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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는 망실되고 시렁 위 천체관측기는 형태만 남아 있구나
1660년 4월 5일, 권경은 도산으로 향했다. 도산(陶山)으로 말하자면 퇴옹(退翁)께서 만년에 은퇴하고 물러나 쉬던 곳이다. 푸른 협곡으로 해서 가는 중에 석천(石川)이 가로로 흐르는데, 물 흐르는 기세가 두려울 정도인지라 마침내 말을 경계하며 건너갔다. 길가에 과실이 있었으니 이 터에서 생겨난 것들이라고 하였다.
도원(陶院)을 찾으려다가 옆 계곡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들어가며 우경(虞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이 길에 익숙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지금 이처럼 잘못 들어서 헤매고 있는가?”
라고 말하곤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작은 고개를 넘으니 큰 강이 비껴 흐르고 푸른 봉우리가 울창하였다. 그 아래로 바로 원택(院宅)이 보였다.
골짜기 아래 돌 위에 덥수룩한 비석 하나에 ‘석간대(石澗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선생이 손님을 배웅할 때 늘 여기에 이르러 작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했던 것이라 한다.
마침내 원기(院祇)에 들어서 상덕사(尙德祠)에 알현하는데 갑자기 동주(洞主) 이가회(李嘉會)가 우리 행차를 듣고서 즉시 들어와서 손을 잡으니, 그 기쁨을 눈으로 표현하자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 즉시 동주(洞主)와 함께 원택의 제실(諸室)을 두루 완상하였다.
강당(講堂) 북쪽 벽의 편액(扁額)이 전교당(典敎堂), 오른쪽의 편액은 한존재(閑存齋), 이어서 암서헌(巖棲軒)에 가보니 완락재(玩樂齋)로 편액을 하였는데, 당실(堂室)의 넓이가 8척에 지나지 않는데도 선생은 오히려 그것이 지나치게 넓다고 탄식하셨다고 하니 그 검소함의 미덕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명아주 지팡이와 연갑(硯匣)이 있었다고 하나 벼루는 망실되었으며, 시렁 위에는 (천체관측기인) 기형(璣衡)이 있었는데, 모든 고리가 떨어져 나가 지금은 형태와 모양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마당 아래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열정(冽井)과 작은 샘(泉)이 있는데 산 정상에서부터 (발원한 물이) 열정으로 흘러들기에 이른바 몽천(蒙泉)이라 한다. 샘의 왼편에는 절우사(節友社)가 있고, 오른편에는 동몽재(童蒙齋)가 있는데 편액이 시습(時習)이고, 푸른 계곡물이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이니, 수십 걸음을 걸으면 강에 맞닿아 천연대(天淵臺)가 있다.
누대 앞에는 작은 바위가 있는데 수면 위로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하기에 이른바 반타석(盤陀石)이라 부른다. 그 아래로는 탁영담(濯纓潭)이 있는데 서쪽 편으로 십수 보 정도를 가면 또 운영대(雲影臺)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선생께서 직접 이름을 지으시고 마음과 학문을 닦으며 노닐고 쉬시던 곳이다. 이르는 곳마다 상상을 하니, 마치 선생이 푸른 산과 맑은 물 사이에서 시원한 모습으로
우춘고슬(雩春鼓瑟)의 뜻
을 두었던 것이 더욱 배가 되는 듯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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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우(權宇)
주제 : 청량산 유산기
시기 : 1660-04-05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권경, 우경, 이가회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사적 제170호로 이황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574년 설립되었다. 1570년 퇴계 이황이 작고하자, 1572년에 위패를 상덕사에 모시기 위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1575년에 선조가 명필 한석봉으로 하여금 쓰게한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영남 유림의 본산이 되었다.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되어, 1977년 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로 도산서원 가장 뒷쪽에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로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기 위한 강당이다. 전교당의 맢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1574년(선조 7년)에 지었고, 1969년에 수리를 하였다. 팔작지붕과 온돌방,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선조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해진다. 주요한 건물은 아래와 같다. ○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출판소로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퇴계의 문집, 유묵, 언행록, 도산십이곡, 선조 어필 등 2,790여 장의 병서, 액자, 책, 판각 등이 소장되어 있다가, 2003년 5월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 고직사(庫直舍)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반 민가 주택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상고직사(上庫直舍)와 하고직사(下庫直舍) 두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 역락서재(亦樂書齋) 서원의 가장 아래 부분에 위치한 건물로 이황의 제자 정지헌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집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역락이라는 말은 《논어》의 첫 장인 <학이>에서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이다.”에서 따온 말이다. ○ 시사단(試士壇) 서원의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지어진 건물이다. 1792년(정조 16년)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과시를 보게 한 곳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도산(陶山)으로 말하자면 퇴옹(退翁)께서 만년에 은퇴하고 물러나 쉬던 곳이다. 푸른 협곡으로 해서 가는 중에 석천(石川)이 가로로 흐르는데, 물흐르는 기세가 두려울 정도인지라 마침내 말을 경계하며 건너갔다. 길가에 과실이 있었으니 이 터에서 생겨난 것들이라고 하였다. 도원(陶院)을 찾으려다가 옆 계곡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들어가며 우경(虞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이 길에 익숙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지금 이처럼 잘못 들어서 헤매고 있는가?” 라고 말하곤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작은 고개를 넘으니 큰 강이 비껴 흐르고 푸른 봉우리가 울창하였다. 그 아래로 바로 원택(院宅)이 보였다. 골짜기 아래 돌 위에 덥수룩한 비석 하나에 ‘석간대(石澗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선생이 손님을 배웅할 때 늘 여기에 이르러 작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했던 것이라 한다. 마침내 원기(院祇)에 들어서 상덕사(尙德祠)에 알현하는데 갑자기 동주(洞主) 이가회(李嘉會)가 우리 행차를 듣고서 즉시 들어와서 손을 잡으니, 그 기쁨을 눈으로 표현하자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 즉시 동주(洞主)와 함께 원택의 제실(諸室)을 두루 완상하였다. 강당(講堂) 북쪽 벽의 편액(扁額)이 전교당(典敎堂), 오른쪽의 편액은 한존재(閑存齋), 이어서 암서헌(巖棲軒)에 가보니 완락재(玩樂齋)로 편액을 하였는데, 당실(堂室)의 넓이가 8 척에 지나지 않는데도 선생은 오히려 그것이 지나치게 넓다고 탄식하셨다고 하니 그 검소함의 미덕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명아주 지팡이와 연갑(硯匣)이 있었다고 하나 벼루는 망실되었으며, 시렁 위에는 (천체관측기인) 기형(璣衡)이 있었는데, 모든 고리가 떨어져 나가 지금은 형태와 모양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마당 아래에는 차가운 물이 솟는 열정(冽井)과 작은 샘(泉)이 있는데 산 정상에서부터 (발원한 물이) 열정으로 흘러들기에 이른바 몽천(蒙泉)이라 한다. 샘의 왼편에는 절우사(節友社)가 있고, 오른편에는 동몽재(童蒙齋)가 있는데 편액이 시습(時習)이고, 푸른 계곡물이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이니, 수십 걸음을 걸으면 강에 맞닿아 천연대(天淵臺)가 있다. 누대 앞에는 작은 바위가 있는데 수면 위로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하기에 이른바 반타석(盤陀石)이라 부른다. 그 아래로는 탁영담(濯纓潭)이 있는데 서쪽 편으로 십수 보 정도를 가면 또 운영대(雲影臺)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선생께서 직접 이름을 지으시고 마음과 학문을 닦으며 노닐고 쉬시던 곳이다. 이르는 곳마다 상상을 하니, 마치 선생이 푸른 산과 맑은 물 사이에서 시원한 모습으로 우춘고슬(雩春鼓瑟)의 뜻을 두었던 것이 더욱 배가 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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