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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토리

  •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 친정에 간 여인들,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을까? 『계암일록』에서 김령은 종종 아내가 친정에 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20년 11월, 1622년 2월, 1622년 6월의 기사에 실려 있다. 이를 근친(覲親)이라고 하는데,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만나는 일을 말한다. 김령의 처가는 내성(柰城)으로, 1620년 11월 13일, 셋째 아이를 대동하여 근친을 간 김령의 아내는 한 달을 친정에서 보내고 12월 13일에 돌아온다. 1622년 2월에는 며느리의 친정에 수연(壽宴 : 환갑잔치) 등 행사가 있자, 며느리를 근친보내기도 하였다. 1622년 6월 20일에는 그해로 84세를 맞는 장모의 생신이 다가오자, 큰 아들과 손자를 대동하여 아내를 근친보내기도 하였다.

  • 말과 붓, 종이를 분주히 준비하다 - 아들의 과거 시험을 위해 애쓰다 1617년 6월 21일, 김택룡은 하인 어질동과 조복중(曺福中)의 아들을 불러 과거시험 장소[시소(試所)]인 의흥(義興)으로 보냈다. 아들 김각이 시험을 보러 가기 때문에 미리 살펴두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택룡은 신안현감(新安縣監) 김중청(金中淸)에게 편지를 썼다. 황유문이 향시(鄕試)를 보기 위해 경상우도의 시험장소로 결정된 신안(新安, 현재의 星州)으로 가기 때문에 그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황유문은 이 날 택룡에게 들러 인사하고 신안으로 떠났다. 또 같은 날, 고모(皐母)가 대평이 기르던 말을 몰고 택룡의 영천 산장으로 왔다. 김각이 향시를 보러 갈 때 타고 가기 위해서였다. 사흘 뒤, 6월 25일 택룡은 아들에게 줄 시험에 쓸 붓[시필(試筆)]을 빌리기 위해 이영도(李詠道)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역동서원에 가는 길에, 그 곳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영도에게 전하도록 하고 또 답장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택룡은 다음 날 제사를 위해 재계하고 제물(祭物)을 점검하고 준비하였다. 제사 준비를 마친 후, 택룡은 사랑채에 들어가 명지[名紙, 과거답안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종이]를 잘라서 아들 김각의 녹명단자(錄名單子)를 쓰고 피봉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심학해 · 심용해 · 심이달의 명지(名紙)도 모두 각의 것과 같이 마름질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음 날 출발할 계획이었다. 저녁에 택룡은 이영도의 답장을 받았는데, 사정이 있어서인지 붓을 보내주지 않았다. 6월 26일, 먼동이 틀 무렵 택룡은 어머니 신주를 사묘(祠廟)에서 모셔 내어 제사를 지냈다. 택룡의 아들 김숙 · 김각 · 생질 정득 그리고 여러 손자들이 제사에 참례하였다. 해거름 무렵에 김각 · 심학해 · 심용해 · 심이달 · 손흥선 등이 향시(鄕試)를 보기 위해 의흥(義興)으로 떠났다. 택룡은 의흥현감 이유청(李幼淸)에게 편지를 써서 이들에게 객지의 불편함을 면하게 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택룡은 그가 그렇게 해 줄지 확신은 할 수 없었다. 7월 2일 의흥 과거 시험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4일 뒤 7월 6일이 되자 의흥에 과거 보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택룡의 아들 김각도 돌아왔다. 7월 9일 택룡은 과거 합격자 소식을 들었다. 예안에서 합격한 사람은 13명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아들 김각은 실패했다. 이유도가 생원시에 장원을 했다고 하였다.

오늘의 일기

노새 한 마리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길을 떠나네 - 지리산 유람의 시작

http://diary.ugyo.net/viewer/view?#node?itemId=DY&cate=img&depth=3&upPath=&dataId=ACKS_DY_00500144_0010_000_00000 송병선(宋秉璿), 두류산기(頭流山記) 1879-07-30 ~

1879년 7월 30일, 지리산(智異山)은 우리나라의 남악〔南嶽,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다섯 명산, 즉 오악의 하나로서, 남쪽의 지리산을 말함. 오악은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을 말함〕으로 백두산(白頭山)의 지류가 흘러 이 산을 이루었기 때문에 또한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송병선은 일찍이 지리산 북록(北麓)을 유람했었다. 〔[지리산북록기]가 있음〕 기묘년(己卯年, 1879년, 고종 16년) 초가을 음력 7월에 묵은 빚을 갚는 기분으로 노새 한 마리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고종사촌 동생 김성례(金聖禮)는 일이 있어서 같이 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단성(丹城)의 사인(士人) 달지(達支) 이근배(李根培)가 때마침 그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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