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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관리에게 아들 장례에 쓰일 인력과 물품을 요청하다
1617년 2월 27일, 김택룡은 큰아들 김숙이 안동[화산(花山)]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정리의 제 집으로 간다하기에 그 편에 관찰사와 안동 부사에게 보낼 편지를 주어 보냈다.
편지를 보낸 것은 죽은 아들 김적의 장례를 도울 일꾼과 곽판(槨板)[槨板, 관을 만드는 널빤지] 마련에 관련된 것이었다.

3일 후 2월 30일, 큰아들 김숙이 안동에서 돌아와 안동부사[화백(花伯)]의 답장편지를 김택룡에게 전했다. 안동부사가 부조로 재산(才山)의 콩과 조 각 1섬, 그리고 번회군[燔灰軍, 상여를 매거나 등을 드는 등 호송하는 등의 일을 돕는 사람] 40명을 첩(帖)으로 보조해주었다. 그러나 관곽으로 쓸 나무는 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백성들의 힘이 약해 감당하지 못하므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3월 2일, 김택룡의 큰아들 김숙이 안동부사가 지급한 적의 장례의 번회군(燔灰軍)을 마련하는 일 때문에 임하 북면 사찰관(司察官)의 처소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3월 3일, 권태청이 술을 가지고 방문하였기에, 김태룡은 아침부터 이자정 · 황유문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들 김숙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사찰관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피우[전염병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피해있는 것]하고 있어서,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 찾는데 힘과 시간을 꽤 낭비하였습니다.
사찰관을 찾아서 만났지만 결국 해가 저물어 사월천(沙月川)에서 자고 오느라 더 늦었습니다. 그리고 번회군(燔灰軍)은 70여 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댓글
  • 이경일 2012-02-28 PM 04:07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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