는 충분해!”

“뱀은 허물을 벗어 새로 태어나는 존재잖아? 그래서 계속계속 번창해 가기 때문에 재물신으로 섬기는 거야.”

백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충분하다고 했지? 더 말하면 불돌이 불러서 그 팔찌 태워버리라고 한다.”

불돌이는 백이네 아궁이 속에 사는 불길을 일으키는 새, 양수지조(陽燧之鳥)다. 백이의 말에 이번에는 목금이 깜짝 놀랐다. 목금이 얼른 팔찌를 오른손으로 보호하듯이 가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 하지만 올해가 뱀의 해라는 건 안 잊었겠지?”

목금이 팔찌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아, 알아. 올 한 해는 뱀한테서 벗어날 수가 없겠네.”

백이한테는 아직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 팔찌의 뱀이 두 갈래 진 혀로 자신을 쓰다듬고 있는 목금의 손가락을 할짝거리고 있다는 것을.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괴이한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다”

머리가 세 개 달린 개구리와 꼬리가 세 개달린 뱀이 싸우는 모습 박한광 외, 저상일월, 1921년

1921년, 박면진은 올해에만 세 가지 이상한 일을 들었다. 얼마 전 전주에서는 두 마리의 용마가 나왔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 신문에서는 이들을 홍옥마라고 하였다. 이들은 바람과 구름이 거세게 일어나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박면진이 사는 예천 고을의 수려비 앞에서 머리가 세 개나 달린 개구리와 꼬리가 세 개가 달린 뱀이 서로 싸워 결국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은 사건이 있었다. 머리가 셋 달린 것이 두 개나 나온 것도 신기하지만,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었다 하니 이 또한 괴이한 일이었다.

또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은현 마을의 들메나무 밑에 있는 논에서는 두꺼비 같기도 하고 개구리 같기도 한 것들이 몇 천, 몇 만 마리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몰려 있다고 한다. 이놈들이 서로 껴안은 듯이 거의 3두락 정도의 논을 꽉 메우고 있다가 10여 일 후에나 사라졌는데, 개구리 알 같은 것을 토해 놓고 떠났다 한다.

나라가 망한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또 이런 기분 나쁜 징조들이 나타나니 박면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 큰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런 징조들이 일본인들의 나라가 망할 징조는 아닐까? 박면진은 슬며시 이런 기대도 해 보았다.

“뱀에게 물려 죽은 종삼이”

뱀에 물린 노비 최흥원, 역중일기, 1763-07-11~

1763년 7월 11일. 맑고 간혹 구름이 끼는 더운 날이었다. 아들 주진이의 묫자리를 보기 위하여 오늘은 지관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지관을 부르러 가는 길에 타고 갈 요량으로 미리 말을 빌려 두었는데, 이 말을 잠시 보리를 옮기는 데 쓰다가 갑자기 넘어져 버렸다. 일어나긴 했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니, 아마 이 말로 지관을 데려오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진 최흥원은 이런 소소한 일에도 한없이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최흥원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종들 중 종삼이란 녀석이 있었는데, 엊그제 뱀에게 물렸었다. 그런데 뱀독에 중독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살아날 가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종삼이란 녀석은 죽은 아들 주진이를 잘 따르던 녀석이었기에, 최흥원은 더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다.

아! 집주인이 덕이 없어 자꾸 이런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것일까. 최흥원 본인에게 무언가 액운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꾸만 집에서 가족과 종들이 죽어가는 일이 발생하자 최흥원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마저 데려가더니 이제는 아들이 가장 아끼던 종놈마저 데려가려 하다니. 최흥원은 하늘을 향해 원망마저 들기 시작하였다.

“뱀이 얼굴을 스치고 가다”

방에 들어온 뱀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양반 최흥원, 역중일기, 1763-06-01~

1763년 6월 1일. 아침이 되자 최흥원은 깜짝 놀랐다. 어젯밤에 방에 도둑이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도둑이 들었던 그 시각, 최흥원은 생전 처음 느끼는 아찔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제 최흥원은 아픈 아들 주진의 거처를 계정으로 옮겼다. 그리곤 셋째 아우를 만나보고는 다시 계정으로 돌아와 아픈 아이를 돌보았다. 설사가 그치지 않은 아들 주진은 피골이 상접하여 흡사 해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픈 아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괴롭고 아픈 마음을 스스로 달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그렇게 고단하고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 삼경쯤 되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바로 그 순간, 엄청나게 큰 뱀 한 마리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리곤 불을 찾아 밝히고 가까스로 뱀을 때려 잡았다. 태어난 이래 그렇게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겨우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일어나 보니 뱀이 얼굴 옆을 스치던 그 시간, 최흥원의 방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최흥원은 이를 알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최흥원 얼굴을 스친 뱀은 누군가가 일부러 풀어 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최흥원은 그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헤아려보다가, 결국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냥 한 번의 놀랄 만한 일로 여기고 지나가자. 최흥원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몇 자 되는 뱀을 때려죽이다”

종을 시켜 뱀을 잡는 모습 오희문, 쇄미록, 1596-06-16~

1596년 6월 16일, 오늘은 종일 음산하게 비가 내렸다. 말더듬이 계집종과 개금이, 그리고 품삭일꾼 두 명으로 하여금 어제 끝내지 못한 김매기를 시켰는데, 역시 오늘도 끝내지 못하였다. 밤에 창 앞에 누워 있는데, 처마 끝에서 잠자던 새들이 놀라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상한 생각에 올려다보니 뱀이 새집을 찾으며 처마에 걸려 있었다. 깜짝 놀란 오희문은 종 덕노를 시켜서 갈고리로 뱀을 걸어 내려서 때려죽였다.

뱀이 오희문 집에 나타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0일경 그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처마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올려다보니 처마 끝에 뱀이 걸려 있었다. 그 뱀은 길이가 무려 몇 자나 되고 검붉은 반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사가 분명하였다. 새집을 찾아서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갔던 것이다. 만일 잡아 죽이지 않으면 필경 사람을 해칠 뻔했으므로, 뱀을 잡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잡은 뱀을 보니 얼룩진 무늬가 먼젓번 죽였던 뱀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이 있는 뱀이 이와 같이 자주 출몰하니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큰 뱀을 두 마리나 잡아 죽였으니, 혹 집안에 이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오희문은 마음에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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