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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
1579년 9월 1일, 갑진일. 청량산 유람 중이던 김득연 일행이 사자항(獅子項)에 이르자 돌길이 비탈져 마침내 여러 친구와 말을 버리고 걸어서 깊은 숲을 헤치고 층층 바위를 밟으며 갔다. 열 걸음 가면 한 번 쉬고 시를 읊고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니, 경치는 더욱 기이해지고 마음은 더욱 상쾌해졌다.
문득 피리 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려오니, 속으로 봉성(鳳城) 금여약(琴汝若)이 피리 부는 아이를 데리고 먼저 와 있는 것임을 알았다. 매우 기뻐하며 덩굴을 붙잡고 곧바로 올라가 높은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니, 권군앙(權君仰)이 홀로 요대(瑤臺)에 서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어지러이 춤을 추는데, 산 귀신이 메아리로 답하고 지는 해는 빛을 다투니 진정 의기 당당한 나그네라 할 만하였다.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러 여약과 군앙을 만나 서로 반가운 눈빛을 하며 함께 평소의 생각을 풀어냈다. 화락하게 웃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십년지기 친구들이 한 번 선산(仙山)에 모이니, 그 사이에 운수가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금산(錦山)의 춘무(椿茂) 박경(朴景)은 군앙 형의 사촌 매부로, 우리들이 놀러간다는 소문을 듣고 군앙을 따라 왔다.
암대(巖臺)에 늘어앉아 멀리 첩첩의 산을 바라보니, 저녁 햇빛이 붉은 색을 허공에 칠하고 뜬 이내는 짙푸른 색을 띠었다. 기상이 수만 번 변하여 잠깐 사이에 구름 기운을 들이쉬고 내쉬자 산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지는데, 혹은 머리를 다 드러내고, 혹은 반쯤 머리를 드러냈으니, 비록 하늘을 말하는 거창함이나 용무늬를 새기는 거대함으로도 거의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늙은 승려가 구름과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이 축융봉(祝融峯), 저것은 금탑봉(金塔峯), 다음은 경일봉(擎日峯), 그 다음은 자란봉(紫鸞峯), 또 그 다음은 자소봉(紫霄峯), 탁필봉(卓筆峯), 연적봉(硯滴峯), 이것은 선학봉(仙鶴峯), 이것은 연화봉(蓮花峯), 그 뒤에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또 그 뒤에 내장인봉(內丈人峯), 외장인봉(外丈人峯)이 있어 모두 열두 봉우리입니다. 예전엔 명칭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고 한다. 김득연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옛날
주회암(朱晦庵)
이 여산(廬山)에서 절묘하고 기이한 곳을 만나 문득 이름을 지었으니, 만약 주부자(朱夫子)가 아니었다면 만세가 지나도록 이름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는 적막하게 있다가 천년 만에 신재(愼齋) 주세붕 선생을 한 번 만난 뒤에 이름을 얻었으니, 이 또한 이 산의 행운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려 하자 지장전(地藏殿)에 들어가니 승려들이 뒤따랐다. 등불을 켜고 자리를 마련해 친구들을 불러 앉고, 술병을 열어 잔을 가득 채워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니, 단란하여 밤새도록 크게 취하여 흥이 이는데, 문을 열고 홀로 하늘을 마주하여 서니 아득히 넓고 넓어 광한궁(廣寒宮)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이날 밤 권사민(權士敏)이 장난삼아 함께 온 여덟 사람을 팔선(八仙)이라 하고 채씨 한 명을 청동(靑童)이라 하고는, 나이순대로 반드시 아무개 신선이라 부르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니, 하나의 껄껄 웃을 만한 일이었다. 이에 여러 신선과 함께 베개를 베고 잤다.
1579년 9월 2일, 을사일. 아침밥을 먹은 후 지팡이를 짚고 절을 나오니, 절 승려인 희조(熙祖)와 계당(戒幢) 등이 앞길을 인도하고, 또 어린 동자승은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따랐다.
동쪽으로 가다가 오솔길을 넘어 중대(中臺)에 들어가니, 옆에 새로 지은 불당이 있다. 물으니, 시왕전(十王殿)이라 하는데, 여러 불상이 당에 가득하여 거의 사람 같았다. 김득연은 눈을 부릅뜨고 흘겨보며 노하여 부수려 했으나, 승려들이 힘써 만류했다. 김득연은 말하기를,
“인도에서 한 번 사신이 온 뒤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진 폐단이 인간세상을 속이고 현혹시키며 민심을 잘못된 길로 빠뜨리니, 누가 선왕의 도(道)를 밝혀 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우리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이 사는 곳을 우리 집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불상을 헐고 승려들을 매질하여야 깊이
호영(胡穎)의 정직
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고도암(古道庵)에 이르니 병든 승려가 있는데, 요사(寮舍)가 누추하여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곧바로 보문암(普門庵)에 이르니 승려가 포도를 따서 팔선(八仙)에게 내와서 함께 먹었다.
남쪽으로 가다가 금탑봉(金塔峯)으로 향하니 좁은 길이 위험하고 미끄러워, 나무를 부여잡고 기어올라 바위에 기대어 여러 번 쉬었다. 채청동(蔡靑童)이 피리 부는 자를 데리고 먼저 올라갔는데, 이미 반야대(盤若臺)에 올라 몸을 숨기고 한가하게 맑은 소리를 내니, 옥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멀리 구름 낀 하늘까지 닿아, 황마치 태자진(太子晉)이 후산(緱山)에 올라 생황을 부는 듯 황홀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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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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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득연(金得硏)
주제 : 청량산 유산기
시기 : 1579-09-01 ~ 1579-09-0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봉화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김득연, 승려, 여러 친구들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산문화
조선시대 양반들은 유산을 최고의 여가문화로 여겼다. 또한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선현들의 유향을 느끼면서 학문 정진의 다짐을 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양반들은 유람에 앞서 신변부터 먼저 정리했는데, 현직 관리는 소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거나 사직서를 제출하고 관직을 그만뒀다. 식량은 2~3일분만 준비하고 여행을 하면서 조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2끼 식사만 했지만 에너지 소모가 많은 여행 중에는 점심에 해당하는 ‘중화(中火)’를 먹었다고 유산기에 나와 있다. 붓·벼루 등 문방구도 필수품이었다. 종이는 휴대가 용이하도록 미리 잘라서 책으로 엮어 지녔다. 가족과 친지, 노복을 동반해 여행단의 규모는 대개 10~20명 수준이었다. 피리, 거문고 연주자와 산수화를 그릴 화공이 동행하기도 한다. 전·현직 고위관료의 경우 50~100명의 대규모 여행단을 꾸렸다. 여기에는 기생, 요리사, 악사까지 동반하기도 했다. 숙박은 관아의 객사나 공공여관인 역·원을 주로 이용했고 산에서는 사찰에 주로 묵었다. 여행에 시가 빠질 리 없다. 뛰어난 경치나 벗과의 만남·이별 등을 소재로 했다. 또한 사대부들은 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계곡에 발을 담그는 것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갓끈과 발을 씻겠다"는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한 탁족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드물게 세속의 때를 씻어내려고 목욕을 하기도 했으며 신병치료 등을 위해 온천욕을 즐긴 이도 있었다. 산중에서 그들은 평소와 다른 면모도 보여줬다. 엄격한 유학자였지만 승려들과의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속신앙을 배척했지만 산을 오르기 전에 산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모두들 산으로 몰리니 폐단도 따랐다. 바위에 이름 등을 새기는 제명(題名)이 크게 유행하면서 성한 바위를 찾기가 힘들어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제명은 먼저 붓으로 글씨를 쓰고 노복이나 승려가 이를 돌 등에 붙여 쪼아서 새겼다. 금강산의 경우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절, 정자의 벽과 기둥 등을 가리지 않고 글씨를 새겼다.
◆ 원문 번역
만력(萬曆) 기묘년(1579년, 선조 12년) 가을 9월 초하루 갑진일에, 사자항(獅子項)에 이르자 돌길이 비탈져 마침내 여러 친구와 말을 버리고 걸어서 깊은 숲을 헤치고 층층 바위를 밟으며 갔다. 열 걸음 가면 한 번 쉬고 시를 읊고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니, 경치는 더욱 기이해지고 마음은 더욱 상쾌해졌다. 문득 피리 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려오니, 속으로 봉성(鳳城) 금여약(琴汝若)이 피리 부는 아이를 데리고 먼저 와 있는 것임을 알았다. 매우 기뻐하며 덩굴을 붙잡고 곧바로 올라가 높은 산꼭대기를 올려다보니, 권군앙(權君仰)이 홀로 요대(瑤臺)에 서서 큰 소리로 노래부르며 어지러이 춤을 추는데, 산 귀신이 메아리로 답하고 지는 해는 빛을 다투니 진정 의기 당당한 나그네라 할 만하였다.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러 여약과 군앙을 만나 서로 반가운 눈빛을 하며 함께 평소의 생각을 풀어냈다. 화락하게 웃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말하기를, “십년지기 친구들이 한 번 선산(仙山)에 모이니, 그 사이에 운수가 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금산(錦山)의 춘무(椿茂) 박경(朴景)은 군앙 형의 사촌 매부로, 우리들이 놀러간다는 소문을 듣고 군앙을 따라 왔다. 암대(巖臺)에 늘어앉아 멀리 첩첩의 산을 바라보니, 저녁 햇빛이 붉은 색을 허공에 칠하고 뜬 이내는 짙푸른 색을 띠었다. 기상이 수만 번 변하여 잠깐 사이에 구름 기운을 들이쉬고 내쉬자 산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지는데, 혹은 머리를 다 드러내고, 혹은 반쯤 머리를 드러냈으니, 비록 하늘을 말하는 거창함이나 용무늬를 새기는 거대함으로도 거의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늙은 승려가 구름과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것이 축융봉(祝融峯), 저것은 금탑봉(金塔峯), 다음은 경일봉(擎日峯), 그 다음은 자란봉(紫鸞峯), 또 그 다음은 자소봉(紫霄峯), 탁필봉(卓筆峯), 연적봉(硯滴峯), 이것은 선학봉(仙鶴峯), 이것은 연화봉(蓮花峯), 그 뒤에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또 그 뒤에 내장인봉(內丈人峯), 외장인봉(外丈人峯)이 있어 모두 열두 봉우리입니다. 예전엔 명칭이 없었는데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고 한다. 내가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옛날 주 회암(朱晦庵)이 여산(廬山)에서 절묘하고 기이한 곳을 만나 문득 이름을 지었으니, 만약 주 부자(朱夫子)가 아니었다면 만세가 지나도록 이름이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는 적막하게 있다가 천년 만에 신재(愼齋) 주세붕 선생을 한 번 만난 뒤에 이름을 얻었으니, 이 또한 이 산의 행운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려 하자 지장전(地藏殿)에 들어가니 승려들이 뒤따랐다. 등불을 켜고 자리를 마련해 친구들을 불러 앉고, 술병을 열어 잔을 가득 채워 피리꾼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꾼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니, 단란하여 밤새도록 크게 취하여 흥이 이는데, 문을 열고 홀로 하늘을 마주하여 서니 아득히 넓고 넓어 광한궁(廣寒宮)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듯하였다. 이날 밤 권사민(權士敏)이 장난삼아 함께 온 여덟 사람을 팔선(八仙)이라 하고 채씨 한 명을 청동(靑童)이라 하고는, 나이 순대로 반드시 아무개 신선이라 부르게 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니, 하나의 껄껄 웃을 만한 일이었다. 이에 여러 신선과 함께 베개를 베고 잤다. 9월 2일 을사일에, 아침 밥을 먹은 후 지팡이를 짚고 절을 나오니, 절 승려인 희조(熙祖)와 계당(戒幢) 등이 앞길을 인도하고, 또 어린 동자승은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따랐다. 동쪽으로 가다가 오솔길을 넘어 중대(中臺)에 들어가니, 옆에 새로 지은 불당이 있다. 물으니, 시왕전(十王殿)이라 하는데, 여러 불상이 당에 가득하여 거의 사람 같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흘겨보며 노하여 부수려 했으나, 승려들이 힘써 만류했다. 나는 말하기를, “인도에서 한 번 사신이 온 뒤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진 폐단이 인간세상을 속이고 현혹시키며 민심을 잘못된 길로 빠뜨리니, 누가 선왕의 도(道)를 밝혀 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우리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이 사는 곳을 우리 집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불상을 헐고 승려들을 매질하여야 깊이 호영(胡穎)의 정직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고도암(古道庵)에 이르니 병든 승려가 있는데, 요사(寮舍)가 누추하여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곧바로 보문암(普門庵)에 이르니 승려가 포도를 따서 팔선(八仙)에게 내와서 함께 먹었다. 남쪽으로 가다가 금탑봉(金塔峯)으로 향하니 좁은 길이 위험하고 미끄러워, 나무를 부여잡고 기어올라 바위에 기대어 여러 번 쉬었다. 채청동(蔡靑童)이 피리 부는 자를 데리고 먼저 올라갔는데, 이미 반야대(盤若臺)에 올라 몸을 숨기고 한가하게 맑은 소리를 내니, 옥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멀리 구름 낀 하늘까지 닿아, 황마치 태자진(太子晉)이 후산(緱山)에 올라 생황을 부는 듯 황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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