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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이 깊어진 동인과 서인의 갈등
1583년 3월 19일, 병조판서 이이(李珥)과 예조참판 정철(鄭澈), 점치 남언경(南彦經)남언기(南彦紀)의 집에 모였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뜻과 유학적 사상을 함께하는 이들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권문해와는 그 뜻을 달리하는 서인(西人)쪽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함께 보기를 청하였다. 다소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뜻이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눌 줄 알았던 권문해는 초대 자리에 응하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권문해는 먼저 일어나 돌아왔다. 이이와 남언경, 남언기는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이이와 정철, 남언경을 비롯하여 세종의 현손 경안부령 이요(李瑤)도 함께 한 자리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요(李瑤)가 임금과 독대하며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등 이황(李滉)의 문인 및 제자 10여 명의 동인(東人)을 헐뜯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권문해를 비롯하여 동인(東人)쪽 사람들은 병조판서 이이(李珥)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여겼다. 동인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4월 12일, 이요(李瑤)가 임금 앞에서 류성룡(柳成龍)과 김응남(金應南), 이발(李潑), 김효원(金孝元) 등을 헐뜯고, 이이(李珥)도 상소하여 동인을 헐뜯었던 사실이 밝혀지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고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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