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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둑을 뒤쫓다 쏜 화살 - 도둑은 사자(死者)가 되고, 도둑 쫓던 자는 살인자가 되다
1616년 7월 7일, 이 날 김택룡은 입석천(立石川) 가에서 열린 칠석 모임에 참석했다가 저녁 무렵에야 집에 돌아왔다. 피로에 지친 탓이었을까? 깊은 잠에 빠졌다가 새벽녘에 언뜻 깨었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하인이 달려와 간밤에 도둑이 들어 택룡이 타던 말을 훔쳐 갔다고 고한다. 마구간의 문짝을 통째로 떼어내고 훔쳐 갔단다. 택룡은 속이 상해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날이 밝자마자 두 아들과 조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땅에 남은 말발자국을 추적했다. 얼마쯤 뒤따라가니 말발자국이 고운암(孤雲巖)을 지나 안동 가는 길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택룡의 큰 아들 숙이가 급한 마음에 정정(鼎井)의 자기 집으로 달려가 막복이 · 일년이 · 개석이 등 자기 집 노비 세 명을 데리고 말도둑 뒤를 부랴부랴 쫓아갔다. 그리고 택룡의 아우와 조카, 또 그의 노비 두어 명이 양식을 메고 큰 아들 일행을 뒤쫓아 안동 방향으로 갔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와서 상심한 택룡을 위로했다. 택룡은 소경 점쟁이를 불러 말을 찾을 수 있을지 점을 쳤다. 소경 점쟁이가 점괘가 길하므로 아마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 이틀 뒤 아침, 말도둑을 쫓아갔던 택룡의 조카가 택룡에게 와서 도둑을 잡았다고 말했다.
“아재, 말도둑놈은 우리 집 춘금이 놈이더구만요. 의성과 안동 경계쯤에서 춘금이와 도둑맞은 말을 결국 잡았습니다. 큰 형님 일행이 먼저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가 합류해서 끌고 왔죠. 근데 오는 길에 하필 날이 저물어 인근에 묵었다가 춘금이를 놓칠 뻔했어요. 아 이 놈이 묶어놓았는데도 간밤에 용케 도망을 쳤지 뭡니까. 새벽에 알아채고 그 놈 발자국을 또 쫓아갔는데, 멀리 보여서 막복이가 활을 쏘아 맞혔어요. 활에 맞아 넘어진 놈을 결박해서 겨우 붙잡아왔습니다.”

택룡은 춘금이를 보자마자 호통치며 물었다.
“네 혼자 훔쳐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히 내부 공모자가 있었을 터, 그게 누구냐?”

춘금이가 우물쭈물 운학이와 축생이 두 놈 이름을 대었다. 베 두 필씩으로 꼬드겼더니 두 놈이 얼싸구나하고 말을 나루터까지 끌어내주었다는 것이다. 택룡은 괘씸해서 씩씩대며, 사람을 시켜 밭 갈러 가있던 두 종놈을 끌고 오게 했다. 춘금이와 운학이 축생이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대질을 시작하니, 동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담처럼 둘러싸고 구경하였다. 한참을 대질한 후에 택룡의 큰 아들 숙이가 세 놈을 관아에 넘기기 위해 직접 데리고 갔다. 그런데 마침 국기일(國忌日)이라 범인진술[공초(供招)]과 심문[장문(杖問)]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칼을 씌어 단단히 가두는 것만 보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이 관아로 가서 현감을 만났더니, 밤사이에 춘금이 죽었다고 하였다. 막복이 쏜 화살 때문이었다. 현감은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갔다. 그리고는 춘금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불러 사건을 설명하고 관찰사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순식간에 말도둑 사건이 살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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