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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지다
1764년 5월 16일, 아침 일찍 일어나니 고을의 여러 사람이 박종(朴琮)을 보려고 왔다. 박종은 백두산과 허항령 사이의 산천 형세와 길의 험난함 등 여러 가지를 물었다. 몇 사람이 말하기를,
“허항령은 갑산으로 곧바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에 상인들이 즐비하게 다닌다. 따라서 겨울에 눈이 쌓였을 때라도 길이 막히지 않으며, 허항령 길을 벗어나 백두산 밑으로 꺾어 들어가는 것은 겨우 50리뿐이다. 길은 험하지만, 물이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조영순 대감이 입산할 때 가마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니, 어제 산행을 중지한 것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정비하는 어려움 때문이었다. 백성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면, 왜 중간에 포기하겠는가? 마침내 병사께 들어가 고하기를,
“길은 대체로 험난하지만, 사람들이 어렵다고 한 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니, 모두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어떻게 천하의 명승지를 구경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 말을 듣고 병사가 어제 그 급창을 불러 거듭하여 힐문하였다. 사령은 말하기를,
“상인들은 말을 끌고 가기 때문에 왕래할 수 있지만, 양반들은 행차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병사가 말하기를,
“상인들의 말은 갈 수 있는데, 관가의 말은 왜 갈 수 없는가?”
라고 하니, 그 자의 말문이 막혔다. 부령 부사가 또 극력 만류하였다. 이에 병사가 말하기를,
“무산까지 가서 얼마나 험난한지를 살펴본 다음, 거취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병사가 무산에서 거취를 결정한다면, 무산 사람들이 곤란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령 사람들보다 열 배가 더할 것이다. 오늘의 행차는 당 헌종(唐憲宗)이 채(蔡) 지방을 정벌한 것처럼 홀로 결정하여야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남의 말만 듣고 결정한다면 3년을 지나도 이룰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병사가 드디어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부령 부사가 만류해도 되지 않자, 박종에게 냉소를 띠며 말하기를,
“아무튼 무산이나 잘 보고 왔으면 한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산에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타고 온 말이 대단히 지쳤기 때문에 부령 부사에게 말 한 필을 빌렸다.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자,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져 마치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닮았다. 포사곡(褒斜谷)을 따라 나오며 물었더니, 모두 무산의 백성들이었다. 풀밭에서 자고 모래 밥을 지어 먹으며 밤낮으로 걸었기 때문에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부러진 수레바퀴의 축을 고치면서 박종에게 말하기를,
“자식 하나는 병으로 죽고, 사위 하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데, 관아의 위엄으로 성화같이 독촉하여 늙은이가 떠날 수밖에 없다. 몇 고랑의 밭을 일구었는데, 아직 한 번도 김을 매지 못했다. 지금 살아서 돌아간들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박종이 관원의 행차를 따라가고 있으니, 혹시 자기를 구원해 줄까 해서였다. 박종은 한동안 측은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나는 가난한 선비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폐무산(廢茂山)에서 점심을 먹었다. 변방의 쇠잔한 진보(鎭堡)가 황폐한 골짜기에 남아 있었다. 요쇄지의 보장은 할 일이 없어서 채소밭을 경작할 뿐이었다. 진보의 장수가 말을 빌려 주었기 때문에 부령에서 빌린 말은 돌려보냈다.
5리쯤 지나니, 소나무, 삼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하루 종일 나무 그늘 속으로 행진하였다. 차유령 고개에서 조금 쉬었다. 고개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가 부령과 무산 두 고을의 경계였다. 해가 질 때 신참(新站)에 도착하여 일반 백성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은 100리를 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안개가 끼고 가랑비가 오더니 곧장 개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는 우레가 조금 쳤다. 유숙한 집의 온돌이 너무 뜨거워 잠을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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