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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웹진 '담談' 88호 - 호국보훈의 달 특집, 나라를 지키는 N가지 방법

글쓴이 : 관리자 [ 2022-02-24 ]



역경 속 나라 지키기 위한 이름없는 선열들의 노력 뭉클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노고에 감사하고 일상의 소중함 일깨워

‘적국 기술은 곧 우리 기술’
임란때 일본 총·검술 습득해
무예제보 등 서적 편찬·전승
6·25 군수품 수송 지게부대
3·1운동 동참 기생 33인 등

6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뜻 깊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조선의 선인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재 양성, 군비 증강, 무기 개량, 전략·전술의 개발 등에 갖가지 노력을 쏟았다.
조선의 선인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귀갑선 건조, 무예, 군사 복식, 무관의 일기 속 이야기 등 다양한 사연과 노력을 소개한다.
◇ 왜적을 채용해 검술을 익히고 기록

허인욱 박사의 '무예를 익혀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에서는 임진왜란 중에 명의 무예와 일본의 검술을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 조선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오랫 동안 큰 변란이 없던 조선에서는 병사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하지 않아 임진왜란 초기 일본과의 근접전에서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리는 상황이 됐다. 조선은 왜구를 막는데 효과적인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받아들였고, 낙상지(駱尙志)와 같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가르침을 청해 군사를 훈련했으며, 무예훈련을 전담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만들어 당장 전장에서 쓸 수 있는 무기술 위주로 훈련도 했다.
'선조실록'의 선조 25년(1592) 10월의 기록에서 선조는 적국인 일본의 총술과 검술, 무기까지도 습득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에 항복한 항왜인들에게 군직을 주고 급료를 주면서까지 총과 검을 만들게 하고 검술과 총술을 가르치게 했다. 특히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착실히 익히라”라는 선조의 비망기에서 나라를 위해 자존심도 굽힌 임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익힌 무예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공유하기 위해 각종 무예서를 남기는 일도 계속했다. '무예제보(武藝諸譜)'및 '무예제보'에서 빠진 무예를 모아 광해군 2년(1610)에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간행했다. 무예서의 발간은 영조와 정조대에도 이어진다. 영조 35년(1759)에는 사도세자에 의해 18가지 기예가 정리된'무예신보(武藝新譜)'와 정조 14년(1790)에 '무예신보'를 증보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그것이다. 한문에 능숙하지 못한 이들이어도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한글로 편찬하기도 했다. 다시 전쟁이 발생한다면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철저히 실용의 태도였다.

◇ 열악한 군수물자와 더위로 인해 졌어도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전투

권병훈 전통 의상 '오례' 대표는 '등투구 유물로 보는 조선 말기 군사 복식 이야기'에서 소장 중인 등투구(藤兜牟)와 면제배갑을 통해 고종 때 열강의 침략을 대비하던 조선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중국 남부지역 및 베트남에서도 사용하는 등투구는 덥고 습한 날씨로 인해 철갑은 무겁고 잘 부식돼 그 지역 전쟁에서는 적합하지 않아 시원하고 가벼우며 방어력이 있는 대체품인 등나무를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여러 열강의 침입이 노골화되자 방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군복에도 개혁을 시도했다. 무명 12겹을 겹쳐 만든 면제배갑(綿製背甲)은 조총 탄환을 막을 수 있고, 가슴, 어깨, 배 정도를 가려주는 배자와 유사한 형상이었다. 이 면제배갑과 함께 여름철에는 등투구를 쓰고 훈련에 임했다고 한다. 더운 여름, 무명 12겹을 겹친 면제배갑을 입은 군사들이 코피를 쏟았다는 기록이 있다. 군사들은 얼마나 덥고 훈련이 괴로웠을까? 그때 무더운 햇빛을 가려주고 머리를 보호해 주는 등투구가 훈련 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 만든 면제배갑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외세의 침략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이후에 이어진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인해 그 개혁의 결과물은 허무하게도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가 쓰고 있던 화살이나 조총의 탄환은 12겹 정도가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던 듯하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당시 미군의 총탄은 파괴력이 더욱 뛰어난 탓에 착용하고 있던 면제배갑은 무용지물이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무더운 여름에 치러진 전투다보니 앞서 언급한 문헌 기록처럼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더워서 탈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군은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끝내 적에게 투항하지 않고 중군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을 비롯한 장수서부터 군졸들 대부분이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어찌보면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이 서구 열강에서 사용하던 신식 무기에 대해 나름 현실적인 상황과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을 이용해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 끝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후략)

출처 : 대경일보   


■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88호 보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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