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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점 선산 인근에 제위답을 개간하다
작년 가을의 각 선산 제위답의 수확량 가운데 토점(土店)의 논에서 나온 수확량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문중에서 논의한 결과, 올해에는 토점에 논을 더 개간하기로 했다.
1930년 3월 23일 남붕은 토점 논을 개간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묘곡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기로 하여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강단(江端) 논에 못자리를 만드는 일을 여러 번 나가 살핀 후, 묘곡에 가보았으나 기다려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묘곡 산지기 윤응팔(尹應八)에게 몇 가지 일을 시키고 토점 논 개간에 드는 비용에 관해 물어보니 얼추 1원 25전 정도 들 것이라고 했다. 남붕은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기로 하고 일꾼들을 모으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남붕은 아침을 먹은 뒤에 토점으로 가서 논을 개간하는 일이 시작된 것을 보고 번포 족조에게 공비(公備) 60전을 보내어 남강 족조와 함께 서너 차례 술값을 내게 하였다. 점심때 묘곡의 산지기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토점의 개간 공사하는 곳에 이르러 종일 감독하고 산지기 집에 가서 잤다.
그 후로도 남붕은 수시로 묘곡에 가서 토점의 논을 개간하는 공사를 감독하고 돌아왔다. 4월 29일에는 오후에 나가서 토점의 논일을 검사하였는데 이날 일꾼은 12명이었다. 밤이 늦어 묘곡의 재사에서 잤다.
5월 1일에는 해가 뜰 무렵에 일어나 아침을 먹은 뒤에 토점에 가서 일을 감독하고, 해가 저물 무렵에 재사에 와서 잤다. 이날 일꾼은 원구 사람 2명과 묘곡 사람 20명이 일을 했다.
몸이 고되고 피곤하긴 했지만, 제위답의 농사가 잘되어야 선조를 잘 모실 수 있으므로 남붕은 힘들지만은 않았다. 토점 논에서 수확만 많이 얻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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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해주일록(海洲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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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붕(南鵬)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930-03-23 ~ 1930-05-0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영덕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남붕, 윤응팔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황무지를 농경지로 만드는 개간
논농사나 밭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농경지가 필요하고 이러한 농경지를 마련하기 위해 경사가 완만하고 토양조건이 좋은 야산 또는 산간 지역의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내어 토지를 정지하여 농경지를 만든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편리하도록 땅을 일구어 길을 만들고 제방을 쌓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개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기에 관개와 개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도전(稻田:벼농사)을 시작하였다는(백제의 다루왕) 것이나 남택(南澤)에 도전을 열었다는(백제의 고이왕) 것은 소택지(沼澤地:늪과 못이 많은 습한 땅)에 논을 갈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일성이사금 때에는 제방을 고쳐 논·밭을 넓게 열었다고 하는데, 이는 관개사업으로 논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고려시대에는 인구의 증가로 농업기술의 개선과 아울러 경작지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한 후 기록한 ≪고려도경≫에 의하면 멀리서 보기에 마치 사다리 모양으로 산에 개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종래에 힘써 오던 수리 사업도 계승하여 옛날 제방의 수축은 물론 새로운 제언(堤堰: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하천이나 골짜기 따위에 쌓은 둑)의 증축도 많아져 재배가 확장했다.
고려시대의 개간사업에 있어서 또 하나 특징은 해안지대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확장하는 간척사업도 행하여졌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고종 때에 몽고병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피난민의 생활과 군사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해안지대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조성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1414년(태종 14)에는 경기도의 통진과 고양포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200여 섬의 곡식을 파종할 수 있는 농경지를 개척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해안에 둑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1486년(성종 17)에는 황해도 재령군의 전탄(箭灘)일대에 큰 도랑을 만드는 사업을 하였다. 숙종 때에는 황주(黃州)에서 대야도(大也島)까지 방축을 하여 갈대밭과 봇도랑을 가경지로 만들었으며, 영조와 정조 때에는 큰 하천인 낙동강·청천강 등의 부근에 제방을 쌓아 많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개간은 1907년(고종 11) 7월 <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 공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때 개간 가능 면적의 크기는 토목 기술 수준과 경제성 등을 고려해볼 때 약 80만에 달하였다. 민족항일기에는 산미증식계획에 의하여 수리 사업에 역점을 두었으며, 일부의 간척사업과 미간지의 개답 외에는 개간의 실적이 별로 없었다.
◆ 원문 번역
1930년 3월 23일 신축.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중용』을 제2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외웠다. 그리고 『중용』을 서문부터 수장首章까지 외웠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창이 밝은 뒤에 『중용』을 제2장부터 제3장까지 외웠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머슴과 품꾼 한 명이 강단江端 논에 못자리를 만드는데, 여러 번 나가 보았다. 건오建五 아재가 어제 중회에서 채금債金을 거두지 못한 것 때문에 오늘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묘곡의 여러 사람을 기다렸으나 오는 사람이 없으므로 파하고 갔다. 『한어』를 익혔다. 산지기 윤응팔尹應八로 하여금 보문普門 댁의 가랫장부 나무에 보습을 걸게 하였고, 토점土店 논 개간에 드는 비용은 1원 25전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암송을 하지 않았다. 3월 24일 임인.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중용』을 제4장부터 제19장까지 외웠다. 닭이 두 번 운 뒤에, 잠시 눈을 붙였다. 창이 밝은 뒤에 집안일을 분부하였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하였다. 『중용』을 제20장부터 ‘행지자일야行之者一也’까지 외웠다. 두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묘곡에 갔는데, 토점에서 논 개간하는 일을 시작하므로 가서 본 것이다. 공비公備 조목 60전을 번포樊浦 족조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남강南江 족조와 함께 서너 차례 술값을 내게 하였다. 점심 때 묘곡에 이르러서 점심을 산지기 집에서 먹고, 오후에 토점 공사하는 곳에 이르러 종일 감독하고 산지기 집에 돌아와 잤다. 4월 5일 계축.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중용』을 제19장까지 외웠는데, 내가 선영의 재사에 있으므로 거리낌없이 소리내어 읽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토점에 가서 논 개간하는 일을 검사하고, 저녁 무렵에 돌아와서 재사에서 잤다. 4월 29일 작은 달이다. 정축.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닭이 울기 전에 잠시 눈을 붙였다. 해가 뜬 뒤에 「선진」을 시야우柴也愚부터 그 편 끝까지 외웠다. 아침에 어머님께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하였다. 「안연」을 다 외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 이병두李炳斗 및 성중 씨가 와서 영봉분사靈峰分舍 설립 계획을 상의하였다. 잠시 인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마을에 나가 보았다. 오후에 묘곡에 가서 토점의 논일을 검사하였다. 밤에 묘곡의 재사에서 잤다. 오늘 일꾼은 12명이다. 5월 1일 무인. 맑음. 새벽에 일어나 치성을 드리고 잠 외우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다른 경서는 암송을 하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은 뒤에 토점의 일하는 곳에 가서 일을 감독하고, 해가 저물 무렵에 재사에 와서 잤다. 오늘 일꾼은 원구 사람 2명과 묘곡 사람 2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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