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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엄숙한 공간, 왕실의 족보와 조선의 역사를 보관하는 태백산 사고에 가다
1780년 8월 12일 맑음. 청량산을 유람 중이던 박종은 태백산 사고까지 이르렀다. 사고 밑에 있는 각화사에서 이른 아침에 절 밥을 얻어먹고 젊은 승려로 하여금 앞에서 길을 안내하게 하여 나라의 사책〔國史〕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올랐다. 비록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은 없으나 대체로 산세가 높고 커다란 골짜기가 깊게 파여 있다.
골짜기 가운데를 따라 길을 가니 돌계단이 비늘처럼 이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다. 누워 있는 소나무와 거꾸로 자라는 잣나무가 위아래로 얽어 있고 오래된 등나무와 늙은 넝쿨나무가 좌우에서 얽어 있다. 바람이 골짜기로 몰려가고 음산한 기운이 마치 어둑한 하늘과 같다. 물소리는 골짜기에서 마치 우레가 다투는 듯 은은히 들려왔다. 고요하여 귀신이 나올까 의심되고, 빽빽하여 호랑이와 표범이 나올까 두려웠다. 엄숙하여 두렵고 위풍이 당당하여 놀랄 만하였다.
10리를 올라가니, 여러 색깔과 무늬로 꾸민 높고 큰 건물이 구름 낀 하늘과 나무 끝 사이로 보인다.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의 12누대와 같다. 좌우에는 2층의 누대를 지었는데, 오른쪽의 누각은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편액을 하여 나라 왕실의 족보를 안치하고 있다.
왼편의 누각은 편액이 없는데, 국사(國史)를 안치하고 있다. 곁에는 참봉(參奉)이 거처하는 8, 9간의 행랑채가 있다. 한림(翰林, 왕의 행행 때에 호종하고 왕의 명령을 문서로 꾸미는 일 등을 맡은 정4품 관직)이 책을 말릴 때에 거처하는 별당이 몇 칸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나라에 절목(節目, 법)이 있는데 유람 온 사람은 관람을 금합니다.”
라고 하였다. 박종이 승려를 시켜 참봉(參奉)에게 전하기를,
“나라에서 금하는 것은 잡인을 금한다는 것이지, 어찌 보러온 유생을 금하겠는가?”
라고 하니, 참봉(參奉)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들어가 보니 다른 것은 볼 만한 것이 없는데, 한 승려가 짚신을 삼고 참봉(參奉)은 자리를 짜고 있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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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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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종(朴琮)
주제 : 놀이와 유람, 산책과 나들이
시기 : 1780-08-1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봉화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박종, 박종명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사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완질의 분량이 1,707권 1,188 책(약 6,400만자)에 이르는 방대 한 기록이면서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통신,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 운 역사기록물이자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실록 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국왕 사후에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 대대로 축적되어 이루어졌다. 실록을 편찬할 때 이용하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보고 한 문서들을 정리한 춘추관시정기(時政記), 전왕이 재위할 때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의정부등록(議政府謄錄) 일성록(日省錄) 등 정부 기관의 기록, 개인의 문집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史官)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들은 내용을 직필한 것으로,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사관(史官)이란 실록의 자료가 되는 사초를 작성하고 시정기를 찬술하던 관리를 말한다. 좁은 의미의 사관은 예문관 소속의 관리이면서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했던 ‘한림(翰林) 8인’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봉교(奉敎) 2인, 대교(待敎) 2인, 검열(檢閱) 4인이 있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사관은 한림 8인 이외에도 의정부, 육조, 승정원, 세자시강원, 홍문관 등의 당하관 관리로서 춘추관직을 겸한 사람을 포함하여 총 70여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사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림 8인은 참하관(參下官)으로 품계 7품 이하인 하급관리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사관이 사초(史草)를 작성할 때에는 권력의 압력을 배제하고 사실대로 직서함으로써, 기록의 공정성을 유지하고 국왕이나 집권 관료의 비리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작성한 국정 기록을 말한다. 한림 8인으로 구성된 사관은 궁중에 교대로 숙직하면서 조정의 행사와 회의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행, 인물의 선악 등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보관해 두었다가 실록을 편찬하거나 사관이 사망했을 경우에 춘추관에 제출하였다.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열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서로 인한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초에는 당대의 인물이나 정치에 대한 직설적인 논평이 수록되었으며, 이는 실록에서 사론(史論)으로 정리되었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받아 춘추관에서 정리한 기록을 말한다. 시정에는 국왕의 동정, 관리의 상소, 각종 의례 행사, 관리의 임면 사항 등을 날짜순으로 기록하여 실록의 내용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시정기는 매년 연말에 국왕에게 보고하였고, 3년마다 인쇄하여 춘추관과 의정부, 사고에 보관하였다. 시정기는 사초에 비해 외부로 쉽게 노출되었으므로 국가의 기밀 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직설적인 평가는 기록되지 않았다. 사초와 시정기는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실록의 초고본과 함께 세초(洗草)하여 기밀의 누설을 방지하고 종이를 재생하였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하였는데,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전주사고본만 남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출판 하여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마니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이후에도 보관처는 변동이 있다가 정족산(강화도), 태백산(경북 봉화), 적상산(전북 무주), 오대산(강원 평창)등 네 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 후 일제하를 거치면서 오대산본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소실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이 적상산본을 가져가 현재 남한에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남아 있다.
실록은 중국, 일본, 월남에서도 편찬된 바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국가의 실록과 비교할 때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을 포함하여 총 2,159책의 실록을 보관하여 오던 중 1984년 12월 24일 관리상의 안전을 위해 태백산본 848책을 분리하여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사로 이전하였다. 현재 규장각은 정족산본 1,187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97책 등 총 1,311책의 실록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규장각의 정족산본 실록은 전주사고본에서 이어진 것으로,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본이다. 정족산본 실록의 경우 다른 실록과는 달리 조선 전기의 실록인 ‘태조실록’에서 ‘명종실록’까지의 실록에 대해 방충과 방습을 위해 밀랍(蜜蠟)을 입혔는데, 밀랍을 입힌 실록에서 훼손 정도가 심한 것이 밝혀졌다. 이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는 ‘실록청의궤’와 ‘실록형지안’ 등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밀랍을 입힌 상황을 조사하고, 밀랍의 성분 및 밀랍을 입힌 종이의 분석 등의 연구를 수행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2일 맑음.
이른 아침에 절 밥을 얻어 먹고 젊은 승려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나라의 사책〔國史〕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올랐다. 비록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이 없으나 대체로 산세가 높고 커다란 골짜기가 깊게 파여 있다. 골짜기 가운데를 따라 길을 가니 돌계단이 비늘처럼 이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다. 누워 있는 소나무와 거꾸로 자라는 잣나무가 위아래로 얽어 있고 오래된 등나무와 늙은 넝쿨나무가 좌우에서 얽어 있다. 바람이 골짜기로 몰려가고 음산한 기운이 마치 어둑한 하늘과 같고, 물소리는 골짜기에서 마치 우레가 다투는 듯 은은히 들려왔다. 고요하여 귀신이 나올까 의심되고, 빽빽하여 호랑이와 표범이 나올까 두려웠다. 엄숙하여 두렵고 위풍이 당당하여 놀랄 만하였다.
10리를 올라가니 높은 전각의 단청이 구름 낀 하늘과 나무 끝 사이로 보인다.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의 12누대와 같다. 좌우에는 2층의 누대를 지었는데, 오른쪽의 누각은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편액을 하여 나라 왕실의 족보를 안치하고 있다.
왼편의 누각은 편액이 없는데, 국사를 안치하고 있다. 곁에는 참봉이 거처하는 8, 9간의 행랑채가 있다. 한림(翰林)이 책을 말릴 때에 거처하는 별당이 몇 칸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나라에 절목(節目)[ 법 ]이 있는데 유람 온 사람을 관람을 금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승려를 시켜 참봉에게 전하기를,
“나라에서 금하는 것은 잡인을 금한다는 것이지, 어찌 보러온 유생을 금하겠는가?”
라고 하니, 참봉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들어가 보니 다른 것은 볼 만한 것이 없고, 다만 한 승려가 신을 짜고 있고 참봉은 자리를 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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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 전경
태백산사고 전경
태백산사고
태백산사고
태백산사고 선원각 및 실...
태백산사고 선원각 및 실...
오대산사고 선원각
오대산사고 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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