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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에 남아있는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서 지례읍으로 향해 오다
1894년 10월 어느날, 여중룡은 난리를 피하여 지례읍(知禮邑)에 들어가서 친척인 호운(湖雲)과 같은 집에 있다가 10월 11일에 식구를 다 데리고 이사를 하였다. 한편, 무주(茂朱)의 동학도는 계속 존속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고을의 수령이 대구부(大邱府)에서 병사 20명을 청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막을 채비를 갖추었다. 어느날 보니 무주 근방의 동학군이 정황을 살펴보니 몇 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지례읍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서 포수와 창잡이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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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갑오병신일기(甲午丙申日記)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여중룡(呂中龍)
주제 : 의병
시기 : ( 미상 )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일기분류 : 의병일기
인물 : 여중룡, 호운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일본군의 공세와 무주지역 동학농민군의 반격
이 부분은 1894년 10월의 일기이다. 이날 일기에는 무주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다시 일어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1차 봉기 이후 동학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상황 아래서,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청국이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져 갔다.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吳知泳)이 그 조정책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孫秉熙)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계획을 세웠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세성산(細城山)은 김복용(金福用)·이희인(李熙人) 등이, 수원은 김정현(金鼎鉉)·안승관(安承寬) 등이, 홍천은 고석주(高錫柱), 공주는 최한규(崔漢圭), 옥천은 정원준(鄭元俊) 등의 동학접주들이 점거하였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金福明)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부대는 나주에, 김개남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전자는 우금치(牛金峙)에, 후자는 이인(利仁)과 효포(孝浦)에 진을 쳤다.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魯城邑)에서 공주의 경천점(敬天店)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인역(利仁驛)으로 전진하였고, 다른 부대는 효포(孝浦)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大橋)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였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리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熊峙)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북상해 옴으로써 합세하게 되자 기세를 돌이키게 되어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은 공주의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板峙)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부대도 북상하여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또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는 순창에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고 마침내 충주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그 뒤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고 있던 전라도지방의 동학농민군은 한때 순천에 집결하여 여수의 좌수영을 향해 진격한 바 있으나 오래지 않아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정보
余之避東亂 入知邑 與湖雲從 同室而居矣 至十月十一日 盡家眷移居 湖雲則同日而移隣屋 居數月 (又)以憂患 又移隣居 旣在邑部 居隣皆是下吏 無可與相從者 不得已晝宵遊從者 只是本倅李範稷父子而已<時李宰夏氏爲本倅> 十月之間 茂朱之東徒 猶未息 近邑之徒 自營將去後 亦有更起之慮 故本倅請大邱府兵隊二十人 選防守將沙月李性伯 俱砲丁二十 各設一邑之野調 以備方略矣 一夜爲寒松亭民之誤傳虛驚 一呼野調 一夜之間 皆聚 砲丁四十 衣黑軍服爲前隊 鎗丁數千爲後軍 布列成陣 可以捕衣白衣持竹杖之賊數萬矣 一日 又堠於茂朱界 東徒不知幾千名 向知禮云 故送砲丁與槍軍 至茂朱縣內里 聞之 則皆已向黃永之間云 故無事而還矣
◆ 원문 번역
1894년
10월 어느날
나는 동학란을 피하여 지례읍知禮邑에 들어간 후 족종 호운湖雲과 한 집에 기거하다가 10월 11일에 이르러 식구를 다 이끌고 이사하였다. 호운은 이날 이웃집으로 옮겨 두어 달 살다가 우환 때문에 다시 이웃으로 옮겼다. 이미 읍부邑部에서 이웃에 살던 사람은 모두 관청의 하리下吏들 뿐이니 상종할 사람이 없어 부득이 밤낮으로 오가며 상종한 사람은 다만 지례 현감 이범직李範稷 부자뿐이었다.<이때 이재하李宰夏 씨가 본관 수령이었다>
10월 사이에 무주茂朱의 동학도가 오히려 소요를 그치지 않고 근처 고을의 무리들도 영장이 떠난 후부터 다시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본관 수령이 대구부大邱府의 병대 20명을 청하고 방수장防守將으로 사월沙月의 이성백李性伯을 선발하여, 포정砲丁 20명과 함께 일읍의 야조野調를 차리고 방략을 갖추었다. 어느 날 밤에 한송정寒松亭 마을의 촌민이 잘못 전한 경보 소리 한 번에 야조가 하룻밤 사이에 모였는데, 포수 40명은 검은 군복으로 선봉이 되고 창잡이 수천 명이 후군이 되었다. 늘어서서 진을 치니 흰 옷 입고 죽장을 든 도적 수만 명을 잡을 수 있을 듯하였다. 어느 날 또 무주 근방의 동도東徒의 정황을 척후하니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무리가 지례를 향해 오고 있다고 하는지라 포수와 창잡이를 파송하였다. 무주의 현내리縣內里에 이르러 들어보니 동도가 모두 이미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로 향해 갔다고 하여 아무 일없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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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송되어 가는 전봉준
김개남
흥선대원군 효유문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날짜
장소
멀티미디어
1
여중룡이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해 지례현감과 상의하다
1894-07-01
경상북도 김천시
2
여중룡이 동학군을 피해서 도망가서 지례읍에 도착하다
경상북도 김천시
3
호운이 동학농민군에게 쳐들어갔다가 심하게 맞고 크게 다치다
경상북도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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