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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금 공(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용수현(龍壽峴)을 넘자 날이 저물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묵었다. 원장(院長)인 영월(寧越) 김택룡(金澤龍)이 이미 먼저 와 있었는데 술을 내놓고 옛일을 이야기했다. 잠시 뒤 계화도 그의 조카인 장경(長卿) 유원지(柳元之)를 데리고 좇아 왔다. 밤에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술잔을 몇 순배 돌리다 파하고 암서헌(巖棲軒)으로 들어갔다. 암서헌은 곧 퇴도(退陶) 선생께서 전심하여 학문을 닦던 방이다. 암서헌 동쪽 송단(松壇)은 절우사(節友社)요, 그 서쪽의 협실(夾室)은 완락재(玩樂齋)인데, 완락재 안에는 선생의 궤장(几杖)이 지금도 남아있다.

13일 임술일에 사당을 배알하였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장차 산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현(縣)의 유생인 김숙(金琡)과 황유문(黃有文) 등 세 사람이 찾아왔다. 대개 본 서원에서 월천(月川) 조목을 함께 배향하는 일 때문에 모여든 것이다.

원장이 이 일로 인해 서판(書板)과 서축(書祝, 축문은 쓰는 일), 절목(節目) 등을 우리들에게 물어왔고, 또 남아서 그 모임에 참여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하여 사양하였다.
다만, “종향(從享)과 배향(配享)은 절목이 서로 비슷하니 향교(鄕校)의 절목을 기준으로 삼으라.”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는 작력천(柞櫟遷)을 통해 강의 상류를 거슬러 5리 쯤 올라가니 퇴계선생의 고택(古宅, 지은 지 오래된 집)에 이르렀다.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권씨(權氏)가 먼 친척의 돈독함으로 우리들을 대했다. 마침내 들어가 절하고는 선생의 평소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마치 선생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의 용모를 접하는 듯하였다. 집 뒤의 주산(主山)은 매우 높고 컸는데 가장 높은 곳이 선생을 안장한 묘자리이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그 아래를 걸어서 지나갔다. 작은 재 하나를 넘었는데, 온계(溫溪)에 사는, 장경(長卿)의 장인댁 노비가 앞길을 인도했다. 작은 평지를 지나 동북쪽을 멀리 바라보니 푸른 벽이 주위를 둘렀고 흐르는 물이 굽이돌고 있었다. 앞길을 인도하는 자에게 지명을 물으니 대사동(大沙洞)이라고 하였다. 계화가 말하기를,

“전에 단사협(丹砂峽)의 승경에 대해 들었는데 청량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많이들 이곳을 빠뜨린다고 한다. 대사(大沙)란 단사(丹砂)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아래로 말을 달려가니 외딴 마을에 두세 집이 있어 주진촌[朱陳村, 당(唐)나라 백낙천(白樂天)이 주진촌(朱陳村)에 대한 시(詩)를 지었는데, 그 마을에는 주(朱)·진(陳) 두 성이 살며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깊숙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하였음]과 비슷하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았다. 푸른 벼랑과 단풍의 그림자가 맑은 물결에 잠겨 위아래로 거의 3, 4리에 이어져 있다. 계화가 말하기를,

“예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시냇가에서 학업을 전수받으실 때, 선생께서 특별히 단사협에 가서 즐겨 구경하라고 하셨다는데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즐기며 흥을 돋워,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저물녘에 가까워 마침내 신발을 고쳐 신고 상의를 벗은 채 걸어서 갔다. 백운지(白雲池)를 건너니 고인이 된 봉화(奉化) 금난수(琴蘭秀)의 별장이 나왔는데 그의 묘가 뒷산에 있다.

한 굽이를 돌아가서 다시 나루 하나를 건너니 어느 농부가 가리켜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면, 두 번 물을 건너야 하나 말을 타고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잔도(棧道, 절벽사이 선반처럼 놓인 다리길)가 매우 험난하므로 말을 타고 갈 수는 없고 걸어가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일행이 말의 다리를 쉬게 하자고 하여, 마침내 잔도(棧道)를 따라 걸어가기로 하였다. 거의 6, 7리 잔도를 지나 고개를 넘었다. 문득 고산(孤山)이 서쪽 언덕에 솟아 있고 철벽이 동편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한줄기의 긴 물살이 그 사이에서 호탕하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이 금 공(琴公)의 고산정사(孤山精舍)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물가로 가서 정사(精舍, 유학자 개인이 학술을 연마하는 서재)를 바라보았다. 푸른 벼랑 곁에 자리하여 고산과 정사(精舍)가 마주보고 있는데, 실은 푸른 벼랑과 서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세 아들은 모두 세상의 관직에 얽매여 있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 이후로 다시 홍수에 잠겨 무너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쪽에 새로 소모정(小茅亭)을 세웠는데 바로 푸른 벼랑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들어가 앉으니 봉사(奉事) 이일도(李逸道)가 지은 것이었다. 사건(紗巾, 얇고 가벼운 비단으로 만든 두건)과 도복(道服, 선비들이 통상예복으로 입던 겉옷으로 소위 ‘도포’)을 입고 나와서 읍을 하고 맞이하여 앉게 하였다.

산포도 한 그릇을 내와 갈증을 풀어주니 또한 하나의 흥취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금 공(琴公)의 정사(精舍)를 떠올려보았다. 다행히도 정사(精舍)가 퇴계 선생의 평가[品題]를 거쳤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정사가 정사됨을 알게 되었다. 이 정자는 평지에 자리 잡고 고산(孤山)에 기대어 있어 한쪽 면의 푸른 절벽이 모두 우리 것이 되었으니, 그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는 쉽게 순서를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과 이 정자는 선생보다 거의 오십 년에 뒤져있어 친히 한 말씀을 얻어 두 정자의 높고 낮음을 정하지 못하니, 이것이 또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릇 지금의 다행과 불행이란 것이 단지 금 공(琴公)과 이 공(李公)의 두 정자에만 그치지 않으니, 또한 무슨 말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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