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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자리 송사 때문에 길을 나서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아버지의 원한, 며느리가 풀어드리다
1806년 5월 3일, 임천서당 회원인 나천(羅川)의 조원열(趙元烈)이
산송
을 하러 가던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애통하고 참담한 이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인 5월 4일에 임천서당 회원 일부가 약속한 대로 중건 현장에 모여 전병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 절을 하며 하회 서방님을 찾았다. 하회 서방님은 김명운(金明運)을 일컫는 말이었다. 김명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급한 행색을 보고 궁금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이에 그 하인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소인은 나천에 사시는 조 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아 수습한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최근 무덤과 예전에 투장한 무덤 3기를 파내고 곧바로 관가에 가서 직접 고발하였습니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였고, 익사한 조원열의 며느리를 말한다. 이 사연을 듣고 모두들 놀라 슬퍼하였고, 그 며느리의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임천서당중건일기(臨川書堂重建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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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상
주제 : 산송, 원한, 효부
시기 : 1806-05-03 ~ 1806-05-04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서원일기
인물 : 조원열의 며느리, 소송 상대편, 조원열, 김명운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의 산송
산송은 산소(山所), 곧 묘지(분묘)에 관한 송사(訟事)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조선 중기 이후 명당(明堂)을 찾는 음택(陰宅)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땅의 형세나 특성을 인간의 행복·불행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특히 유행하였는데, 산송은 이러한 명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명당에 조상의 무덤을 쓰면 자신이나 집안의 부귀는 물론 후손들까지 조상의 은덕(隱德)을 입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각 집안마다 좋은 터를 선산(先山)으로 선정하여 집안 사람의 무덤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산소와 관련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심할 경우에는 남의 무덤을 파 내고, 파 낸 자리에 자기 집안 사람을 묻는 경우까지 생길 정도로 산소와 관련된 문제는 심각하였다. 조선시대 사서(士庶)·하리(下吏)·천민(賤民) 등이 관(官)에 올리던 소지(所志)나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관에 올리던 등장(等狀)에 산송이 가장 많은 것만 보아도 산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주요 법령집이나, 문중마다 내려오는 고문서 등에도 산송과 관련된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산송이 그만큼 중요한 사회문제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왕의 수교(受敎)를 모아 놓은 법령집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민사소송을 심리하는 데 쓰던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소장 고문서(光山金氏禮安派宗家所藏古文書:보물 1018) 등이 그 예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어윤중(魚允中)이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용인(龍仁)에서 향반(鄕班)의 머슴에게 살해된 것도 산송문제 때문이다. [출처] 산송 [山訟 ]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시나리오는 자신의 선산에 몰래 투장한 이를 관아에 고소하였던 조원열이 객사하면서 벌어진 효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원열은 임천서당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임천서당 중건 일기(臨川書院重建日記)』에 담겨 있다. 또한 산송 문제를 해결한 며느리에 대한 소식이 임천서당 중건 현장에서 조촐하게 가졌던 서당 회원들의 모임에 전해졌기 때문에 이 일기에 기록된 것이다. 임천서당은 1568년 김진(金璡: 1500∼1580)의 셋째 아들 김명일(金明一, 1534~1570)이 주축이 되어 연암사(緣巖寺) 터에 건립하였던 지방 사립 교육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임하현 강가에 건립된 이 서당은 1607년 김성일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사우(祠宇) 내지 서원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20년 김성일의 위패는 이황이 제향된 여강서원(廬江書院)에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배향되면서 임천서당은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또한 사빈영당 건립시 임천서당의 재목들이 사용되고, 여기에 속했던 토지와 노비들도 모두 사빈영당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임천서당은 터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임천서당을 중건하자는 제안이 1803년 3월 구계서원 향사에서 발의되었다. 이중조와 유정엽이 중건을 발의하고, 중건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사림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임천서당 중건을 위한 임원을 정하여 그 일들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임천서당의 건립은 영남 사림의 정신과 연결된 영남의 행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히 임천서당의 회원들은 임천서당 중건 공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공사 현장 방문으로 이어졌다. 1806년 5월 4일 임천서당 공사현장에서 서당 회원들이 조촐한 모임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조원열 집의 하인이 두건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김명운을 찾아 임천서당 공사현장까지 달려왔다. 5월 3일 산송 문제로 관아에 가던 길에 조원열이 그만 익사하였고, 산송 문제로 인해 객사한 시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하던 그 며느리가 몰래 투장한 피의자의 무덤 3기를 파헤쳐 관가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그 며느리는 하회에 사는 김명운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서당 회원들은 그 며느리를 효부라고 칭찬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806년(순조6) 5월 3일 서당 회원인 나천의 조원열이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하니, 애통하고 참담하다.
5월 4일 용궁의 이장욱 형제가 금수로부터 서당에 도착하여 살펴 감상하면서 대단히 좋다고 하였다. 천지의 김홍운‧지례의 김익운과 김시규‧귀현의 김태운도 또한 와서 모였다. 본 마을 도감과 김시연‧김시교가 맞이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빈집이어서 모여 놀 비용이 없어서 다만 담소와 농담만 하고 있기가 섭섭하였다. 김시연이 소매에서 그 큰조카 김점운이 지은 상량문을 꺼내 보이자, 이장욱이 칭찬해 마지않으면서 김시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젊은이가 이런 정도의 글 수준을 가진 경우는 내가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 숙부된 사람으로서 어찌 한 턱 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시연이 크게 웃으면서 술을 샀다. 만음의 옥현응이 또 도착해서 자리에 있다가 서당 회원으로서 늦게 왔다고 하여 동전 3전을 내었다. 적과 떡을 마련하고 술을 사서 함께 단란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갑자기 한 상놈이 두건이 벗겨진 채로 급히 와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하회 서방님 오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김명운을 일컫는 말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묻기를,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소인은 곧 나천의 조생원 댁 종입니다. 소인의 상전께서 어제 산송을 하러 가던 길에 물에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찾은 후, 청상으로 계시던 부인께서 원통해하시며 친히 소송 상대편 놈의 신구 무덤 3기를 파내고 곧 바로 몸소 관가에 가서 고발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청상은 곧 김명운의 사촌 여동생이고, 조원열의 며느리이다. 이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놀라 슬퍼하였으며, 다들 그 효성과 정열貞烈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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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 관련 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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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 관련 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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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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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자리 쟁탈전으로 인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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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아버지의 원통함을 풀고자 투장된 무덤을 파헤친 며느리에 ...
1806-05-25
경상북도 안동시
2
서원에서 쫓겨난 자, 앙심을 품고 때를 기다리다
1621-03-28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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