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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죽음으로 조정에서 밀려난 동인(東人)
1575년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1584년 1월 16일, 서인세력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이이(李珥)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조정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병조판서 이이의 죽음은 선조에게도 큰 충격이자 아픔이었다. 더욱이 서인들은 이이의 죽음의 탓을 동인에 돌리며 모함과 질타가 끊이질 않았고, 이에 선조는 조정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인을 지방의 외직으로 보낸다. 이에 동인들의 한탄 또한 끊이질 않았다. 권문해 또한 명사(名士)들이 쫓겨나는 상황을 한스럽게 바라보았다. 김효원(金孝元)홍적(洪迪)은 이미 황해도의 안악(安岳)과 장연(長淵)으로 보내졌으며 대사헌 이기(李墍)는 전라남도 장흥으로, 승지였던 김응남(金應南)은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던 1584년 5월 27일, 태평관(太平館)에 벽서가 한 장 붙었다.

밝은 시대 누가 군자의 붕이라 말하였던가 昭代誰云君子朋
다만 지사로 하여금 마음 무너지게 하는구나 徒令志士寸心崩
조정 신하가 붕당을 나눈 것이 아니건만 朝臣不是分朋黨
임금께선 어찌하여 유독 아끼고 싫어하시는가 聖主如何獨愛憎
서해의 텅 빈 누각에 천 길 나는 봉황 있고 西海空樓千仞鳳
남명에 부질없이 한 조각 얼음 던지누나 南冥虛擲一條氷
파산의 한 밤에 요사스런 소 울음소리 巴山半夜妖牛吼
이 나라 뿌리를 머리털 있는 중이 흔드네 仙李根搖有髮僧

이 시는 곧 권문해에게도 전해졌는데, 그 시를 보자 권문해는 조정의 주요 관리들이 죽은 이이 때문에 한양을 떠나 멀리 좌천되는 안타까움에 크게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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