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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에서 700년 전의 비석을 마주하고 감회에 젖다
1611년, 지리산 유람을 떠난 유몽인은 쌍계사에 도착했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 전서체로 쓰여진 비석의 제목)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임금이 내리는 명령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유몽인은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유몽인이 금오(金吾, 의금부의 별칭)의 문사랑(問事郞, 심문관리)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
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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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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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류몽인(柳夢寅)
주제 : 놀이와 유람, 고사와 기원
시기 : ( 미상 )
장소 : 경상남도 하동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유몽인, 유영순, 김화, 신상연, 신제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금석문(金石文)
오랜 역사를 가진 한자문화(漢字文化)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불교가 남겨 놓은 금석문(金石文)을 빼 놓고선 도저히 살펴볼 수가 없다.
불교는 경전으로 전해 내려왔고 그 불경은 원전이 아닌 것은 모두 종(鐘)과 정비(鼎碑)와 암석(巖石)등 쇠와 돌에 새겨진 글로 전해왔다.
이러한 종정관식(鐘鼎款識)이나 각석비판(刻石碑板)을 연구하는 학문이 곧 금석학(金石學)인 것이며, 넓은 의미로는 글이 있는 옥기(玉器)·도자기(陶磁器)·와전(瓦塼)과 새인(璽印)·갑골문(甲骨文)등의 연구도 금석학의 범주 안에 포함되고 있다.
우리 손으로 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은 고구려(高句麗)때인 서기414년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의 예서(隸書)이고, 백제(百濟)때 것으로 525년 무녕왕릉현실(武寧王陵玄室) 앞에 안치되었던 매지권(買地券)이란 판석문(版石文)의 해서(楷書)가 1971년 7월에 발굴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國立公州博物館)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신라(新羅)때의 것으로는 진흥왕(眞興王)이 562년 가야(伽倻)을 점령하고 세운 경남 창녕(昌寧)의 척경비(拓境碑), 그리고 서울 북한산(北漢山)을 비롯한 세 군데의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해서(楷書)로 남아 있다.
또 신라의 서예가(書藝家) 김원이 쓴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국보 제264호)가 전남 장흥보림사(長興寶林寺)에 있어 당시 당(唐)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가운데서도 한문학(漢文學)과 서법(書法)을 수입 발전시킨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사찰에 보유하고 있는 신라의 명필(名筆)은 김원외에 김생(金生)과 최치원(崔致遠)을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생은 글을 배울 때 나뭇잎 또는 나뭇가지로 땅 바닥에 글씨를 익히기 시작한지 40년 만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며 특히 행초서(行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칭하여졌고, 중국(중國)의 사신(使臣)이 신라에 오게 되면 김생의 행초필적(行草筆蹟)을 구해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명필 원교(圓嶠)이광사(李匡師)도 그 서결(書訣)에「동국필법신라김생위종비고려이후인가급(東國筆法新羅金生爲宗非高麗以後人可及」이라 썼다고 하니, 서도(書道)의 비조(鼻祖)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생(金生,711~791)의 필적(筆蹟)으로는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의「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편액(扁額)이 있다. 또한, 오늘날 경복궁(景福宮)에 보존되어 있는 백월탑비(白月塔碑)와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의 화엄석경(華嚴石經)이 또한 그의 글씨이다.
-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915)은 김생(金生)보다 좀 뒤의 신라인물로서 한학(漢學)의 개척기(開拓期)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필적(筆蹟)이 사찰(寺刹)에 없을 수가 없다.
고운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부지런히 공부한 끝에 과거에 급제(及第)하여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승무랑시어사(承務郞侍御史) 내공(內供)을 하다가 28세 때 우리나라로 돌아왔으나 신라가 쇠퇴해갈 무렵에 아무런 벼슬도 바라지 않고 산수지간(山水之間)을 소요자적(逍遙自適) 하던 중 경남 합천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만년(晩年)을 시(詩)와 글로 보냈으며 그곳 해인사의 홍류동(紅流洞)에 폭포시(瀑布詩)석각(石刻)글을 비롯하여 여러 계(溪)· 담(潭)· 폭(瀑)· 암(岩)· 교(橋)· 대(臺)등에 이름을 써 각(刻)하여 두었다. 하므로 해인사(海印寺)에 가면 그의 유적(遺蹟)을 살펴볼 수 있다.
절 안쪽 큰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왼편에 학사대(學士臺)언덕에 고운선생의 독서를 하고 거문고를 탓다는 곳이 있다. 그 곳엔 천년고목(千年古木)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운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꼽아 놓은 것이 살았다고 한다.
송회(松檜)가 창창(蒼蒼)한 벽령(壁嶺)에 둘러쌓여 바람소리 새 소리, 그리고 물소리 그칠 줄 모를 계곡이며 몇천년을 두고 씻기어간 큰 바윗돌들이 유난히 흰빛을 자아내는 홍유동 계곡에 절을 향해 올라오는 길 왼편에 근세(近世)에 만든 농산정(籠山亭)이라는 정자(亭子)가 하나 서 있고 그 정자(亭子)앞에 「고운 최선생 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라는 돌 팻말이 서 있다.
계천 바윗돌들에 못난 후세인들이 무슨 이름을 남길 것이라고 이름 석자 씩을 새겨놓은 크고 작은 각자(刻字)가 무수히 많다. 그 가운데 「홍류동(紅流洞)」이라는 큰 각자(刻字)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전서(篆書)이고 하나는 해서(楷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운선생의 친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 길 오른쪽에 고운선생의 친필로 된 제시석(題詩石)이 있다.
높은 돌벼랑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이 천년을 넘게 풍우에도 모두 씻기지 않고 남아 후학들을 반겨 준다. 그 시의 끝에 「우암서(尤庵書)」라고 새겨져 있지만 조선시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글씨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지만 시의 글씨와 완전하게 다른 글씨이다.
고운선생이 쓴 그 시구(詩句)는 이렇다.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미친 듯 첩첩 돌을 치는 물소리 여러 멧부리를 울려
사람의 말소리 지척 간에도 알아듣기 힘들구나.
옳다 그르다는 시비의 소리 들려올까 항상 염려스러워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끝까지 다 두르게 했네.)
이 시는 고운선생이 속세를 떠나 둔세인(遯世人)으로서 홍류동(紅流洞)계곡에서 물소리 들으면서 고운이라는 호(號)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외로이 지내는 자기 환경을 읊은 것은 아닌지...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에 가서 또한 고운선생의 글을 볼 수 있다.
쌍계사(雙溪寺)입구 길 우측(右側)에 큰 바위에 「석문(石門)」, 좌측(左側) 바위에 「쌍계(雙溪)」라고 새겨진 큰 각석문자(刻石文字)가 있다. 잘 보이라고 자획(字劃)을 붉은 칠이 되어 있다.
이것이 고운선생이 직접 쓴 것이다 비록 현판(懸板)글은 아니지만 일주문(一柱門)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표시한 하나의 편액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쌍계사 대웅전 바로 앞 경내에 서 있는 진감선사(眞鑑禪師) 대공탑비(大空塔碑)도 고운선생이 정강왕(定康王)의 명을 받아 당나라 까지 유학했던 고승 진감선사(眞鑑禪師)의 사적을 짓고 쓴 것이라는데, 비문 첫줄에 「신최치원봉(臣崔致遠奉)」이라는 글이 쓰여 있어서 어명(御命)을 받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 옆에는 「이 비명(碑銘)은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으로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금석문(金石文) 사대웅필(四大雄筆) 중 그 첫째 되는 것이며 국보 제 47호다」 라는 요지의 입간판(立看板)이 있다.
신라 초기에는, 김생(金生)과 같이, 그 서풍(書風)이 중국 진대(晉代)의 왕희지(王羲之)서법(書法)에 의한 것이고 신라 말기에 와서는 당(唐)의 구양순(歐陽詢)체를 따라 썼으며 따라서 진감선사(眞鑑禪師) 대공탑(大空塔)비문(碑文)도 구양순체(歐陽詢體)로 되어 있다.
고운최치원(孤雲崔致遠)의 필적(筆蹟)이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는 목판(木板)에 각자(刻字)되어 일반에 보급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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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帒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 885년부터 887년까지를 가리킴.] 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나는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내가 금오(金吾)의 문사랑(問事郞)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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