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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좇다
1614년(광해군6) 가을에
풍산(豐山)
의 계화(季華)
유진
(柳袗, 1582∼1635년)이
오미동(五美洞)
부모님 집으로 김영조를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김영조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네.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였다. 마침내 9월 12일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김영조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면서 종 한명을 따르게 하고 말 한필에 침구와 식량을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
(琴軸, 1496∼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금 공(琴公)의 서출이다. 금 공은 김영조의 조부[김농(金農)]에게는 외당숙이 된다. 조부가 뒤를 이을 자녀가 없자, 금 공은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권일(權鎰)]의 딸을 길러서 김영조의 조부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면서 금 공은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조부에게 주었다. 아아, 금 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워서 공(公)이 돌아가시자 그 묘지명을 써주셨다. 이것으로도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한다. 참으로 한탄스럽다.
용수현(龍壽峴)을 넘자 날이 저물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묵었다. 원장(院長)인 영월(寧越)
김택룡(金澤龍)
이 이미 먼저 와 있었는데 술을 내놓고 옛일을 이야기했다. 잠시 뒤 계화도 그의 조카인 장경(長卿) 유원지(柳元之)를 데리고 좇아 왔다. 밤에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술잔을 몇 순배 돌리다 파하고 암서헌(巖棲軒)으로 들어갔다. 암서헌은 곧 퇴도(退陶) 선생께서 전심하여 학문을 닦던 방이다. 암서헌 동쪽 송단(松壇)은 절우사(節友社)요, 그 서쪽의 협실(夾室)은 완락재(玩樂齋)인데, 완락재 안에는 선생의 궤장(几杖)이 지금도 남아있다.
13일 임술일에 사당을 배알하였다. 밥을 재촉하여 먹고 장차 산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현(縣)의 유생인 김숙(金琡)과 황유문(黃有文) 등 세 사람이 찾아왔다. 대개 본 서원에서 월천(月川)
조목
을 함께 배향하는 일 때문에 모여든 것이다.
원장이 이 일로 인해 서판(書板)과 서축(書祝, 축문은 쓰는 일), 절목(節目) 등을 우리들에게 물어왔고, 또 남아서 그 모임에 참여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하여 사양하였다.
다만, “종향(從享)과
배향(配享)
은 절목이 서로 비슷하니 향교(鄕校)의 절목을 기준으로 삼으라.”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는 작력천(柞櫟遷)을 통해 강의 상류를 거슬러 5리 쯤 올라가니 퇴계선생의 고택(古宅, 지은 지 오래된 집)에 이르렀다.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권씨(權氏)가 먼 친척의 돈독함으로 우리들을 대했다. 마침내 들어가 절하고는 선생의 평소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마치 선생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의 용모를 접하는 듯하였다. 집 뒤의 주산(主山)은 매우 높고 컸는데 가장 높은 곳이 선생을 안장한 묘자리이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그 아래를 걸어서 지나갔다. 작은 재 하나를 넘었는데, 온계(溫溪)에 사는, 장경(長卿)의 장인댁 노비가 앞길을 인도했다. 작은 평지를 지나 동북쪽을 멀리 바라보니 푸른 벽이 주위를 둘렀고 흐르는 물이 굽이돌고 있었다. 앞길을 인도하는 자에게 지명을 물으니
대사동(大沙洞)
이라고 하였다. 계화가 말하기를,
“전에 단사협(丹砂峽)의 승경에 대해 들었는데 청량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많이들 이곳을 빠뜨린다고 한다. 대사(大沙)란 단사(丹砂)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아래로 말을 달려가니 외딴 마을에 두세 집이 있어 주진촌[朱陳村, 당(唐)나라 백낙천(白樂天)이 주진촌(朱陳村)에 대한 시(詩)를 지었는데, 그 마을에는 주(朱)·진(陳) 두 성이 살며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깊숙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하였음]과 비슷하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았다. 푸른 벼랑과 단풍의 그림자가 맑은 물결에 잠겨 위아래로 거의 3, 4리에 이어져 있다. 계화가 말하기를,
“예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시냇가에서 학업을 전수받으실 때, 선생께서 특별히 단사협에 가서 즐겨 구경하라고 하셨다는데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하였다.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즐기며 흥을 돋워,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저물녘에 가까워 마침내 신발을 고쳐 신고 상의를 벗은 채 걸어서 갔다. 백운지(白雲池)를 건너니 고인이 된 봉화(奉化)
금난수(琴蘭秀)
의 별장이 나왔는데 그의 묘가 뒷산에 있다.
한 굽이를 돌아가서 다시 나루 하나를 건너니 어느 농부가 가리켜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면, 두 번 물을 건너야 하나 말을 타고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잔도(棧道, 절벽사이 선반처럼 놓인 다리길)가 매우 험난하므로 말을 타고 갈 수는 없고 걸어가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일행이 말의 다리를 쉬게 하자고 하여, 마침내 잔도(棧道)를 따라 걸어가기로 하였다. 거의 6, 7리 잔도를 지나 고개를 넘었다. 문득 고산(孤山)이 서쪽 언덕에 솟아 있고 철벽이 동편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한줄기의 긴 물살이 그 사이에서 호탕하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이 금 공(琴公)의 고산정사(孤山精舍)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물가로 가서 정사(精舍, 유학자 개인이 학술을 연마하는 서재)를 바라보았다. 푸른 벼랑 곁에 자리하여 고산과 정사(精舍)가 마주보고 있는데, 실은 푸른 벼랑과 서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세 아들은 모두 세상의 관직에 얽매여 있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 이후로 다시 홍수에 잠겨 무너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쪽에 새로 소모정(小茅亭)을 세웠는데 바로 푸른 벼랑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들어가 앉으니 봉사(奉事) 이일도(李逸道)가 지은 것이었다. 사건(紗巾, 얇고 가벼운 비단으로 만든 두건)과 도복(道服, 선비들이 통상예복으로 입던 겉옷으로 소위 ‘도포’)을 입고 나와서 읍을 하고 맞이하여 앉게 하였다.
산포도 한 그릇을 내와 갈증을 풀어주니 또한 하나의 흥취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금 공(琴公)의 정사(精舍)를 떠올려보았다. 다행히도 정사(精舍)가 퇴계 선생의 평가[品題]를 거쳤기에, 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정사가 정사됨을 알게 되었다. 이 정자는 평지에 자리 잡고 고산(孤山)에 기대어 있어 한쪽 면의 푸른 절벽이 모두 우리 것이 되었으니, 그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서는 쉽게 순서를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과 이 정자는 선생보다 거의 오십 년에 뒤져있어 친히 한 말씀을 얻어 두 정자의 높고 낮음을 정하지 못하니, 이것이 또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릇 지금의 다행과 불행이란 것이 단지 금 공(琴公)과 이 공(李公)의 두 정자에만 그치지 않으니, 또한 무슨 말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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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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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영조(金榮祖)
주제 : 놀이와 유람, 유람과 감상
시기 : 1614-09-1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김영조, 유진, 금세인, 김택룡, 유원지, 김숙, 황유문, 권씨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퇴계 이황의 사상
16세기에 들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 성리학으로서의 독자적 이론을 창출하는 원숙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주자학의 사상 체계를 전반적으로 빠짐없이 구명하고 분석하여 한국 성리학사의 황금시기를 이루어 놓은 거봉이 퇴계 이황(李滉)이다. 주자학을 단순히 답습하여 고수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자각하며, 또한 끊임없는 철학적 논변을 통하여 유학의 본질을 정확하게 체득한 경지에서 새로운 한국철학의 장(場)을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우뚝한 것이다. 이러한 퇴계사상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성리학의 우주론적 본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태극론(太極論)이다. 퇴계(退溪)는 태극을 이(理)로 파악하여 창조적 기능으로서의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理)의 능동성(能動性)을 중시하여 ‘기발(氣發)’ 뿐만 아니라 ‘이발(理發)’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천리(天理)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밝힌 것으로서 주자의 이론체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理)의 자발성(自發性)을 논리화시킨 특징이 있다.
둘째)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 이기론(理氣論)이다. 현상의 입장에서 보면 이(理)와 기(氣)는 공존되나 논리의 입장에서 보면 분별하여 논할 수 있다. 퇴계(退溪)는 이(理)와 기(氣)의 공존성을 이해하면서도 이(理)와 기(氣)를 업격하게 구별하려는 입장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理)의 순수성을 확보하려는 ‘이존설(理尊說)’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절대순선(絶對純善)의 이(理)가 현실의 구체적 인간행위와 정서를 통하여 실천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퇴계(退溪)의 학문은 무엇보다도 인간학적인 면에 최대의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은 내재된 순수성과 그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선(善)한 본성(本性)을 확충시켰을 때 인간다움을 다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退溪)의 학문적 목표는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퇴계(退溪)의 학문은 성학(聖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성학(聖學)은 인간학과 종교학의 영역이 동시에 포함된다. 따라서 퇴계(退溪)의 성학(聖學)은 중국의 유학에 비하여 더욱 인성론적(人性論的) 성리학으로 전개시킨 특징이 있다.
넷째) 성학(聖學)에 접근하는 구체적 수양 방법으로 경(敬)을 강조하였다. 경(敬)이란 항상 깨어있는 상태(惺惺)에서 주어진 일에 전일(專一)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공부이다. 퇴계(退溪)는 이 경(敬)으로 인욕(人欲)을 극복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하여야 참된 인간의 본성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섯째) 퇴계(退溪)는 자연(自然)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지극하였다. 자연에 침잠(沈潛)하여 인간의 정서를 함양하였다. 진리를 추구하는 도학적 정신(道學的 精神)으로 자연을 완상(玩賞)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하여 「금보가(琴譜歌)」, 「악빈가(樂貧歌)」, 「상저가(相杵歌)」 등의 많은 시가(詩歌)를 지어 자연의 미감(美感)을 도학(道學)의 세계로 흡수하였다.
여섯째) 퇴계(退溪)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적 사변에만 그치지 않고 전 생애를 걸쳐 끊임없이 실천한 점에 있다. 성리학이 자칫 관념의 세계로 내닫기 쉬운 문제점을 극복하여, 끊임없이 실행(實行)했던 그의 삶은 바로 지행(知行)의 겸전(兼全)을 요(要)하는 유학의 본질을 가장 올바르게 체득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주자학(朱子學)의 한계를 극복하여 발전시킨 퇴계(退溪)철학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주자학(朱子學)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기반 위에서 인성론적(人性論的)인 성리학으로 더욱 심화(深化)시켜 인간의 인격형성의 논리체계를 정립하였고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경(敬)의 수양방법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적인 생애를 통하여 생생하게 보여준 퇴계(退溪)의 높은 인격은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퇴계(退溪)를 만세(萬世)의 사표(師表)로 존숭하였던 것이며, 그 영향은 멀리 중국이나 일본까지 파급 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태극론(太極論),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등의 철학적 문제를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간존재의 규명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한국유학에서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주요과제가 되어 왔다. 이러한 인성론(人性論)의 문제는 결국 이기론(理氣論)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을 위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라는 양대학파(兩大學派)의 분입(分立) 속에 수많은 논변(論辨)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퇴계의 학설을 비판한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의 등장 이후부터 더욱 적극화되었다.
퇴계는 이(理) 중심의 논리로 우주의 본질을 규명하고, 천인(天人)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로 분속(分屬)시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강조하는 이론 체계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본래적인 순선(純善)을 계발하여 도덕적인 삶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학적 가치론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율곡은 인간의 가치론적 입장보다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인간문제를 분석하였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논리적 모순을 배제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칠정(七情)가운데 선일변(善一邊)만을 택(擇)하여 사단(四端)을 말하는 「칠정포사단설(七情包四端說)」과 이기(理氣)에 선후(先後)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율곡의 학문세계는 이기(理氣)의 어느 한 쪽에 편중하지 않는 가운데 「이기지묘(理氣之妙)」를 강조하며 인간의 외재적 현실성도 무시하지 않는 실학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결국 퇴계와 율곡의 사상적 상이성(相異性)은 인간존재를 규명하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퇴계를 주리(主理), 율곡을 주기(主氣)로 고착시켜 놓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대체로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퇴계학파가 주리적(主理的) 바탕으로 주관적 성실성에 치중하였다면,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학파는 주기적(主氣的) 바탕에서 객관적 실제성에 치중하였음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율곡이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을 비판하였던 초기에만 하여도 퇴계학파 자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기호지방의 서인(西人)학자들이 율곡설을 지지하면서 퇴계설을 비판하는 경향이 확대되자, 영남지방의 남인(南人)학자들도 퇴계설을 옹호하고 율곡설을 비판하는 학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서애계열의 졸재 유원지(拙齋 柳元之)는 예송(禮頌)에서 율곡설을 비판하였고, 활재 이구(1613~1654) 등은 율곡의 문묘배향을 반대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운동은 당론의 격화와 함께 점차 고조되어 당파의 분열이 극심하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는 맹렬한 기세로 확대되었다. 퇴계 몰후(沒後) 100년이 되는 이 때, 당파성보다는 학문적 입장에서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여 퇴계학파의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최초로 마련한 학자는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이다. 그의 학맥은 퇴계학의 정통파로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계속 이어져 내려갔으며, 그만큼 주리론(主理論)의 내용도 더욱 치밀하게 정립되어 나갔다. 여기서는 퇴계학의 정맥을 형성한 중심인물들만을 뽑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 : 1627~1704)은 현재의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盈德郡 蒼水面 仁良洞)에서 출생하였으나 만년에 안동의 임하면 금소동(臨河面 錦韶洞)에 정거(定居)하여 후진양상에 힘써 안동지역의 학문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일찍이 외조부(外組父)인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에게 수학하였으며,도덕적 실천을 위한 성리학에 힘써 그 이론을 더욱 심화 시켰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서 이(理)는 도덕사회의 가치기준이며 만물생성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다. 즉 천지만물의 변화가 모두 이 이(理)에 의하여 주재되므로 마땅히 이(理)로서 인간사회의 도덕적 기초를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도 그 소종래(所從來)의 근본이 다르므로 이(理)가 위주(爲主)되는 칠정(七情)과 대립시켜 보아야 한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도 비록 같은 심(心)의 지각(知覺)에서 비롯되지만 인욕(人欲)과 천리(天理)의 분별이 있으므로 마땅히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율곡설을 비판하였다. 그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당시 안동출신의 학자로는 권두경(權斗經), 권두기(權斗紀), 권구(權榘), 김성탁(金聖鐸) 등이 저명하나 그의 학통은 밀암(密菴)으로 이어진다.
밀암 이재(密菴 李栽 : 1657~1730)는 갈암의 3자(子)로 영양(英陽)의 수비(首比)에서 출생하였다. 퇴계와 갈암(葛菴)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더욱 철저한 분변(分辨)에 힘써 선현(先賢)의 미발처(未發處)까지 언급하였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이었으며 이발(理發)에 대한 근거를 주자(朱子)의 이동(理動)에서 찾아 이(理)는 기(氣)의 작용에 의하지 않고 이(理: 태극(太極))만으로도 일용동정(日用動靜)의 체용(體用)이 갖추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理)에는 기(氣)가 동정(動靜)할 수 있는 동정인(動靜因)이 있기 때문에 개별물의 제약없이도 이발(理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율곡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였다. 문인으로 이광정(李光靖), 김락행(金樂行) 등 60여 명이 있으나 그의 학통은 대산(大山)으로 이어진다.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0~1781)은 일직면 망호동(一直面 望湖洞) 출신으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예이며 당시 영남학파의 거봉(巨峯)이었다.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그 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소퇴계(小退溪) 라고도 불리어졌다. 그는 이기(理氣)의 관계나 동정(動靜)의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즉 이기(理氣)의 분개설(分開說)과 혼륜설(渾淪說)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현상을 보는 두 가지 측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이기(理氣)의 동정(動靜)에 있어서도 동정(動靜)하는 현상 그 자체로 볼 때는 「기동정(氣動靜)」이요, 동정(動靜)하게 하는 주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유동정(理有動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원(本原)의 이(理)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을 주재하므로 스스로도 능히 발용(發用)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는 새로운 학설(學說)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이기(理氣)의 동정(動靜) 가운데 이(理)의 묘(妙)만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이(理)는 무위이위(無爲而爲)요 불재이재(不宰而宰)로서의 묘(妙)가 된다는 입장에서 이(理)의 능동성(能動性)을 말한 것이다. 그의 문인은 유도원(柳道源), 정종로(鄭宗魯), 이야순(李野淳), 유장원(柳長源), 이종수(李宗洙), 김종덕(金宗德) 등 200여 명을 넘으나 학통은 상주(尙州) 출신의 손재 남한조(損齋 南漢朝: 1744~1810)를 거쳐 정재(定齋)로 이어진다. 정재 유치명(定齋 柳致明 : 1777~1861)은 대산의 외손으로 외가인 일직(一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종조(從祖)인 유장원(柳長原)에게 수학하고 20세 때 손재(損齋)의 문하에 들어갔다. 대산의 「활물설(活物說)」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적(主理的)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理)에는 능히 동정(動靜)할 수 있는 신묘(神妙)한 작용이 있다고 보아 이(理)의 자발적(自發的)인 동정(動靜)으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가 생긴다고 하였다. 즉 이(理)는 우주생성(宇宙生成)의 주체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본체가 된다고 하여 기(氣)가 없는 이(理)의 동정(動靜)만으로 천도유행(天道流行)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기(氣)를 잡박(雜駁)한 것이나 무능(無能)한 것으로 그 가치를 격하시키고 이(理)만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의 가치의식을 보였다. 그의 문인은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이진상(李震相), 유필영(柳必永) 등 15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은 성주(星州)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 학문 계보를 형성하여 한말 도학파(韓末 道學派)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재(定齋)의 학파(學派)은 서산(西山)으로 이어진다.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 1827~1899)은 서후면 금계(西後面 金溪) 출신이다. 정재(定齋)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학파의 정맥(正脈)을 계승한 한말의 마지막 거봉(巨峯)이 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주이적(主理的) 입장을 취하였으나 사칠론(四七論) 등의 순수 이론보다는 도덕적 인격 완성을 위하여 자기성찰에 힘쓰는 실천적 학문태도를 위주로 하였다. 그러므로 「팔학오도(八學五圖)」를 지어 도학정신에 따른 학문방법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밝혔다. 또한 경학(敬學)에 심취하여 「경재잠집설도(敬齋箴集說圖)」를 작성하여 내면적 수양에 힘썼다. 그의 문인은 권상익(權相翊), 조긍섭(曺兢燮), 김동진(金東鎭), 이상룡(李相龍) 등이 저명하며 그 중에서 석포 김동진(石圃 金東鎭)이 그 학파(學派)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외세(外勢)가 밀어 닥치는 한말(韓末)의 상황에서 학문전념의 길을 버리고 구국(救國) 활동으로 항일의병(抗日義兵)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것이다.
조식은 이황(1501~1570)과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이황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조식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인근에 위치한 청량산과 지리산은 이황과 조식에게 각각 정신적 고향이자 거울이었다. 이황은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조식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 갔다.
둘은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 이들이 생존하던 시절부터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선조대(宣祖代)에 윤승훈은 퇴계의 학풍을 이은 상도(上道,경상좌도)는 학문으로서 仁을 숭상하고,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하도(下道, 경상우도)는 절의(節義)로서 의(義)를 숭상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익(李瀷)은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함축적으로 대비시켰다. 퇴계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간 모범생 유학자라면 남명은 독특한 캐릭터의 유학자였다. 경(敬)과 의(義)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지니고 칼을 찬 모습하며,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어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강한 개성은 그를 특징짓는다. 이러한 남명에게 퇴계의 온건하고 이론 중심적인 성리학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퇴계 또한 남명의 학문을 일컬어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거나 ‘노장적 경향이 있다’고 하여 은근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두 사람의 학풍 차이는 현실인식에도 반영되었다. 퇴계와 남명은 50여년간의 사화기를 겪으면서 출사보다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명종대 이후 현실의 모순이 점차 해소되었다고 판단한 퇴계는 출사하여 경륜을 펴는 것 또한 학자의 본분을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남명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곧 처사(處士)로 남을 것을 다짐했다. 왜적에 대한 입장에서도 둘의 눈은 달랐다. 퇴계가 회유책를 견지한 데 비해 남명은 강력한 토벌책을 주장했다. 남명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는가 하면, 외손녀 사위인 곽재우에게는 직접 병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고 남명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되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퇴계의 성리학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 간 강항에 의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강항의 형은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로 강항은 형에게서 퇴계의 성리학을 배웠다. 강항의 성리학에 감동을 받은 일본인 후지와라는 승복(僧服)마저 벗으면서 강항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 퇴계의 성리학이 일본에 뿌리박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남명이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명성을 떨쳤다면, 퇴계는 조선의 국시(國是)가 된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전념하여 조선성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퇴계가 그 보다 훨씬 연배가 낮은 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편지를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대해 논쟁을 벌이면서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주력한 것은 조선을 성리학의 이념이 실현되는 나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주자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 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조선중기 이후에도 성리학이 국가와 사회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에는 퇴계와 같은 인물의 역할이 컸다. 퇴계를 일컬어 ‘동방의 주자’라 칭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한편 퇴계와 남명은 서로의 명성을 알고 수차례의 편지를 통해 안부와 건강을 묻곤 했다. 그러나 한차례의 만남도 갖지 않았다. 학풍과 현실관이 다른 학파의 수장(首長)으로서, 서로의 자존심이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내재했던 갈등의 싹은 급기야 이들의 사후 문인들의 정치적 분열로 이어진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최초의 붕당정치가 이루어졌을 때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모두 동인으로 자리 잡았지만,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퇴계학파는 남인, 그리고 남명학파는 북인의 중심에 서게 된다. 퇴계학파의 수장인 유성룡과 남명학파의 수장인 정인홍은 스승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했다. 특히 광해군대에 북인의 정권의 주역이 되었을 때 정인홍은 스승인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기 위하여 퇴계를 격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이들 학파는 서로 극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이 대립은 그 연원인 스승에게 이어져 동인이라는 한 배를 탔던 영남학파의 대분열의 중심에 퇴계와 남명의 이름을 새겨놓았던 것이다. 명종, 선조대까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루며 병렬적 관계를 보였던 두 사람의 입지는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확연히 차이를 드러낸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후 남명학파의 중심인 북인은 철저히 정치적 숙청을 당한 반면 퇴계학파의 남인은 서인의 붕당정치 파트너로서 정치권에 발을 딛는 한편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성리학의 중심지로 굳혀갔다.
남명이 조선 후기 내내 잊혀진 학자가 되었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 16세기를 대표하는 꼿꼿한 선비학자로 알려진 것과 달리, 퇴계의 명성은 조선성리학의 대명사가 되어 오랫동안 세인들에게 오르내렸던 까닭은 조선 후기, 정치사, 사상사의 흐름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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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내가 열 살 때 오언과 칠언 시를 배웠는데, 스승님께서 청량산(淸凉山)으로 시제(詩題)를 내려주셨다. 또한 산림과 골짜기의 기이하고 빼어난 형승(形勝)과 유, 불, 선(儒佛仙)의 무리들이 유람하였던 옛 자취를 상세히 말씀해주셨으므로, 이때부터 나는 이미 이 산에 대해 알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난리를 만나고 중년에는 과거에 뜻을 두었는지라 전란과 진토(塵土) 속에서 점차 수십 년의 세월을 잃어버렸다. 만력(萬曆) 연간 갑인년(1614년, 광해군 6년) 가을에 풍산(豐山)의 계화(季華) 유진(柳袗, 1582년 - 1635년)이 오미동(五美洞)의 부모님집으로 나를 찾아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내가 말하기를,
“한해도 저물었으니 어찌 청량산을 유람하여 이 회포를 풀어보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유군(柳君)도 또한 오랫동안 고난에 시달린지라 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응낙하고 마침내 9월 12일 신유일을 기일로 삼았다.
이날 나는 천성(川城) 집을 출발하여 말 한필에 종 하나를 따르게 하고 침구와 식량을 나란히 싣고 타고 갔다. 정오에 퇴곡(退谷) 금세인(琴世仁)의 집에서 쉬고는 남계(南溪) 금축(琴軸, 1496년 - 1561년) 공(公)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금세인은 금공(琴公)의 서출이다. 금공은 나의 조부[ 김농(金農)] 에게는 외당숙이 되는데 뒤를 이을 자녀가 없어 부인의 남동생인 권씨 [권일(權鎰)] 의 딸을 길러서 나의 조부에게 시집 보냈는데, 그때 권씨의 집과 전답, 하인을 주었다. 아아, 금공은 남쪽 고을의 훌륭한 선비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서로 친분이 두터웠으며, 공(公)이 돌아가시자 선생께서 그 묘지명을 써주셨으니 공의 인물됨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신주(神主)가 시골의 사당에 깃들어 있어 보잘것 없는 제물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용수현(龍壽峴)을 넘어 날이 저물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묵었다. 원장(院長)인 영월(寧越) 김택룡(金澤龍)이 이미 먼저 와있었는데 술을 내놓고 옛일을 이야기했다. 잠시 뒤 계화도 그의 조카인 장경(長卿) 유원지(柳元之)를 데리고 좇아 왔다. 밤에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술을 몇 순배 돌리고 술자리를 파하고는 암서헌(巖棲軒)으로 들어갔는데 암서헌은 곧 퇴도(退陶) 선생께서 전심하여 학문을 닦던 방이다.
암서헌 동쪽으로 송단(松壇)이 있는데 절우사(節友社)라 이름하고, 암서헌 서쪽의 협실(夾室)을 완락재(玩樂齋)라 하는데 지금도 선생의 궤장(几杖)이 안락재 안에 남아있다.
13일 임술일에 사당에 배알하고는 밥을 재촉하여 먹고 장차 산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현(縣)의 유생인 김숙(金琡)과 황유문(黃有文) 등 세 사람이 찾아왔으니, 대개 본 서원에서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함께 배향하는 일로 인해서 모여든 것이다. 원장이 이 때문에 서판(書板)과 서축(書祝), 절목(節目) 등을 우리들에게 물어왔고 또 남아서 그 모임에 참여하라고 했으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하여 사양하였다. 다만,
“종향(從享)과 배향(配享)은 절목이 서로 비슷하니 향교(鄕校)의 절목을 기준으로 삼으라.”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는 작력천(柞櫟遷)을 통해 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5리 쯤 가니 퇴계선생의 고택에 이르렀다. 선생의 손주며느리인 권씨(權氏)가 우리들에게 먼 친척의 돈독함으로 대해 주었다. 마침내 들어가 절하고는 선생의 평소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니, 마치 선생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의 용모를 접하는 듯하였다. 집 뒤의 주산(主山)은 매우 높고 컸는데 가장 높은 곳이 선생을 안장한 묘자리이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그 아래를 걸어서 지나갔다. 작은 재 하나를 넘었는데 장경(長卿)의 장인댁 노비로 온계(溫溪)에 사는 자가 우리를 위해 앞길을 인도했다. 작은 평지를 지나 동북쪽을 멀리 바라보니 푸른 벽이 주위를 둘렀고 흐르는 물이 굽이돌고 있었다. 앞길을 인도하는 자에게 지명을 물으니 대사동(大沙同)이라고 하였다. 계화가 말하기를,
“전에 단사협(丹砂峽)의 승경에 대해 들었는데 청량산을 유람하는 자들이 많이들 이곳을 빠뜨린다고 한다. 대사(大沙)란 단사(丹砂)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아래로 말을 달려 가니 외딴 마을에 두세 집이 있어 주진촌(朱陳村)[ 당(唐)나라 백낙천(白樂天)이 주진촌(朱陳村)에 대한 시(詩)를 지었는데, 그 마을에는 주(朱)·진(陳) 두 성이 살며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깊숙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하였음.] 에 방불하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 바위 위에 앉으니 푸른 벼랑과 단풍의 그림자가 맑은 물결에 잠겨 위아래로 거의 3, 4리에 이어져 있다. 계화가 말하기를,
“예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시냇가에서 학업을 전수받으실 때 선생께서 특별히 단사협에 가서 완상하라고 하셨으니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하고,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완상하며 정회를 일으키며 주저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가까워 마침내 신발을 고쳐 신고 상의를 벗은 채 걸어서 갔다. 백운지(白雲池)를 건너니 고인이 된 봉화(奉化) 금란수(琴蘭秀)의 별장이 나왔는데 그의 묘가 뒷산에 있다.
한 굽이를 돌아가서 다시 나루 하나를 건너니 어느 농부가 가리켜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면 두 번 물을 건너야 하나 말을 타고 갈 수 있으며, 오른쪽으로 가면 잔도(棧道)가 매우 험난하므로 걸어갈 수는 있으나 말을 타고 갈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일행이 말의 다리를 쉬게 하자고 하여 마침내 잔도(棧道)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거의 6, 7리를 가니 잔도가 끝이 나서 고개를 넘으니 문득 고산(孤山)이 서쪽 언덕에 솟아 있고 철벽이 동편으로 구불구불 이어지고 한줄기의 긴 물살이 그 사이에서 호탕하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곳이 금공(琴公)의 고산정사(孤山精舍)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물가로 가서 정사(精舍)를 바라보니 푸른 벼랑 곁에 자리하여 고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실은 푸른 벼랑과 등을 돌리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세 아들은 모두 세상의 관직에 얽매여 있다.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 이후로 다시 홍수에 잠겨 무너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쪽에 새로 소모정(小茅亭)을 세웠는데 바로 푸른 벼랑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들어가 앉으니 봉사(奉事) 이일도(李逸道)가 지은 것이었다. 사건(紗巾)과 도복(道服)을 입고 나와서 읍을 하고 맞이하여 앉게 하고는 산포도 한 그릇을 내와 갈증을 풀어주니 또한 하나의 흥취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금공(琴公)의 정사를 떠올려보니 다행히도 퇴계 선생의 평가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정사가 정사됨을 알게 하였다. 이 정자는 평지에 자리잡고 고산(孤山)에 기대어 있어 한 쪽면의 푸른 절벽이 모두 우리 것이 되었으니 그 형승에 대해서는 쉽게 순서를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과 이 정자는 선생보다 거의 오십 년에 뒤져있어 친히 한 말씀을 얻어 그 고하(高下)를 정하지 못하니 이것이 또한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릇 지금의 다행과 불행이란 것이 다만 금공(琴公)과 이공(李公)의 두 정자에만 그치지 않으니 내 또한 무슨 말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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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광명실 현판
도산서원 농운정사
도산서원 농운정사
도산서당 전경
도산서원 진입로
도산서원 동 전사청
도산서원 동 광명실
도산서원 동재 박약재
도산서원 상고직사
도산서원 서 광명실
도산서원 서 전사청
도산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시사단 전경
도산서원 열정
도산서원 옥진각
도산서원 장판각
도산서원 전사청에서 상덕...
도산서원 전사청 입구
도산서원 진도문 전경
도산서원 진도문 현판
도산서원 진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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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하고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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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청량산 도립공원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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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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