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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붓, 종이를 분주히 준비하다 - 아들의 과거 시험을 위해 애쓰다
1617년 6월 21일, 김택룡은 하인 어질동과 조복중(曺福中)의 아들을 불러 과거시험 장소[시소(試所)]인 의흥(義興)으로 보냈다. 아들 김각이 시험을 보러 가기 때문에 미리 살펴두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택룡은 신안현감(新安縣監) 김중청(金中淸)에게 편지를 썼다. 황유문이 향시(鄕試)를 보기 위해 경상우도의 시험장소로 결정된 신안(新安, 현재의 星州)으로 가기 때문에 그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황유문은 이 날 택룡에게 들러 인사하고 신안으로 떠났다. 또 같은 날, 고모(皐母)가 대평이 기르던 말을 몰고 택룡의 영천 산장으로 왔다. 김각이 향시를 보러 갈 때 타고 가기 위해서였다.
사흘 뒤, 6월 25일 택룡은 아들에게 줄 시험에 쓸 붓[시필(試筆)]을 빌리기 위해 이영도(李詠道)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역동서원에 가는 길에, 그 곳 사람에게 부탁하여 이영도에게 전하도록 하고 또 답장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택룡은 다음 날 제사를 위해 재계하고 제물(祭物)을 점검하고 준비하였다. 제사 준비를 마친 후, 택룡은 사랑채에 들어가 명지[名紙, 과거답안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종이]를 잘라서 아들 김각의 녹명단자(錄名單子)를 쓰고 피봉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심학해 · 심용해 · 심이달의 명지(名紙)도 모두 각의 것과 같이 마름질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음 날 출발할 계획이었다. 저녁에 택룡은 이영도의 답장을 받았는데, 사정이 있어서인지 붓을 보내주지 않았다.
6월 26일, 먼동이 틀 무렵 택룡은 어머니 신주를 사묘(祠廟)에서 모셔 내어 제사를 지냈다. 택룡의 아들 김숙 · 김각 · 생질 정득 그리고 여러 손자들이 제사에 참례하였다. 해거름 무렵에 김각 · 심학해 · 심용해 · 심이달 · 손흥선 등이 향시(鄕試)를 보기 위해 의흥(義興)으로 떠났다. 택룡은 의흥현감 이유청(李幼淸)에게 편지를 써서 이들에게 객지의 불편함을 면하게 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택룡은 그가 그렇게 해 줄지 확신은 할 수 없었다.
7월 2일 의흥 과거 시험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4일 뒤 7월 6일이 되자 의흥에 과거 보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택룡의 아들 김각도 돌아왔다.
7월 9일 택룡은 과거 합격자 소식을 들었다. 예안에서 합격한 사람은 13명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아들 김각은 실패했다. 이유도가 생원시에 장원을 했다고 하였다.
댓글
  • cmlee4603 2023-10-11 PM 09:13
    예전에는 양반가문 자손들이 대대로 양반행세를 하려면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야 했는데, 위 일기를 읽어 보니 그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가정의 준비모습은 오느날에 비해 더욱 정성스럽고, 더욱 지난한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늘날은 직업이 다양하고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진데다가,양반 상놈 구분도 없는 사회라 굳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식, 입법고시 등을 기필코 통과해서 벼슬길로 나서고, 이를 통해 양반가문의 체통을 지커야만 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도 고시를 준비하는 분들이나 그 가족들의 노심초사가 이만저만이 아님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옛날에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당사자나 그 가족들의 노심초사가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딱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한편으로 요즘 세태는 벼슬보다도 돈 잘 버는 의사를 선호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장차 이 나라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또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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