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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이 깊어진 동인과 서인의 갈등
1583년 3월 19일, 병조판서 이이(李珥)과 예조참판 정철(鄭澈), 점치
남언경(南彦經)
이
남언기(南彦紀)
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뜻과 유학적 사상을 함께하는 이들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권문해와는 그 뜻을 달리하는 서인(西人)쪽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함께 보기를 청하였다. 다소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뜻이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눌 줄 알았던 권문해는 초대 자리에 응하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권문해는 먼저 일어나 돌아왔다. 이이와 남언경, 남언기는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이이와 정철, 남언경을 비롯하여 세종의 현손 경안부령
이요(李瑤)
도 함께 한 자리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요(李瑤)
가 임금과 독대하며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등 이황(李滉)의 문인 및 제자 10여 명의 동인(東人)을 헐뜯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권문해를 비롯하여 동인(東人)쪽 사람들은 병조판서 이이(李珥)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여겼다. 동인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4월 12일,
이요(李瑤)
가 임금 앞에서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 이발(李潑),
김효원(金孝元)
등을 헐뜯고, 이이(李珥)도 상소하여 동인을 헐뜯었던 사실이 밝혀지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고 두려웠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초간일기(草澗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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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문해(權文海)
주제 : 한양, 정치관계, 정치적 갈등, 동인과 서인
시기 : 1583-03-19 ~ 1583-04-1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권문해, 이이, 정철, 남언경, 남언기, 류성룡, 김응남, 이발, 김효원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류성룡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권문해
◆ 선조 말년, 광해군 초의 당쟁
동서분당은 1575년(선조 8)에 일어난 당론(黨論)이다. 조선 당쟁(黨爭)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며, 당시 이름이 높던 젊은 선비 김효원(金孝元) 일파와 명종왕후(明宗王后)의 아우로 권세 있는 심의겸(沈義謙) 일파와의 반목·대립에 기인(起因)한다. 이 두 사람의 대립을 일으키게 한 직접 원인은 전랑(銓郞)의 직(職)을 에워싼 암투(暗鬪)에 있었으며, 처음 김효원이 장원급제(壯元及第)로 문명(文名)이 높아 전랑에 천거(薦擧)를 받았는데, 심의겸이 이에 반대한 것이 최초의 발단이었다. 그 반대 이유는 김효원이 일찍이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 집에 머무른 일이 있어 젊은 선비로서 권세에 아부하는 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김효원은 마침내 전랑이 되었으나, 그가 이임(離任)할 때는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沈忠謙)이 천망(薦望)에 오르게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이를 반대하였다. 반대 이유는 왕의 외척(外戚)으로 인사(人事)를 장악한 전랑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사건으로 양가의 불화는 결정적으로 되고, 마침내 사류는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어, 당시의 관리와 유생(儒生)들은 모두 양파 중 어느 하나에 붙어서 서로 반목(反目)·질시(嫉視)하기에 이르렀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편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편 정동(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동서분당 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실로 당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정치적·사회적으로 그 끼친바 영향이 컸다. 임진왜란(壬辰倭亂) 같은 국란을 당하여는 평화 시보다는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당파간의 알력은 면할 길이 없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직을 파면당한 것도 당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일단 외난(外難)이 걷히고 평화가 회복되자 당쟁은 더욱 치열해 갔다. 이리하여 당파의 분열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생긴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東人)이 득세하여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門人)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세자책봉문제)을 전후하여 동인 중에는 서인에 대한 강경파(强硬派)와 온화파(穩和派)로 갈리어 남인과 북인의 대립이 생겼다. 이 남북인의 분열도 학파(學派)로 보면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 간의 대립이었다. 임진왜란 후 세력이 강하여진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졌으며, 광해군 일대(一代)는 그를 추대한 대북이 정권을 전담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야(野)에 있던 서인은 광해군이 생모(生母)가 아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臨海君)과 이복(異腹)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는 죄목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하고 인조를 옹립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3년 3월 19일 맑음. 병판(兵判) 이숙헌(李叔獻, 이이(李珥))·예아(禮亞, 예조 참판) 정계함(鄭季涵, 정철(鄭澈))·첨지(僉知) 남시보(南時甫, 남언경(南彦經))가 남장보(南張甫, 남언기(南彦紀))의 집에 모였다. 사람을 보내어 보기를 청하였으므로 가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먼저 나온 뒤에 여러 공들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이날 정사(政事)에서 사성(司成)의 부망(副望)과 군기시 정[軍器正]의 부망에 들었지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숙헌(叔獻)과 여러 공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 종친(宗親)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이라는 자가 그 속에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대(獨對)를 청하였는데, 탑전(榻前)에서 당대의 명사(名士)인 류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男) 등 10여 인을 헐뜯었다. 사류(士類)들 사이에는 숙헌(叔獻)과 여러 공들이 지시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 뒤에 내가 모였던 곳에 참석하였다는 것 때문에 서인(西人)들이 대부분 지목한다고 하니 탄식할 만하고 웃을 만하다. 1583년 4월 12일 구름이 끼어 흐리다가 비를 뿌렸다. 경안 부령(慶安副令) (이)요(瑤)가 상소(上疏)하여 면대(面對)를 청하고 탑전(榻前)에서 류이현(柳而見, 류성룡(柳成龍))·김중숙(金重叔, 김응남(金應男))·이경함(李景涵, 이발(李潑))·김인백(金仁伯, 김효원(金孝元)) 등 여러 사람을 들면서 동인(東人)이 일방적으로 아뢴 일을 극력 진술하였고, 병조판서[兵判] 이숙헌(李叔獻, 이이(李珥))도 상소하여 극력 동인을 헐뜯으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미지
옥연정사 전경
옥연정사
옥연정사 주변
옥연정사 별당채
옥연정사 사랑채
옥연정사 천장과 현판
담양송강집 및 기암집 목...
담양송강집 및 기암집 목...
정철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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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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